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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29>

등록 2005-10-13 16:48

먼하늘가까운바다 <29>
먼하늘가까운바다 <29>
“엄마가 걱정하고 있어. 여자의 직감인지, 내게 묻더라구. 그 남자가 그 남자냐구?”

공지영

나는 노트북에 저장해 두었던 음악 파일을 켜놓고 눈을 감았다. 쇼팽의 카바티나가 아까 호숫가에서의 어이없는 마주침과 내 넘어짐과 지희의 따뜻한 위로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흘렀다. 네 방에 불을 켜듯 네 마음에 불을 하나 켜고 네 자신을 믿어봐. 지희의 걱정스러운 어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언제나 쿨하고 듬직한 친구.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돌아온 탕자 모양으로 집으로 들어서는 나를 안으며 말했었다.

-괜찮다, 괜찮아. 홍아, 네 나이 때는 정답을 못 찾는 것이 정답이야. 모범답안으로만 살면 진짜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거야.

“언니 들어가도 돼?”

록이였다. 혼자 있고 싶었으므로 나는 록이의 침입이 싫었다. 나가줘, 라고 말했지만 록이는 내가 몸을 담근 욕조 가에 걸터앉았다.

“언니 정말 괜찮은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가 걱정하고 있어. 여자의 직감인지, 내게 묻더라구. 그 남자가 그 남자냐구?”

너어, 하고 내가 록이를 올려다보자. 록이는 마치 언니가 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아, 언닌 내게 두 가지만 말하겠는데 할 거 아니야, 아마 하나는 여기서 당장 나가, 일 거고, 또 하나는 언니 사생활에 대해 언니가 입 열 때까지 참견하지 말아달라고….”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 말이야…. 록이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더니, 힘에 겨운 듯 손톱에 있는 거스러미를 떼어내며 잠시 침묵했다.

“언니 말이야, 나 일본 싫어. 일본 가수는 좋구, 노래도 좋지만, 그래도 일본은 싫어. 그 사람들 우리한테 나쁜 짓 그렇게 많이 해놓고 시치미떼면서 나오는 거 너무너무 싫다구. 무슨 소리냐 하면… 언니, 그치만 사사에 그 사람 소설 봤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 한 나라에 모두 같은 사람들만 사는 것은 아니라구. 그 사람이 일본인이라고 해서 싫어한다면 그 사람들이 우릴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하는 것과 뭐가 달라?”

록이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록이는 훌쩍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중학교 때 벌써 나보다 키가 커버린 록이였다. 그래도 내게는 언제나 어린 동생처럼 보였는데 록이가 훌쩍 큰 듯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내 마음이 누구에게든 기대고 싶을 만큼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록아 언니가 두 가지만 말하겠는데….”

록이는 그때 나를 빤히 쳐다보았는데 그 눈에 연민이 가득 차 있었다. 록이가 그렇게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자 갑자기 말문이 막혀왔다.

“하나는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다는 거고, 또 하나는….”

나는 입술을 물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울컥, 하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록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언니 나머지 하나는 내가 말해 줄게. 두려워하지 마. 설사 여기서 다시 영영 이별을 하더라도…. 언니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구. 나 아직 사는 게 뭔지 사랑이 뭔지 잘 모르지만 해 놓고 하는 후회보다 하지 못해서 하는 후회가 더 크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평소 같았으면 어쭈, 내가 언니냐? 네가 언니냐? 하고 록이를 쥐어 박았겠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록이는 욕실을 나갔다. 다시 딩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메일이 왔다는 알림 표시였다. 순간 준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내 메일 주소를 알아내는 것도,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것도 모두 가능할 테니까. 갑자기 그가 내 메일 주소인 ‘나우 리그렛’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싶자 겁이 났다. 메일을 여는데 손보다 먼저 가슴이 떨고 있었다. 내가 커서를 대자 ‘아폴로스 차일드’라는 아이디가 보였다. 민준이었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전후 60년 동안 우리는 뭘 해 왔단 말인가

쓰지 히토나리

“어디 갔었어?”

나를 보자마자 달려온 칸나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쭉 여기 있었니?”

내가 묻자 칸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침부터 저기에서 쭉 기다리고 있었어, 하며 로비 한쪽의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어디 갔었어? 일본인 모임에서도 걱정하고 있어. 그 사람들하고 약속한 거 잊어 버렸어? 혹시, 그 사람 만난 거야?”

칸나가 눈을 크게 뜨고 내 눈에 새겨져 있을 잔상을 들여다보려 한다. 순간 홍이가 달려가던 모습이 되살아난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다 빗겨가던 순간에 일던 바람이 다시 분다.

“그래, 만났어.”

만났다란 말의 희미한 여운을 반추하며 나는, 그렇지만 순간이었다, 하고 변명처럼 덧붙였다.

뜻밖에도 칸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선을 비끼며 못 들었다는 듯 배고프다, 뭐라도 먹으러 나가, 하고 말했다.

호텔직원에게 근처의 맛있다는 식당을 소개받았다. 뜨거운 쇠고기 국물에 몸이 녹는다. 식사 내내 칸나는 말이 없다. 주문을 하고 음식을 먹고 음식점을 나올 때까지 두 사람 모두.

좀 걷고 싶다는 내 말에 칸나는 그래, 하고 작은 소리로 응했다. 둘은 바싹 붙지도 저만치 떨어지지도 않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호텔 주변을 걷는다.

골목에는 포장마차들이 늘어서 있었고, 젊은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오뎅이나 떡볶이를 먹고 있다. 미국식 바나 일본식 가라오케, 한국의 민속주점 네온이 골목 좌우로 사이좋게 불을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와 같은 편의점이 있어 들여다보니, 내부도 똑같다. 점원도 손님도 분위기도. 그렇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뭔가가 다르다.

조금 더 걸으니 휘황한 불빛의 동대문 패션타운이 나왔다. 신주쿠의 가부키초와 같은 불야성이지만, 보다 현대적이면서도 보다 아시아적인 냄새와 에너지가 넘친다. 빌딩 한쪽은 라스베이거스를 연상시키는 전구장식이 눈부시다. 사람들의 흐름에 끼어 빌딩 사이를 걷는다. 관광객과 젊은이들로 넘친 거리는 밤 11시가 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한다. 일본인 관광객도 적지 않게 섞여 있을 터였지만, 얼굴만으로는 국적을 알 수가 없다. 여기는 서울이라기보다 아시아를 상징하는 궁전 같은 거리다.

“가자.”

칸나가 멍하니 서 있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겨우 건물 밖으로 나왔지만, 호텔로 가는 길을 잃고 말았다.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에게 영어로 길을 물었지만, 중국인 유학생이라는 그들 역시 길을 잃었다고 했다. 교차로로 나와 주위를 둘러본다. 록본기나 신주쿠에 있는 교차로와 뭐가 다를까. 주변의 간판이 일어가 아니고 모두 한글이란 것뿐. 하지만 그 차이는 열쇠가 열쇠구멍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이 당황스럽다.

알파벳이나 한자로 써 있는 경우는 다소 그 뜻을 유추해 낼 수 있어 의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글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일본인에게는 중국의 한자보다 더 멀게만 느껴진다.

“어땠어? 한순간이었다는 건 무슨 뜻이야?”

고바야시 칸나가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듯, 혹은 확인이라도 하듯 묻는다. 나는 도망이라도 치듯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빈 차를 잡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다시 걸었다. 뒤쫓아 온 칸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나는 간판에 적힌 한글을 노려본다.

“반가웠어?”

칸나가 같은 질문을 한다.

“반갑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간은 없었어. 정말 한 순간이었으니까.”

“한순간?”

“그래.”

내뱉듯이 대답하자, 갑자기 칸나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일어난 바람에 내 머릿속의 홍이가 의식과 현실 사이를 달려 나갔다. 눈 깜짝할 그 틈을 타고.

그 순간, 나는 분명 엄청난 양의 뭔가를 받아 안았다. 그것은 역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와 홍이가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혹은 인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유전자와 같은 역사. 그 무한의 신호를 나는 그 순간 홍이에게 전해 받은 것이다. 그 방대한 정보 탓에 내 사고는 정지되고 말았다. 처음에 느꼈던 것은 사랑의 종말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달려오는 홍이와 나누었던 시선이 그 속도로 인해 끊어졌을 때, 나는 현실의 잔혹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람이 일어 내 육체는 홍이의 잔상에 기대어 그녀가 남기고 간 것들을 주워 모았다. 그 추억 속에는 희미하지만 희망이 있고, 조금이지만 내일이, 그리고 미래가 있다. 모래사장에 앉아 모래를 긁어모으듯 나는 홍이가 남기고 간 방대한 정보를 끌어안게 된 것이다.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이가 일본어를 배운 것처럼 나도 한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가까워질 수 없는 문화를 가까이 느끼기 위해 언어가 필요하다.

문득 고개를 드니 멀리 서울타워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으로 우리는 무사히 호텔 입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전후 60년 동안 우리는 뭘 해 왔단 말인가.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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