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27>
사랑에 집착하는 순간, 거기에 모든 걸 거는 순간,
남자는 떠나가는 거야. 남자의 본성은 사냥꾼이거든 공지영 한참을 그러고 있었던가, 어디선가 낯익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희미했다. 소리는 다시 분명히 들려왔다. 내 파카 호주머니에서 나는 소리였다. 휴대폰을 꺼내보니 지희라는 발신자명이 반짝이고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일어나며 전화를 받았다. 내가 여보세요, 하자 지희는 대뜸 홍이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하고 물었다. 그러고는 깔깔거리더니 말했다. “너 또 낭창낭창하고 조그만 여자애 봤구나, 이번에는 걔가 결혼한다고 하는구나. 그것도 너무 괜찮은 남자랑. 그지?” 지희의 목소리가 너무 밝고 꾸밈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을 얼른 닦아냈다. “응.”
지희가 깔깔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희야, 내가 호숫가에 운동하러 나왔는데 어떤 못생긴 남자애하고 뚱뚱한 여자애가 딱 붙어가지고 닭살 돋게 걸어가고 있는 거야. 그런 아이들은 말이야, 진짜로 사랑하는 거지?” 지희는 내 말에 정색을 하는 기척을 내더니 말했다. “여자들은 말이야. 너무 매사를 사랑에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어. 사랑에 집착하는 순간, 거기에 모든 걸 거는 순간, 남자는 떠나가는 거야. 남자의 본성은 사냥꾼이거든. 잡아놓은 짐승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도망다니는 언덕 위의 날랜 사슴을 쫓아가고 싶어하거든.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은 그들의 그런 본성을 인정하고 쿨해지는 거야. 그래야 남자들의 사냥 본능을 만족시킬 수 있거든….” 지희는 언제나처럼 남자의 본성과 여자의 본성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준고가 서 있던 자리에 엷은 겨울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앞으로 이 호숫가를 뛸 때 이 자리를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이 호숫가는 적어도 그가 없었던 공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추억이 없으니까. 여기에는 처음부터 나 혼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가 여기 들어섬으로써 나는 기억을 갖게 되어 버렸다. 그러자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7년 동안 나를 기다리게 해 놓고, 뭐 딱히 그가 나보고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 놓고 겨우 내가 한 바퀴를 도는 동안도 더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 버린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 이 갈대밭을, 이 서걱이는 바람 소리를 나는 어떻게 다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그가 서 있던 갈대밭 가의 나무다리 끝에 주저앉았다. 지희의 강의는 계속되었다. “난 우리 여자들이 사랑 때문에 울고 짜고 하는 거, 이제 그만해야 된다고 생각해…. 솔직히 민준이가 네 곁을 그렇게 맴도는 것도 결국은 네가 그 애에게 쿨하게 대했기 때문이야. 네가 민준 씨 나 사랑해, 하고 해롱해롱거리면 아마 그 애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벌써 끝나버렸을 거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어.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쿨하게 호숫가를 뛰는 너 같은 친구를 나는 맘속으로 존경하고 있어. 어때, 홍? 이제 맘이 좀 풀렸니?”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검은 코트를 입은 준고가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서 이리로 걸어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검은 파카를 입은 다른 남자가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입술을 물었다. “홍, 내가 말이야 아침에 좋은 구절을 읽었거든 그래서 네 생각이 나서 걸어본 건데, 너 들어볼래?” 나는 검은 파카의 남자를 외면하며 응, 하고 대답했다. “지금 울고 있느냐? 야, 이거 딱 지금의 네 상황이다. 너무 잘 맞는다. 아마 우리가 텔레파시가 통했나봐. 더 들어봐. 지금 울고 있느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고통과 불안이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아프리카로 떠나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널려 있다…. 홍 어때? 너무 멋있지 않니? 너희 출판사에서 이 글 쓴 사람 책을 내보면 어떨까?” 지희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응, 하고 대답하려다 말고 내가 대답했다. “지희야, 그 사람이 왔어. 사사에가 되어서 왔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나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자네가 홍이에 대한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마음이 상대에게 닿을 거야 쓰지 히토나리 추위를 견디지 못한 나는 일단 자동차로 돌아왔다. 운전기사가 나를 보자 얼른 나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눈이 만났냐고 묻는다. “아니오, 아직.” 얼어붙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차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도 갈대밭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운전기사가 캔커피를 사다 준다. 따뜻한 캔을 양 손으로 감싸고 곱은 손가락이 녹기를 기다린다. 무리하시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운전기사가 걱정한다. “일부러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더 버텨 보려구요. 조금 쉬었다 몸이 따뜻해지면, 다시 나가 보겠습니다. 더 기다려 주실 수 있는지요?” 내 말에 운전기사는 낮은 소리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안다. 그렇지만, 납득이 갈 때까지는 단념하고 싶지 않다. 캔커피를 마시고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빛나는 호수면을 향해 다시 비탈길을 내려간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나는 신간선을 타고 교토로 향했다. 하지만 내 곁에는 홍이가 없었다. 교토역에서 사가노 죽로암까지 택시로 달려갔다. 사에키 시즈코를 만나자 홍이와 함께했던 즐거운 추억에 가슴이 저며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홍이가 거기에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디를 찾아봐도 홍이는 없었다. 그녀의 지인들과 한국인 친구,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나는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가노를 찾아간 것이다. 사에키 시즈코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나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 주었다. ─ 자네들은 아직 젊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시간을 들이면 오해를 풀 수도 있어. 잘못한 것이 있어도 진심으로 사죄하면 전해지기 마련이야. 그렇지만 절대로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되지.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성의를 저버려서도 안 되고. 알겠어? 결국 사랑은 마음이야. 자네가 홍이에 대한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마음이 상대에게 닿을 거야. 다음날, 나는 혼자서 대나무숲길을 걸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주고받은 입맞춤을 떠올리자 가슴이 죄여 왔다. 그러나 나보다 더 깊은 상처를 안고 일본을 뒤로 했을 홍이를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팠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대나무숲 속에서 넋을 놓고 혼자서 울었다. 시즈코가 만들어준 저녁을 먹고 그녀와 술잔을 마주했다. 대나무로 둘러싸인 안뜰에 서 있는 등롱 속에서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불꽃에 안뜰 전체가 흔들리고 나도 따라 흔들렸다. ─ 홍이 아버지는 멋진 목소리를 가지셨어.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말았지. 하지만 그 분한테는 사모님과 가족이 계시니 내 마음을 고백한 적은 없지. 나는 잠자코 시즈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즈코는 잔을 쥐고 하염없이 등롱 빛을 바라보았다. ─ 나는 홍이 아버님 팬이었어. 그 분은 언제나 빛이 났지. 그 곁에서 살고 싶었어. 그렇지만 이루어질 수 있는 소망이 아니었기에 혼자서 이렇게 살아온 거야. 하지만 한시도 그 사람을 잊은 적이 없고, 지금도 그 사람을 존경하고 있어. 시즈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내 이야기 같았다. 놓인 입장과 시대, 만남과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데도, 네 사람의 영혼에는 같은 빛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 최한 씨의 아버지, 그러니까 홍이 할아버님은 유명한 한글학자셨어. 최한 씨가 출판사를 만들었을 때, 일본책을 출간하는 것을 아버님이 반대하셨지. 하지만, 최한 씨는 이웃나라를 제대로 아는 것이 진정한 우정을 만들어가는 길이라고 설득하시고는 일본문학 소개에 힘을 쓰셨어. 일본 고전문학이 한국에서 재평가되게 된 것도 최한 씨 덕분이지. 그 무렵, 난 신문협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최한 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 후로도 종종 함께 일을 하게 됐어. 그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 다정함에 마음이 정갈해지는 것 같았지.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난생 처음 남자의 훌륭함이란 것도 알게 되었지. 그러니까, 그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난 울어 버렸어. 단지 그 사람의 팬으로서 많이 울었지. 시즈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자네들한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과 방법이 있잖아,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 한국은 바로 옆, 바다만 건너면 되는 곳이야. 마음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갈 수 있는 곳이지. 문제는 자네와 홍이 마음이 솔직하게 만날 수 있는 순간을 찾는 것뿐이야. 젊은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 없어.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바로 용기야. 시즈코는 지나간 날들의 빛을 바라보듯, ─ 그게 내게는 부족했어. 내게 용기가 있었다면 내 마음을 최한 씨에게 털어 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덧붙였다. 그 날부터 오늘까지, 나는 몇 번이고 사가노를 찾았다. 그 때마다 사에키 시즈코는 왜 한국에 가질 않느냐고 나를 나무랐다. 홍이와 함께 걸었던 대나무숲길을 걸으며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란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 두 사람 이야기를 씀으로써 어쩌면 내 마음을 홍이에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남자는 떠나가는 거야. 남자의 본성은 사냥꾼이거든 공지영 한참을 그러고 있었던가, 어디선가 낯익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희미했다. 소리는 다시 분명히 들려왔다. 내 파카 호주머니에서 나는 소리였다. 휴대폰을 꺼내보니 지희라는 발신자명이 반짝이고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일어나며 전화를 받았다. 내가 여보세요, 하자 지희는 대뜸 홍이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하고 물었다. 그러고는 깔깔거리더니 말했다. “너 또 낭창낭창하고 조그만 여자애 봤구나, 이번에는 걔가 결혼한다고 하는구나. 그것도 너무 괜찮은 남자랑. 그지?” 지희의 목소리가 너무 밝고 꾸밈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을 얼른 닦아냈다. “응.”
지희가 깔깔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희야, 내가 호숫가에 운동하러 나왔는데 어떤 못생긴 남자애하고 뚱뚱한 여자애가 딱 붙어가지고 닭살 돋게 걸어가고 있는 거야. 그런 아이들은 말이야, 진짜로 사랑하는 거지?” 지희는 내 말에 정색을 하는 기척을 내더니 말했다. “여자들은 말이야. 너무 매사를 사랑에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어. 사랑에 집착하는 순간, 거기에 모든 걸 거는 순간, 남자는 떠나가는 거야. 남자의 본성은 사냥꾼이거든. 잡아놓은 짐승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도망다니는 언덕 위의 날랜 사슴을 쫓아가고 싶어하거든.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은 그들의 그런 본성을 인정하고 쿨해지는 거야. 그래야 남자들의 사냥 본능을 만족시킬 수 있거든….” 지희는 언제나처럼 남자의 본성과 여자의 본성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준고가 서 있던 자리에 엷은 겨울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앞으로 이 호숫가를 뛸 때 이 자리를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이 호숫가는 적어도 그가 없었던 공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추억이 없으니까. 여기에는 처음부터 나 혼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가 여기 들어섬으로써 나는 기억을 갖게 되어 버렸다. 그러자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7년 동안 나를 기다리게 해 놓고, 뭐 딱히 그가 나보고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 놓고 겨우 내가 한 바퀴를 도는 동안도 더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 버린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 이 갈대밭을, 이 서걱이는 바람 소리를 나는 어떻게 다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그가 서 있던 갈대밭 가의 나무다리 끝에 주저앉았다. 지희의 강의는 계속되었다. “난 우리 여자들이 사랑 때문에 울고 짜고 하는 거, 이제 그만해야 된다고 생각해…. 솔직히 민준이가 네 곁을 그렇게 맴도는 것도 결국은 네가 그 애에게 쿨하게 대했기 때문이야. 네가 민준 씨 나 사랑해, 하고 해롱해롱거리면 아마 그 애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벌써 끝나버렸을 거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어.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쿨하게 호숫가를 뛰는 너 같은 친구를 나는 맘속으로 존경하고 있어. 어때, 홍? 이제 맘이 좀 풀렸니?”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검은 코트를 입은 준고가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서 이리로 걸어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검은 파카를 입은 다른 남자가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입술을 물었다. “홍, 내가 말이야 아침에 좋은 구절을 읽었거든 그래서 네 생각이 나서 걸어본 건데, 너 들어볼래?” 나는 검은 파카의 남자를 외면하며 응, 하고 대답했다. “지금 울고 있느냐? 야, 이거 딱 지금의 네 상황이다. 너무 잘 맞는다. 아마 우리가 텔레파시가 통했나봐. 더 들어봐. 지금 울고 있느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고통과 불안이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아프리카로 떠나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널려 있다…. 홍 어때? 너무 멋있지 않니? 너희 출판사에서 이 글 쓴 사람 책을 내보면 어떨까?” 지희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응, 하고 대답하려다 말고 내가 대답했다. “지희야, 그 사람이 왔어. 사사에가 되어서 왔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나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자네가 홍이에 대한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마음이 상대에게 닿을 거야 쓰지 히토나리 추위를 견디지 못한 나는 일단 자동차로 돌아왔다. 운전기사가 나를 보자 얼른 나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눈이 만났냐고 묻는다. “아니오, 아직.” 얼어붙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차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도 갈대밭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운전기사가 캔커피를 사다 준다. 따뜻한 캔을 양 손으로 감싸고 곱은 손가락이 녹기를 기다린다. 무리하시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운전기사가 걱정한다. “일부러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더 버텨 보려구요. 조금 쉬었다 몸이 따뜻해지면, 다시 나가 보겠습니다. 더 기다려 주실 수 있는지요?” 내 말에 운전기사는 낮은 소리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안다. 그렇지만, 납득이 갈 때까지는 단념하고 싶지 않다. 캔커피를 마시고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빛나는 호수면을 향해 다시 비탈길을 내려간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나는 신간선을 타고 교토로 향했다. 하지만 내 곁에는 홍이가 없었다. 교토역에서 사가노 죽로암까지 택시로 달려갔다. 사에키 시즈코를 만나자 홍이와 함께했던 즐거운 추억에 가슴이 저며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홍이가 거기에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디를 찾아봐도 홍이는 없었다. 그녀의 지인들과 한국인 친구,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나는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가노를 찾아간 것이다. 사에키 시즈코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나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 주었다. ─ 자네들은 아직 젊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시간을 들이면 오해를 풀 수도 있어. 잘못한 것이 있어도 진심으로 사죄하면 전해지기 마련이야. 그렇지만 절대로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되지.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성의를 저버려서도 안 되고. 알겠어? 결국 사랑은 마음이야. 자네가 홍이에 대한 마음을 소중히 간직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마음이 상대에게 닿을 거야. 다음날, 나는 혼자서 대나무숲길을 걸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주고받은 입맞춤을 떠올리자 가슴이 죄여 왔다. 그러나 나보다 더 깊은 상처를 안고 일본을 뒤로 했을 홍이를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팠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대나무숲 속에서 넋을 놓고 혼자서 울었다. 시즈코가 만들어준 저녁을 먹고 그녀와 술잔을 마주했다. 대나무로 둘러싸인 안뜰에 서 있는 등롱 속에서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불꽃에 안뜰 전체가 흔들리고 나도 따라 흔들렸다. ─ 홍이 아버지는 멋진 목소리를 가지셨어.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말았지. 하지만 그 분한테는 사모님과 가족이 계시니 내 마음을 고백한 적은 없지. 나는 잠자코 시즈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즈코는 잔을 쥐고 하염없이 등롱 빛을 바라보았다. ─ 나는 홍이 아버님 팬이었어. 그 분은 언제나 빛이 났지. 그 곁에서 살고 싶었어. 그렇지만 이루어질 수 있는 소망이 아니었기에 혼자서 이렇게 살아온 거야. 하지만 한시도 그 사람을 잊은 적이 없고, 지금도 그 사람을 존경하고 있어. 시즈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내 이야기 같았다. 놓인 입장과 시대, 만남과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데도, 네 사람의 영혼에는 같은 빛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 최한 씨의 아버지, 그러니까 홍이 할아버님은 유명한 한글학자셨어. 최한 씨가 출판사를 만들었을 때, 일본책을 출간하는 것을 아버님이 반대하셨지. 하지만, 최한 씨는 이웃나라를 제대로 아는 것이 진정한 우정을 만들어가는 길이라고 설득하시고는 일본문학 소개에 힘을 쓰셨어. 일본 고전문학이 한국에서 재평가되게 된 것도 최한 씨 덕분이지. 그 무렵, 난 신문협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최한 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 후로도 종종 함께 일을 하게 됐어. 그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 다정함에 마음이 정갈해지는 것 같았지.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난생 처음 남자의 훌륭함이란 것도 알게 되었지. 그러니까, 그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난 울어 버렸어. 단지 그 사람의 팬으로서 많이 울었지. 시즈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자네들한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과 방법이 있잖아,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 한국은 바로 옆, 바다만 건너면 되는 곳이야. 마음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갈 수 있는 곳이지. 문제는 자네와 홍이 마음이 솔직하게 만날 수 있는 순간을 찾는 것뿐이야. 젊은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 없어.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바로 용기야. 시즈코는 지나간 날들의 빛을 바라보듯, ─ 그게 내게는 부족했어. 내게 용기가 있었다면 내 마음을 최한 씨에게 털어 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덧붙였다. 그 날부터 오늘까지, 나는 몇 번이고 사가노를 찾았다. 그 때마다 사에키 시즈코는 왜 한국에 가질 않느냐고 나를 나무랐다. 홍이와 함께 걸었던 대나무숲길을 걸으며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란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 두 사람 이야기를 씀으로써 어쩌면 내 마음을 홍이에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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