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26>
반사적으로 얼른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문득 호수 전체가 텅 빈 고요의 덩어리로 느껴졌다 공지영 자꾸 무릎이 꺾였다. 팔이 허공을 불규칙하게 휘저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는 힘껏 팔을 내저으면서 눈을 들어 똑바로 앞을 응시하고 발의 보폭을 넓히려고 했다. 갑자기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무릎과 발과, 내 어깨에서 뻗어나간 팔이 나를 배반하려 하고 있었다. 뒤돌아가고 싶다며 호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추운 데 서 있었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니, 하는 것은 범생이가 되고 싶어하는 홍이의 말이었고, 그냥 우연일 뿐이야… 그는 이제 맘만 먹으면 네 전화번호도 알아낼 수 있어. 그런데 왜 찾아와서 저렇게 서 있는 거야, 칠 년 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다가, 이제사 보니까 맘이 달라진 거야? 하는 건 똑똑한 홍이의 말이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린 것이다. 나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그때 이 호수가 둥글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둥그니까 이렇게 앞으로 뛰어가면 다시 그가 서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게 결국 그에게서 멀어지면서 다시 그에게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원의 신비였다. 그러니 이 원에 들어서버린 나는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어찌됐든 모두가 그에게로 가는 길이다. ─ 나한테 결혼하자고 하지 말아요, 난 외국 사람하고 결혼 안 해요. 처음 그를 만나 이야기하던 날, 내가 말했었다. 그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방에서 처음 잠들던 날 그는 쪽지를 하나 써놓고 나갔었다. ─ 걱정하지 말아요, 결혼하자고 하지 않을 테니. 부드러운 봄날이 여름으로 달려가듯이 우리들의 사랑도 그렇게 진초록빛 여름으로 가고 있던 날들이었다. 봄날에 피어난 나무가 혹시 계절이 다시 돌아 겨울로 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듯이 나는 그를 믿었다. 영원히 함께 깨어나는 아침을 맞자는 말을 그가 꺼내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가 그러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굳게 믿었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간다는 것을 믿는 것보다 더 준고의 사랑을 믿었었다.
─ 미안하다고 하면 되잖아…. 마지막 날 밤 그에게 소리치던 나는 이미 그 모든 믿음을 상실한 상태였다. 아니 믿음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믿음을 다시 되돌려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날 붙들어줘, 라는 호소였을까. 그래 그랬을 것이다. 널 선택하기 위해서 엄마도 아빠도 할아버지도 배반했어, 라는 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호숫가를 한 바퀴 돌아 호반의 집 앞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 햇살은 노랗게 퍼지고 있었다. 대기는 한층 따뜻했다. 호반의 집 앞에서 비탈길을 뛰어내려가 작게 모퉁이를 돌면 다시 갈대밭이다. 그가 아직도 서 있으면 이제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과 그가 가버렸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모퉁이를 돌았다. 눈을 감고 있다가 뜨니까 갈대밭 가의 길은 텅 비어 있었다. 무릎이 다시 푹하고 꺾이면서 나는 넘어졌다. 달려가던 속도만큼 앞으로 슬라이딩하듯이 엎어져 버린 것이다. 반사적으로 얼른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문득 호수 전체가 텅 빈 고요의 덩어리로 느껴졌다. 젖빛 갈대가 바람에 사각이는 소리가 멀리서 웅웅거렸다. 나는 아픈 무릎과 손바닥을 견디며 다시 뛰어 보려고 했다. 다시 무릎이 꺾여 왔다. 아팠다. ─ 업어줄까? 그가 물었을 때, 좋지 하면서 그의 등에 홀짝 올라탔던 여자를 호수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쓰쿠네 사줄까? 그거 네가 제일 잘 먹는 거잖아. 묻던 그 남자를 호수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겨울은 이제 무채색의 산으로부터 불어온 싸늘한 겨울바람에 말라버린 갈대들만 서걱거린다. 나는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에 길게 생채기가 나 있었고 엷게 피가 비쳤다. 나는 입술로 그 상처를 핥았다. 쓰라림이 손바닥을 거쳐서 내 심장으로 곧바로 전해져 왔다. 무릎 쪽에서 상처가 났는지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 바보같이, 넘어지기나 하고.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자 눈가에서 미지근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얼른 훔쳐냈는데 또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그러모은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씨 좋은 산책객이 내가 넘어지는 꼴을 보았는지 내게 다가와 괜찮으냐고 물었다. 다이조브? 묻던 그의 일본어가 그리로 겹쳐졌다. 넘쳐흐르는 눈물이 내 팔뚝을 금방 적시는 것을 느끼며 내가 대답했다. “괜찮지 않아. 아파요… 많이 아파요.”
나도 홍이도 자신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쓰지 히토나리 눈앞에 펼쳐진 얼어붙은 호수와 갈대밭이 홍이와 함께 떠났던 교토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97년 10월, 최홍이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끌고 내 아파트로 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물으니 엄마가 결혼을 반대해서,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홍이가 신세를 지고 있던 학교선배가 출산을 위해 잠시 서울에 가 있었기 때문에 아파트는 홍이가 혼자서 생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교제를 시작한 직후부터 우리는 자주 서로의 집을 드나들었다. 어떤 때는 매일 홍이가 내 아파트에 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기 때문에 동거라고는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녀가 트렁크를 들고 나타났을 때 나는 다소나마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글쎄, 엄마가 일본사람하고는 결혼 못한다잖아. 그래도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들과 그로 인한 불안도 있었지만, 젊음이 있었기에 무엇을 하든 무엇을 보든 무슨 생각을 하든 그저 즐겁기만 했다. 그 기세로 우리는 손을 잡고 교토로 여행을 떠났다. 동거의 다음은 도피행이란 듯이 순진하고도 뻔뻔스럽게. 수학여행 때 교토 사가노에 간 적이 있는 나는 가이드북을 사들고 홍이에게 교토의 아름다움을 안내했다. 아라시야마역에서 도로코열차(주-궤도열차)를 타고 호즈강 상류로 올라가, 가메오카역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호즈강의 명물인 강놀이(주-급류타기)를 즐겼다. 사냥모자바위와 거울바위, 개구리바위 등 우스꽝스럽고 어딘가 기묘한 커다란 바위들이 강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곱게 물든 단풍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홍이는 병풍처럼 드리운 경치를 가리키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나했다. 사가노의 대나무숲길에서 우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달콤한 입맞춤을 했다. 마치 바닷속에서 하는 키스처럼, 물결처럼 출렁이는 햇빛은 우리를 취하게 했다. 나도 홍이도 자신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기쁨의 절정이라는 말이 그 때의 우리에게는 딱 맞았다. 해가 질 때까지, 사가노의 대나무 숲길을 거닐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에야 겨우 우리는 숙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홍이가 주머니에서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꺼내 보이며 걱정하지 마, 근처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하고 말했다. 사가노 죽로암이란 전통찻집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저물어 곧 찻집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주인인 사에키 시즈코는 홍이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하라고 아버지가 주소를 건네주셨다고 했다. 교토로 가자고 한 건 홍이었다. 처음부터 시즈코를 만날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홍이는 딸의 직감으로, 사에키 시즈코와 아버지 사이에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옛날 애인이 아니냐고 엄마가 없을 때 물어본 적이 있었어. 근데 자백을 하지 않더라고. 많은 팬 중의 한 명이라고 얼버무리지 뭐야. 사에키 시즈코는 초로이긴 하나 기품 있는 미인으로 에도시대 판화에 나올 듯한 희고 고풍스러운 용모였다. 홍이를 보자 눈물을 글썽이며, 어서 오라고 반겼다. 시즈코는 홍이를 보며 홍이 아버지인 최한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이 근처에 아시는 여관이 있으세요?” 홍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서 묵고 가요. 아무것도 없지만, 편히 있다 가요” 하고 말했다. 우리가 묵고 가기로 하자, 시즈코는 바로 가게 문을 닫고 서둘러 저녁 준비를 했다. 저녁을 먹은 후, 차가운 흰포도주를 마시며, 시즈코가 말하는 홍이 아버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즈코는 즐거운 듯 최한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애인이셨나요, 하고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 보았지만, 아니오. 난 그 분 팬이었어요, 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존재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플라토닉 같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마치 서로의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일본식 안뜰을 마주하고 있는 손님방에는 낮은 병풍형 칸막이가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 양쪽에 이불이 한 채씩 깔려 있었다. 칸막이는 시즈코 나름의 배려였다. 우리는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마치 수학여행 온 학생들처럼 낄낄거렸다. 바로 옆방에 사에키 시즈코가 자고 있어 홍이와 함께 자기가 꺼려졌다. 간단히 치울 수 있는 작은 칸막이였지만, 둘 사이에 턱 놓여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왠지 도덕적인 감시를 받는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를 죽여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 갑자기 우스운 생각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옆방에서 자는 시즈코에게 들리지 않도록 참으면 참을수록 웃음은 새어나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행동이 조심스러워, 나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했다. 한밤중, 내 이불 속으로 침입자가 들어왔다. 막 잠이 들려던 참이어서 하마터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침입자는 내 입을 막았고, 나는 또다시 웃음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가노의 어둠 속에서 나와 홍이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 팔 안에 홍이가 있었다. 그 때, 우리는 소리 없이 다가오는 불안한 그림자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평온한 얼굴로 자는 홍이를 조용히 끌어안고 행복에 겨워, 나는 금방이라도 깰 것 같은 얕은 잠 속으로 빠져 갔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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