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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23>

등록 2005-10-13 16:35수정 2005-10-13 16:35

공지영

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집으로 무작정 짐을 싸가지고 들어오면서 돈 생각 같은 건 해보지 않았었다. 엄마는 정말로 송금을 끊어버렸고 어느덧 나는 그의 짐이 되고 있는 셈이었다. 준고는 나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더 늘린 눈치였다. 그와 함께 있고 싶어서 들어간 집이었는데 나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버린 것이었다. 사고 싶은 것을 다 사던 내 버릇을 고치기도 힘들었다. 돈이 없다고 생각하자 먹고 싶은 음식은 더 많아졌고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물건들이 너무나 가지고 싶었다. 날마다 지나치던 기치조지 역 앞 아케이드의 딸기가 얹힌 생크림 케이크는 얼마나 멀고 화사해 보였던지….

나는 드디어 프로방스 빵집에 취직을 하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들어간 곳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한국 같으면 그냥 들어가 저 여기서 일하고 싶은데요, 하면 그만이었지만 그 작은 일 하나에도 이력서를 쓰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이 일본일지도 모른다. 일은 힘들지 않았다. 다만 정말 힘들었던 것은 어서 오세요, 하는 뜻의 이랏샤이마세, 라는 인사말을 하는 것이었다. 주인 부부는 내게 그것을 연습시켰다. 두 손을 마주잡고 얼굴에 일본 인형 같은 웃음을 머금은 다음, 이랏샤이마세에에에, 하고 말꼬리를 한껏 올림과 동시에 공손히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것이다. 한국말에서는 전혀 쓰지 않는 높은 톤의 목소리를 길게 빼려고 하니까 가부키 배우라도 된 것 같았다. 만일 동생 록이나 친구 지희가 하얀 프릴이 달린 에이프런을 두르고 이렇게 절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면, 하는 생각을 하자 그만둘까 하는 마음도 일었지만 다행히도 프로방스 빵집은 한국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목에 있었다.

드디어 첫 월급을 타던 날, 나는 준고에게 크게 한턱을 쓰겠다고 말했다. 너무나 먹고 싶었던 한국 식당의 불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말했던 것이다. 전철을 타고 가자던 준고에게 나는 알뜰한 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자전거로 가자고 엄숙히 말했다. 한푼이라도 아껴야지, 하고 말했을 것이다. 가까운 곳이라고 느껴졌던 한국 식당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서 준고, 힘내, 조금만 더 가면 돼, 라고 큰소리쳤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나중에는 그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이사 갔나, 라고 조그맣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집을 출발한 지 40분이 지나 있었고 자전거 뒷자리에서 내가 얼굴을 기댄 준고의 등은 땀으로 후줄근했다.

한국 식당으로 들어간 우리는 불고기와 김치를 실컷 먹었다. 하지만 다시 40분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준고는 다시 배가 고파진 눈치였다.

─ 그래도 실컷 먹었잖아. 내가 일해서 사준 건데, 고맙다고 해야지.

나는 미안해서 짐짓 화를 내었다.


─ 고마워 베니, 맛있었어. 배도 부르고….

내가 기대고 있던 그의 등에서 축축하게 배어오던 땀 냄새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 베니, 하고 웃던 그의 장난꾸러기 같은 갈색 눈동자, 작은 입술, 부드러운 고수머리…. 눈에 잡힐 듯이, 그러나 텅 빈 겨울 정원의 창백한 갈색 공간으로 그의 모습이 지나간다. 하지만 헤어짐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 엄마 탓도 아빠 탓도 아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탓도 아니었을 것이다. 원망할 사람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안해서 자주 퉁명스러워지던 나를 준고는 이해해 주었다. 그는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일본인이라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그것이 치명적인 이유였을까. 나는 그를 일본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변명해도 될까.

나는 정원 의자에 앉았다. 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그만, 하고 내 자신을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어딘가 저 멀리서 사슴 떼가 달려가는 듯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아주 희미했지만 점점 더 가까이 온다. 익숙한 피아노 선율… 비창 소나타를 판매 금지 시키는 독재자라도 등장했으면 좋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칸나가 등 뒤에서 나를 안은 순간…
술에 취해 내 방에 묵었던 날의 홍이가 떠올랐다

쓰지 히토나리

고바야시 칸나와 최홍이 만난 건 단 한 번으로 기억한다. 관계를 되돌리고 싶다고 날 찾아온 칸나와 홍이가 아파트 현관 앞에서 부딪친 것이다. 놀란 홍이는 시종 고개를 숙였고, 칸나는 홍이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내가 홍이를 애인이라 선언하자 칸나는 홍이를 무섭도록 노려보았다. 그때 그 순간, 홍이는 칸나 얼굴을 보았을까. 어쨌든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다. 행여 수십 초간 시선이 부딪쳤다 하더라도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 서로를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된다.

다만 나는 몇 번인가 홍이에게 칸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고, 홍이도 가끔 칸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칸나도 내 담당편집자가 된 후, 몇 차례인가 홍이 이름을 거론한 적이 있다. 칸나에게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너와 교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때, 홍이 이름을 이야기했을까….

“그 사람은 지금 뭐 해?”

레스토랑을 나와 잡아 탄 택시에서 고바야시 칸나가 말했다. 그 사람, 누구? 하고 딴청을 부리자,

“당신이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나와 헤어진 다음에 사귄 한국 여자?”

하고 돌려 말한다.

글쎄, 하고 나는 도망친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준고한테는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정리될 때까지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그랬었나, 하고 다시 한번 얼버무린다. 그래, 하고 칸나가 짜증스럽게 대답한다.

“정말 그 사람하고는 아직 안 만난 거야?”

고바야시 칸나가 최홍이란 이름을 부른 적은 없었다. 잊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부러 내 쪽에서 떠올리게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용한 밤이다. 인기척도 없다. 커다란 사진의 휴대전화 광고가 도로 반대편에서 빛나고 있다. 간판에는 디자인된 한글이 춤을 춘다. 젊은 여자가 최신형 휴대전화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진이다. 일본 탤런트 누구랑 비슷한데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나는 외관으로 분별할 수가 없다. 한글은 유일하게 그들이 한국인이란 걸 식별하게 하는 기호였다. 거꾸로 한국 사람들은 일본 젊은이와 자신을 어떻게 식별할까. 그들 눈에는 일본 탤런트나 배우가 어떻게 비칠까. 어쩌면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 이미지는 한자나 히라가나가 아닌 가타카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멋진 한글 디자인을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가타카나 일본인이 그들 눈에는 어떻게 비치는지.

자기 전에 한잔만 더 하자는 칸나의 고집에 할 수 없이 호텔 바로 발을 옮긴다. 외국인 연주가들이 애니멀스의 곡을 시작으로 아메리칸 올드팝을 연주하고 있다. 저녁에 사운드 체크를 하던 사람들이다. 여성 보컬이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칸나도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조금은 시끄럽고 빠른 템포의 음악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두 사람을 안심시킨다. 벽 쪽으로 자리를 잡고 그들의 노래와 연주를 들으며 조용히 술을 마신다. 연주 도중 갑자기 칸나가 준고는 뻔뻔해졌어, 하고 큰 소리로 몰아세웠다. 나는 곡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 어른이 된 것뿐이야, 하고 나로서는 드물게 큰 소리로 반박했다. 칸나가 웃으며 어깨를 들썩여 보이더니 앞에 놓인 잔을 비운다.

그날, N상 수상식 3차 뒤풀이가 끝나고 칸나는 모셔다 드릴게요, 하더니 내가 탄 차에 올라탔다. 홍이와 동거하던 아파트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있는 호수 반대편 주택가에 있는 낡은 아파트로 이사를 한 다음이었다.

─ 목이 말라.

하며 칸나가 함께 차에서 내렸다.

─ 그럼 역 앞 카페라도 가자. 집엔 아무것도 없어.

─ 집에 누구 있어?

머리를 가로 젓자, 그럼 물 한잔만 줘, 하고 말했다. 할 수 없이 함께 집으로 들어왔는데, 칸나는 따라 준 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대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분명 그럴 생각이었을 것이다. 알몸이 된 칸나가 안아 줘, 하고 말했다.

창으로 비쳐 든 희미한 달빛이 칸나의 작은 나체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칸나의 몸은 학생시절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결심한 여자의 눈빛. 미안하지만 안을 수가 없어, 내 말에 칸나는 멈춰 서서 긴장했다.

─ 내가 매력이 없는 거야?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 아니, 학생시절보다 훨씬 아름다워. 그렇지만 할 수가 없다.

칸나가 입술을 깨물며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날 부끄럽게 만들 거야?

칸나는 작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고개를 젓고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칸나가 등 뒤에서 나를 안은 순간… 술에 취해 내 방에 묵었던 날의 홍이가 떠올랐다.

이윽고 등은 칸나의 눈물로 젖기 시작했다. 나는 칸나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불 위에 누워 함께 아침을 기다리기로 했다.

홍이와 함께 누었던 침대였다. 그리고 칸나와 교제하기 시작하면서 구입한 침대이기도 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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