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21>
만일 당신이 꿈속에서 누군가와 만났다면 그건 그 사람의 영혼도 밤새 당신을 만난 거라고 말이다 공지영 내가 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자 마당에 있던 번개가 일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그냥 들어가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는데 번개가 두 발을 앞으로 그러모으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현관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번개에게 다가갔다. 번개는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그야말로 번개처럼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번개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소주 때문에 얼얼해진 뺨으로 찬 바람이 부딪혀 오는 게 싫지 않았다. 번개는 내가 쪼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자 내 곁을 조금 서성이더니 제 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동생 록이는 내가 번개에게 너무한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산책을 데리고 나가는 일도 없었고 가끔씩 목욕을 시켜 주는 일도 없었다.
“야, 번개… 미안하다, 임마.” 번개는 앞발을 모으고 귀를 쫑긋했다. “내가 일본에서 돌아오니까, 난데없이 미루가 죽었다잖아…. 너 미루 모르지? 너 전에 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진돗갠데, 내가 키웠거든…. 아주 어릴 때 우리 집으로 와서, 차마 마당에 내놓을 수 없게 작은 강아지였어서, 내 방에서 내가 우유 주고 내가 목욕시켜 주고 내가 키웠거든…. 엄마가 그러는데 나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하나밖에 모른대…. 그러니 날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 번개는 내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노란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가 어두운 정원의 외등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있잖아, 쏘아버린 화살하구 불러버린 노래하구…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린 내 마음은 내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짜샤….” 나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왔다. 입을 막고 딸꾹질을 그쳐보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눈가로 눈물이 핑 돌더니,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느 주말 밤에 쭈그리고 앉아 딸꾹질을 하다 말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개와 이야기하고 있는 스물아홉을 맞을 줄을, 어렸을 때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일어섰다. 돌연하게 눈물을 흘려버린 건 미루 생각 때문이었을까. 우윳빛 털이 예뻤던 미루, 내가 엄마인 줄 알던 미루…. 나는 방으로 돌아와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또 눈을 감으면 꿈속에서 이노가시라 공원으로 내 영혼이 달려갈 것 같아 나는 두려웠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에 그런 말이 나왔었다. 꿈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마음껏 이 세상을 떠돈다고. 만일 당신이 꿈속에서 누군가와 만났다면 그건 그 사람의 영혼도 밤새 당신을 만난 거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제 준고의 영혼도 나와 함께 이노가시라 공원 근처에 있었던 것일까. 세상에서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흘러간 강물과 지나간 시간과 떠나간 마음이라는데, 내 영혼만 밤마다 그리로 가서 호숫가를 서성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라렸다. 혼자서 그의 집을 나오던 그날 밤, 공원길을 걸어 기치조지 역을 향해 가면서 나는 중얼거렸었다. ― 대체 왜 그러느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진한 눈으로 그렇게 묻지는 마…. 내가 너보다 많이 슬펐고, 내가 너보다 많이 기다렸고, 내가 너보다 많은 걸 걸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나를 잊어. 칸나를 잊듯이, 벚꽃이 일제히 지듯이 그렇게…. 더 많이 사랑했던 사람하고, 더 아팠던 사람하고, 정말 처음이었던 사람하고, 이런 사람들이 이미 불행하기로 되어 있었던 걸 너는 모르겠지, 영영 그렇게 모르겠지…. 그러니 잊어, 하나도 남김없이 잊어. 그러면서 나는 아마도 뒤돌아보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실은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인 줄도 모르고 뒷덜미를 잔뜩 곧추 세우고 그렇게 그곳을 떠나왔던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창으로 맹렬하게 몰아쳐 들어왔다. 오랫동안 내 창밖에 머무르다가 이제야 몰아쳐 오는 기억처럼 몰려왔다. 그곳을 떠나던 그날 밤처럼 나는 그 차가운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중얼거렸다. ― 잊지 못할 줄 몰랐어. 실은 잊지 못할 줄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잊지 못하고 있는 줄은 몰랐던 거야. 결국 넌 영원히 나와 함께 깨어나게 된 거야…. 어쩌자고 돌아왔니, 이 나쁜 짜샤, 이 나쁜 짜샤….
염문이 끊이질 않는 그녀이긴 하나, 일 때문에 영혼을 팔 사람은 아니었다 쓰지 히토나리 사랑의 줄다리기도 공복을 이기지는 못해 칸나와 나는 레스토랑을 찾기 위해 다시 인사동거리로 나왔다. 한글 간판이 거리 양쪽에 줄지어 있다. 그 기하학적인 디자인은 여기가 일본이 아닌 한국임을 알려 준다. 울퉁불퉁한 포석이 발바닥을 기분 좋게 지압해 주고, 여기저기서 손님을 끄는 상인들 소리가 들린다. 영하의 날씨에도 그들 소리는 한없이 기운차고, 때로는 커다란 웃음소리도 섞여 들려온다. 좁은 골목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도 음식점이 몇 곳이나 들어 차, 모락모락 하얀 김을 뿜어내고 있다. 가게 앞에 커다란 냄비가 걸려 있지만, 그걸로 무슨 음식을 만드는지 우리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결국은 인사동을 빠져나와 십여 분 걷다 다다른 또 다른 번화가에 위치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세련된 외장이 고급스러움을 자아낸다. 가게 앞에는 고급승용차가 몇 대나 대기하고 있다. 관료들이 이용하는 일본의 요정과 같은 곳일까. “비싸 보이지만, 여기로 해.” 칸나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걱정하지 마. 여기는 경비로 어떻게든 해 볼게.” 나는 그만 웃고 만다. “경비라니, 무슨? 회사 사람들이 네가 서울에 온 걸 안단 말이야?” 고바야시 칸나는 혀를 내밀면서, 뭐, 어떻게든 할게, 하고는 얼버무린다. 문을 열고 들어 선 칸나는 점원에게 유창한 영어로 예약을 하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알아서 척척 움직이는 칸나의 모습을 나는 멀리서 바라본다. 어느 날, 나는 칸나에게 온 연락을 받고 그녀가 근무하는 T사로 가, 그녀의 직속상사인 문예서적부 편집장 안도 히로시를 만났다. 그 분야에서는 특출한 인물로, 그곳 사정에 어두운 나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키가 크고 목이 길었으며 약간 새우등인데 항상 줄무늬셔츠를 입고 나타나, 나는 그를 기린이라 불렀다. 기린은 어디라고는 할 수 없는 곳을 응시하고는, 자넨 말이지, 쓸 수 있는 사람이야, 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나보다도 옆에 앉아 있던 칸나가 등을 곧추세웠다. 칸나가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많이 쓰게. 쓰면 쓸수록 반드시 뭔가를 찾아 낼 테니.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기린은 날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 미소는 내게 던진 것이었다. ─ 제가 찾아냈어요. 고바야시 칸나가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었다. ─ 제가 담당하게 해 주세요. 칸나는 테이블에 몸을 내밀고 안도에게 호소를 했다. 안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네들 대학시절 동창이라고, 하고 말했다. 나는 예, 하고 대답했다. ─ 소설의 세계는 점점 변해가고 있네. 그렇다고 좋은 작가가 늘어난 건 아니야. 쓸 수 있는 사람을 발굴해 내고, 그 사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리고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편집자의 역할이지. 아오키 군이, 아니 사사에 히카루라는 작가로서 이의가 없다면 담당은 고바야시가 좋다고 생각하네. 젊은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일본문학의 지평을 열어 주길 바라네. 고바야시 칸나와 염문이 돈 사람 중에는 안도 히로시란 이름도 있었다. 등단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파티석상에서 선배작가들이 그 일을 화제로 삼고 있었다. ─ 안도 씨도 별수 없는 남자로군요. 그런 젊은 여자애한테 쏟아 붓다니 말이에요. 내 담당편집자로 하려고 한다는 말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어요. 어째서 그런 젊은 여자아이가 내 담당이냐구요. 그 애는 아무하고나 잔다는 소문이 있어요. 분명 저 안도 씨하고도…. 그건 분명 날 빗대어 하는 말로, 문단에 들어오기 위한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술안주가 되는 것이 싫어 나는 도중에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 후, 문단과의 관계도 끊었다. ─ 내가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갑자기 꺼낸 칸나의 말에 무슨 말이야, 하고 나는 딴청을 피웠다. ─ 나한테도 그런 소문이 들리고 가끔은 회사에까지 이상한 팩스가 날아와. 너무 심한 말들이 적혀 있어서 처음엔 약간 기가 죽기도 했지. 일본인의 이 이지메 기질은 어떻게 안 되는 걸까? 신경 쓰지 마, 하고 나는 칸나를 위로했다. 염문이 끊이질 않는 그녀이긴 하나, 일 때문에 영혼을 팔 사람은 아니었다. ─ 하지만 서글퍼질 때도 있어. 어딜 가나 서로 발목을 끌어당기는 세상이니. 게다가 내가 애를 쓰면 쓸수록 안도 씨 얼굴에까지 먹칠을 하는 게 돼. 고바야시 칸나는 정말로 분한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칸나는 질투와 시기를 모두 뒤로하고 T사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했다. 그 노력은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출판이라는 낡은 체제 속에서 자신을 굽히지 않고 싸워 온 그녀의 기력과 야심에는 경의를 표하고도 남음이 있다. 때문에 가끔은 그 눈부신 모습에 감동하기도 한다. 솔직히 가끔은 여동생을 지켜보는 오빠 같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조용한 방으로 안내를 받고 나를 상석에 앉히더니 칸나가 웃으며 말했다. “사사에 선생님, 어떠세요? 여기가 마음에 드시는지?” 대작가를 접대하는 듯한 어조로 나를 놀린다. 나도 대작가인 양, 아, 마음에 듭니다, 하고 온화하게 대답한다. “선생님, 그럼 드시지요. 많이 드시고 힘내셔야죠.” 칸나의 행복해하는 미소에 마음이 아려온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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