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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17>

등록 2005-10-13 16:23수정 2005-10-13 16:29

먼하늘가까운바다 <17>
먼하늘가까운바다 <17>

그의 가족은 개의치 않아도 나의 가족은
개의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도 내색할 수가 없었다

공지영

두꺼운 검정 트레이닝복 바지 위에 보라색 털 잠바를 입고 무릎덮개까지 덮은 채 정원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정원용 가스 스토브가 내 등을 따뜻하게 하고 햇볕은 내 콧등이 차가워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엠피스리 플레이어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엄마가 만들어준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신다. 거품이 많은 카푸치노는 달콤하고 귓가에 울리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는 계피처럼 쌉쌀했다. 달콤하고 쌉쌀하고 이 정도면 괜찮은 오후였다.

리스본, 어두컴컴했던 그 카페. 아마 벽이 희끗희끗한 벽돌로 쌓여져 있었던가. 흰 테이블보와, 붉은 포도주. 작고 수수한 흰 접시에 담겨진 그린 올리브…. 같이 테이블에 동석한 일본인 청년은 연신 작은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흑단 같이 검은 양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네 명의 악사들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던 젊은 여인은 자신의 머리타래처럼 풍성한 고음을 가지고 있었다. 록이는 포도주 한 잔에 졸기 시작하는데 나는 그 여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가사 내용은 모르지만 전해져 오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노래라고 내게는 생각되어졌다. 언어가 다르다고 해도 인간이 서로의 마음을 전달할 것은 많았다. 그 여가수의 눈빛, 깊은 바다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살짝 비틀리는 몸짓, 가슴에 얹히는 손가락들의 각도, 옆 테이블에 앉았던 일본인 젊은이가 포도주 한잔 더 할래요? 하고 물었었다. 우리가 일본 사람인 줄 알았나 보았다. 우리 일본 사람 아닌데요, 하는 말을 하기도 전에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일본 청년은, 미안해요, 꼭 일본인인 거 같아서, 하고 말했다. 포르투갈을 떠날 때 음반을 사고서야 ‘파두(Fado)’라는 단어가 ‘운명’이라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갈망….

우리는 다음날 로카 곶(Cabo da Roca)으로 떠났다. 시베리아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이라면 거기는 서쪽 끝, 스페인 쪽으로 가자는 록이에게 나는 두 살이나 많은 언니로서 큰소리를 쳤던 것이다. 이 언니 성질 알지? 원래 나는 끝까지 간다는 거…. 그 절벽 한 귀퉁이에 서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카몽이스라는 시인이 쓴 시의 한 구절이라고 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우리 자매는 우리 몸집의 거의 두 배는 되는 배낭을 짊어진 채로 김치, 하며 사진을 찍었다. 이어폰을 통해서 내 귓가로 울리는 파두는 그 절벽 아래 펼쳐졌던 파란 바다처럼 내 귀에서 철썩거린다.

― 언니, 이렇게 당연한 말도 유명한 시인이 하면 비석까지 세워주고 그러는 거야?

록이가 투덜거리는 말이 파도 소리에 지워지는 그 절벽에 나는 서 있었다. 그 유라시아 대륙 동쪽에서 그 서쪽 끝까지 얼마나 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는지 나는 다 헤아릴 수 없었다.


― 우리는 얼굴빛도 눈빛도 머리카락빛도 같아. 그리고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푸른 별에 살고 있잖아.

그 말을 한 것은 나였던가? 왜 그걸 강조해야 했을까? 만일 민준에게였다면 그 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준고 역시 칸나 같은 일본 여자에게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서웠다. 그는 모르고 나는 아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가족은 개의치 않아도 나의 가족은 개의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도 내색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노가시라 공원의 녹음 속을 뛰어가며 준고에게 외쳤다.

―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잖아! 그치?

“언니,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

록이가 새로 만든 카푸치노가 담긴 잔을 정원 탁자에 놓으며 물었다. 뭐라구? 하면서 이어폰을 귀에서 떼어낸 후 시간을 보니 약속시간에서 십오 분이 넘어 있었다. 벌떡 일어나 이층 내 방으로 달려갔다. 대충 립글로스만 바르고 거울을 보니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검은 니트 목도리만 두르고 가방을 들었다. 번개와 놀고 있던 록이가 뛰어나가는 나를 보더니, 내 부츠는 벗어놓고 가!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는 록이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그냥 뛰었다. 뛰는 건 자신 있으니까 십 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때가 아니면 그 아이가 빌려주지 않던 연한 베이지색 웨스턴 부츠를 언제 또 뺏어 신어 본단 말인가. 번개가 컹컹 짖었다.


홍이가 매일 어떤 마음으로 나를 기다렸을지, 나는 좀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쓰지 히토나리

그때 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아침에 홍이와 함께 집을 나와 먼저 학교로 가서 오전 중으로 몰아놓은 수업을 듣고는 점심도 거른 채 이치가야에 있는 영세한 출판사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 일과였다. 내 책상에는 정리해야 할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시간 내에 처리하기 위해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저녁에는 교통량을 조사하거나 행사 보조 등의 다른 아르바이트가 기다리고 있어 항상 시간에 쫓겼다. 소설을 쓸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주말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했고, 영화제작 조수 일까지 맡게 될 때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쉬거나 밤새 현장에 박혀 있는 일도 많았다. 그런 중에도 나는 가능한 한 홍이와 함께 있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홍이의 불만과 고독은 더해만 갔다.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란 작품으로 수상을 한 뒤, 나는 다음 작품의 구상을 겸해 뉴욕에서 육 개월 정도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홍이 마음에 접근할 수 있었다.

어느 한가한 날 오후, 공원에서 쉬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가 내게 재프, 너희 나라로 꺼져!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위협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싸움으로 번진 것도 아니다. 남자는 그저 재프, 하고 욕설을 내뱉은 것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인데, 그동안 호감을 갖고 있던 미국이란 나라가 순간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어리석게도 내가 미국인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미국 문화의 영향을 흠뻑 받고 자란 내가 과거에 미국을 공격한 일본인의 후예란 당연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홍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함께 지낼 무렵, 홍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뉴욕에서 느낀 이상의 고독을 일본에서 맛보았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그녀의 고독을 도대체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난 늘 아르바이트에 쫓겨 지냈다. 가끔 시간이 날 때면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일이 많았다. 아무리 아르바이트를 해도 늘 돈이 부족했다. 홍이가 낭비벽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탓에 금전적인 가치관이 나와는 달랐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보지 못하면서도 조금씩 알아차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나이트클럽 일을 끝낸 여종업원들에게 아침까지 영업하는 카페에 가자는 제의를 받았다. 마침 그중 한 사람, 시비를 거는 손님이 있을 때마다 나를 도와준 선배의 생일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홍이가 뇌리를 스쳤지만, 건배만이라도 하려고 자리를 함께했다. 하지만 나는 만취가 되어, 여종업원들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왔다.

한밤중,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잠든 기치조지를 깨웠다. 하지만 어떻게 계단을 올라가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음날 아침, 홍이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홍이는 달리고 올게, 하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가 버렸다.

저녁에 다시 클럽에 가보니, 그렇게 예쁜 여자아이가 집에서 기다리는데 내버려 두고 와도 되겠어, 하고 여종업원들이 놀렸다.

― 준고 군, 그렇게 젊은 나이에 벌써 동거야? 그 애가 날 째려보더라.

― 설마, 날 집까지 바래다준 거예요?

여자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웨이터 중 한 명이, 셋이서 부축을 해 집까지 데려다 줬는데 생각나지 않느냐며 제스처를 써가며 설명했다.

나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몸이 좋지 않다고 하고 일찍 나이트클럽을 나왔다.

불이 꺼져 있었지만 홍이는 집에 있었다. 울고 있었을까. 방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홍이를 부르자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홍이가 매일 어떤 마음으로 나를 기다렸을지, 나는 좀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바로 나이트클럽을 그만두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아봤어야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홍이 시선은 안으로 잦아 들어갔다. 미소를 짓고 있어도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라기보다, 망연한 미소를 띠는 일이 늘어갔다.

고독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쓸쓸함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슬픔은 미래를 어둡게 한다. 거기에 젊음이 더해지면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한다. 밝은 색을 잃어버린 화가가 그린 그림과 같았다.

“사사에 선생님, 괜찮으세요?”

통역자의 말에 정신이 든다. 여기는 칠 년 전의 기치조지가 아니라 신라호텔 라운지다. 바로 앞에 신문기자와 통역자가 나란히 앉아 있고, 옆에서 이연희 씨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쉬었다 하지요, 라고 말했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준고.”

누군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른다. 먼 기억의 바다 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마음 속에서는 고개를 떨어뜨린 최홍의 슬픈 얼굴이 떠나질 않는다. 먼 하늘을 응시하는 홍이의 공허한 눈빛만이 떠오른다.

슬픔을 닦아 내듯 무심코 등 뒤를 돌아봤다. 예전의 아련한 빛을 바라보듯 눈을 응시하자 나를 향해 걸어오는 한 여자가 보였다.

“준고.”

밝은 꽃무늬 상의를 입은 고바야시 칸나가 라운지 입구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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