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15>
나도 모르는 나를
남에게 전해 듣는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을 자아내는 일어었다 공지영 “일어나, 언니.” 목소리는 록이의 것이었다. 눈을 뜨니 유리창으로 짙푸른 겨울 하늘이 물들어 있었다. “나쁜 꿈… 꿨어?” 록이는 내 책상의자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나는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날씨가 추울 모양이었다. 하늘이 파란 날, 날씨는 언제나 추웠다. 시베리아, 그 검고 황량한 벌판에서 확장한 고기압의 영향일 것이다. “내가 밤에 리포트 쓰다가 이상해서 와 보니까 언니가 흐느껴 울고 있었어. 깨웠는데도 안 일어나고 계속 울길래….” “내가?”
록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꿈속에서 언뜻 이노가시라 공원을 본 것은 같았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달려간 것 같았는데 기억은 없었다. 나도 모르는 나를 남에게 전해 듣는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을 자아내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때 내 귓가로 호숫가를 때리는 빗소리 같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 슬픈 귀가 열린다…. 빗속에서 작은 엉덩이를 흔들며 헤엄치던 오리 한 쌍, 쇠 냄새가 풍기는 것 같던 청동빛 연못…. 이제 그 사람이 나와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 내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을 때처럼 가슴 한편이 싸했다. 나는 록이의 손에 든 커피를 빼앗아 한 모금을 삼키면서 록이에게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두 가지만 말하겠는데 첫째, 사사에 히카리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든 아니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둘째, 밤에 남의 방을 엿보는 것은 그리 훌륭한 짓은 아니라는 거야.” 록이는 또 시작이군 하는 표정을 짓더니 혀를 날름 빼물고는 아침 먹어, 했다. 나는 간단히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갔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일찍 등산을 가신 모양이었다. “토요일인데 준이 안 만나니?” 록이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한번은 내가 회사 회식자리에서 밤늦게 들어와 입은 옷도 벗지 않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아침에 내 방문을 열어본 엄마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에이, 들어왔구나, 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러니까 우리가 밖에 나가 사고라도 쳐서 그걸 빌미로 결혼이라도 하기를 바라는지도 몰랐다. 우리 세대에 같이 잠잤다고 무작정 결혼하는 남자는 없어, 라고 설명을 해 줄 수도 없었다. 스물한 살에 아버지와 결혼한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버지는 집밖으로 떠도는 방황하는 내국인 같았고 록이는 슬퍼하는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엄마,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연애를 좀 해보시지 그래요. 비밀은 우리 둘이 충분히 지켜 줄 테니까. 우리 자매는 둘 중에 누구든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의도가 엄마의 뜻대로 관철되지 않게 하기 위해 서둘러 조잘거렸다. 요즘 자꾸 살이 찌고 있는 엄마는 다이어트 비법만 말하면 열중해 버리곤 했으므로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밥 대신 말이야 두부를 먹는 거래. 그렇게 해서 누가 한 달에 7킬로그램이나 뺐다니까.” “국수나 빵은 안 돼. 술도 안 돼. 그리고 포도나 수박이나 뭐 이런 걸로 하는 원 푸드 다이어트는 요요 현상이 너무 심해서 안 된대.” 우리는 버터가 듬뿍 들어간 하얀 식빵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그 위에 두꺼운 햄을 끼워 먹으며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엄마는 부엌으로 가서 진한 요구르트를 가져와 우리들의 잔에 부어주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문득 예방 주사를 맞으러 가는 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저 전화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나는 알 것만 같았다. “홍, 밥 먹으러 나와라. 날씨가 너무 좋다!” 민준은 언제나처럼 말했다. 화창한 날씨처럼 쨍하고 뽀송뽀송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뭐랄까 조금은 단호한 명령조의 어투가 배어 있었다. 아니,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나는 민준이 어제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했다.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와 결혼을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또 그를 두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내 자신에게 조금 짜증이 났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대답하고 말았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민준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홍… 나 보고 싶지 않니?” 나 보고 싶었어? 얼만큼? 언제? 라고 나도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 내가 사랑에 빠졌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왜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인지, 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나 자주 보고 싶었느냐고 묻는지… 나는 민준을 두고 그가 나를 사랑할까, 라든가, 그가 나를 보고 싶어 할까, 라든가 하는 궁금증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민준은 친구인 나를 두고 사랑에 빠진 것인지, 나는 당황스러워졌고 그래서 그저 응, 이라고 말해버렸다. 보고 싶니, 라고 물은 것도 아니고 보고 싶지 않니, 라는 물음에 응, 이라고 대답한 건 대체 무슨 뜻이니? 민준은 하하, 웃었다.
극복하지 못할 틈 같은 건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홍이를 더욱 뜰어안았다 쓰지 히토나리 두 나라 사이에는 너무도 넓고 큰 하늘과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 홍이는 집 생각이 날 때마다 한국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먼 하늘… 하고 중얼거렸다. 무심코 한 말이었는지 본인은 금방 잊어버렸다. 며칠 후, 먼 하늘이란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홍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늘은 맑았지만 멀리 구름이 보였다. 홍이 앞에 펼쳐진 하늘이었을까, 아니면 하늘 저편에 이어져 있을 서울의 하늘이었을까. 둘이서 함께 바다를 본 적이 없다. 홍이는 자주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바다는 현해탄 혹은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서울 근교의 바다로, 태평양이 아니었다. 바다를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저녁이면, 대개 혼자서 몰래 울었다. ―같이 있는데 뭐가 쓸쓸해? 나는 그녀가 몰래 울 때마다 그렇게 물었다. 홍이는 눈물을 감추며 쓸쓸해서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말했다. 그것이 거짓말이란 건 안다. 꿈이 차츰차츰 무너져 내려 작은 구멍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밝은 미래에도 검은 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다. 평온한 미래라도 거친 파도가 일 때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자연현상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힘을 합해 서로를 의지해야 했으나, 너무 응석을 부린 나머지, 혹은 두 사람이 너무도 가까이 있었던 탓에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일이 늘고, 객관적으로 상대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소중한 것과 필요한 것을 지나쳐 버리는 일도 늘고 말았다. ―준고는 몰라. 이럴 때면 홍이는 나를 윤오가 아닌 준고라 불렀다. 나를 탓하며 준고라 부를 때면, 갑자기 홍이가 멀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싫다는 홍이를 억지로 끌어안고 저항이 멈추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극복하지 못할 틈 같은 건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홍이를 더욱 끌어안았다. ―그래 울어. 부끄러워하지 말고 울고 싶은 만큼 울어. ―전혀 슬프지 않아! 우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진 것도 아니야! 고집불통 홍이는 큰소리치며 나를 거부했지만, 나는 팔을 풀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둬.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버려 두라고. ―그럴 순 없어. 그냥 내버려 두면 네가 어딘가로 가 버릴 것 같아 두려워. 결국, 홍이는 내 가슴에 들어와 울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혹시 누가 상처를 준 건 아닐까. 아니면 차별을 당한 걸까. 한국인을 비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뉴스, 신문기사를 봤을까. 혹은 그녀 조국에서 무슨 슬픈 일이 일어난 걸까. 일본 사람과 사귄다고 가족들이 반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유 같은 건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향수! 이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생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또는 본질적인 문제가 그녀 마음속에 드리워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홍이의 그런 외로움을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 때, 두 사람의 사랑도 패배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그 적이 두려웠으며, 언제 홍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게 되었다. 혹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 갈래, 하는 말을 꺼내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때, 나는 몇 개나 되는 아르바이트를 해치워야 했다. 주말에 나이트클럽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는 새벽이나 돼야 끝났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은 늘 전철 첫차로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와 방 한쪽 구석에서 울고 있는 홍이를 보게 되면, 어떤 비난의 말들이 날아올까. 나는 늘 조마조마했었다. ―준고는 분명히 아무한테나 다 다정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게 되는 거야. 나는 쭈뼛쭈뼛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일하는 데선 아무한테도 웃는 얼굴을 보이고 않고, 또 사람들하고 말도 안 해. 늘 네 생각만 한다고. 이런 거짓말이 홍이를 가장 화나게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로지 홍이를 내 곁에 매어두고 싶은 마음에 난 서툰 거짓말을 하고 만다. ―하지만 베니. 현실적인 문제로 나는 일을 해야 해. 넌 집이 부자라 괜찮지만 난 가난하잖니. 내가 학비를 벌지 않으면 학교에도 갈 수가 없다고. 알겠니? ―나도 일할래. 하며 홍이는 날 난처하게 했다. 하지만 내 늦은 귀가를 어두운 방에서 울면서 기다리는 것보다 같은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쪽이 나을 것도 같았다. 일주일 후, 홍이는 빵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그 첫 월급으로 내게 맛있는 불고기를 사주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것이 일을 시작한 첫 번째 이유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정말 배가 터질 정도로 불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불고기를 먹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뒤에 탄 홍이는 불룩 튀어나온 내 배를 끌어안고 말했다. ―윤오가 많이 먹어 줘서 너무 기뻐.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그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등으로 홍이의 온기가 전해진다. 홍이는 내게 완전히 몸을 의지하고 있다. 나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멀어지기 시작한 두 사람의 마음을 비끄러매기 위해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았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남에게 전해 듣는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을 자아내는 일어었다 공지영 “일어나, 언니.” 목소리는 록이의 것이었다. 눈을 뜨니 유리창으로 짙푸른 겨울 하늘이 물들어 있었다. “나쁜 꿈… 꿨어?” 록이는 내 책상의자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나는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날씨가 추울 모양이었다. 하늘이 파란 날, 날씨는 언제나 추웠다. 시베리아, 그 검고 황량한 벌판에서 확장한 고기압의 영향일 것이다. “내가 밤에 리포트 쓰다가 이상해서 와 보니까 언니가 흐느껴 울고 있었어. 깨웠는데도 안 일어나고 계속 울길래….” “내가?”
록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꿈속에서 언뜻 이노가시라 공원을 본 것은 같았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달려간 것 같았는데 기억은 없었다. 나도 모르는 나를 남에게 전해 듣는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을 자아내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때 내 귓가로 호숫가를 때리는 빗소리 같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 슬픈 귀가 열린다…. 빗속에서 작은 엉덩이를 흔들며 헤엄치던 오리 한 쌍, 쇠 냄새가 풍기는 것 같던 청동빛 연못…. 이제 그 사람이 나와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 내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을 때처럼 가슴 한편이 싸했다. 나는 록이의 손에 든 커피를 빼앗아 한 모금을 삼키면서 록이에게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두 가지만 말하겠는데 첫째, 사사에 히카리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든 아니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둘째, 밤에 남의 방을 엿보는 것은 그리 훌륭한 짓은 아니라는 거야.” 록이는 또 시작이군 하는 표정을 짓더니 혀를 날름 빼물고는 아침 먹어, 했다. 나는 간단히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갔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일찍 등산을 가신 모양이었다. “토요일인데 준이 안 만나니?” 록이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한번은 내가 회사 회식자리에서 밤늦게 들어와 입은 옷도 벗지 않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아침에 내 방문을 열어본 엄마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에이, 들어왔구나, 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러니까 우리가 밖에 나가 사고라도 쳐서 그걸 빌미로 결혼이라도 하기를 바라는지도 몰랐다. 우리 세대에 같이 잠잤다고 무작정 결혼하는 남자는 없어, 라고 설명을 해 줄 수도 없었다. 스물한 살에 아버지와 결혼한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버지는 집밖으로 떠도는 방황하는 내국인 같았고 록이는 슬퍼하는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엄마,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연애를 좀 해보시지 그래요. 비밀은 우리 둘이 충분히 지켜 줄 테니까. 우리 자매는 둘 중에 누구든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의도가 엄마의 뜻대로 관철되지 않게 하기 위해 서둘러 조잘거렸다. 요즘 자꾸 살이 찌고 있는 엄마는 다이어트 비법만 말하면 열중해 버리곤 했으므로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밥 대신 말이야 두부를 먹는 거래. 그렇게 해서 누가 한 달에 7킬로그램이나 뺐다니까.” “국수나 빵은 안 돼. 술도 안 돼. 그리고 포도나 수박이나 뭐 이런 걸로 하는 원 푸드 다이어트는 요요 현상이 너무 심해서 안 된대.” 우리는 버터가 듬뿍 들어간 하얀 식빵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그 위에 두꺼운 햄을 끼워 먹으며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엄마는 부엌으로 가서 진한 요구르트를 가져와 우리들의 잔에 부어주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문득 예방 주사를 맞으러 가는 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저 전화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나는 알 것만 같았다. “홍, 밥 먹으러 나와라. 날씨가 너무 좋다!” 민준은 언제나처럼 말했다. 화창한 날씨처럼 쨍하고 뽀송뽀송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뭐랄까 조금은 단호한 명령조의 어투가 배어 있었다. 아니,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나는 민준이 어제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했다.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와 결혼을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또 그를 두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내 자신에게 조금 짜증이 났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대답하고 말았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민준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홍… 나 보고 싶지 않니?” 나 보고 싶었어? 얼만큼? 언제? 라고 나도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 내가 사랑에 빠졌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왜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인지, 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나 자주 보고 싶었느냐고 묻는지… 나는 민준을 두고 그가 나를 사랑할까, 라든가, 그가 나를 보고 싶어 할까, 라든가 하는 궁금증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민준은 친구인 나를 두고 사랑에 빠진 것인지, 나는 당황스러워졌고 그래서 그저 응, 이라고 말해버렸다. 보고 싶니, 라고 물은 것도 아니고 보고 싶지 않니, 라는 물음에 응, 이라고 대답한 건 대체 무슨 뜻이니? 민준은 하하, 웃었다.
극복하지 못할 틈 같은 건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홍이를 더욱 뜰어안았다 쓰지 히토나리 두 나라 사이에는 너무도 넓고 큰 하늘과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 홍이는 집 생각이 날 때마다 한국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먼 하늘… 하고 중얼거렸다. 무심코 한 말이었는지 본인은 금방 잊어버렸다. 며칠 후, 먼 하늘이란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홍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늘은 맑았지만 멀리 구름이 보였다. 홍이 앞에 펼쳐진 하늘이었을까, 아니면 하늘 저편에 이어져 있을 서울의 하늘이었을까. 둘이서 함께 바다를 본 적이 없다. 홍이는 자주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바다는 현해탄 혹은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서울 근교의 바다로, 태평양이 아니었다. 바다를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저녁이면, 대개 혼자서 몰래 울었다. ―같이 있는데 뭐가 쓸쓸해? 나는 그녀가 몰래 울 때마다 그렇게 물었다. 홍이는 눈물을 감추며 쓸쓸해서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말했다. 그것이 거짓말이란 건 안다. 꿈이 차츰차츰 무너져 내려 작은 구멍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밝은 미래에도 검은 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다. 평온한 미래라도 거친 파도가 일 때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자연현상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힘을 합해 서로를 의지해야 했으나, 너무 응석을 부린 나머지, 혹은 두 사람이 너무도 가까이 있었던 탓에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일이 늘고, 객관적으로 상대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소중한 것과 필요한 것을 지나쳐 버리는 일도 늘고 말았다. ―준고는 몰라. 이럴 때면 홍이는 나를 윤오가 아닌 준고라 불렀다. 나를 탓하며 준고라 부를 때면, 갑자기 홍이가 멀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싫다는 홍이를 억지로 끌어안고 저항이 멈추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극복하지 못할 틈 같은 건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홍이를 더욱 끌어안았다. ―그래 울어. 부끄러워하지 말고 울고 싶은 만큼 울어. ―전혀 슬프지 않아! 우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진 것도 아니야! 고집불통 홍이는 큰소리치며 나를 거부했지만, 나는 팔을 풀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둬.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버려 두라고. ―그럴 순 없어. 그냥 내버려 두면 네가 어딘가로 가 버릴 것 같아 두려워. 결국, 홍이는 내 가슴에 들어와 울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혹시 누가 상처를 준 건 아닐까. 아니면 차별을 당한 걸까. 한국인을 비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뉴스, 신문기사를 봤을까. 혹은 그녀 조국에서 무슨 슬픈 일이 일어난 걸까. 일본 사람과 사귄다고 가족들이 반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유 같은 건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향수! 이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생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또는 본질적인 문제가 그녀 마음속에 드리워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홍이의 그런 외로움을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 때, 두 사람의 사랑도 패배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그 적이 두려웠으며, 언제 홍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게 되었다. 혹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 갈래, 하는 말을 꺼내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때, 나는 몇 개나 되는 아르바이트를 해치워야 했다. 주말에 나이트클럽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는 새벽이나 돼야 끝났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은 늘 전철 첫차로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와 방 한쪽 구석에서 울고 있는 홍이를 보게 되면, 어떤 비난의 말들이 날아올까. 나는 늘 조마조마했었다. ―준고는 분명히 아무한테나 다 다정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게 되는 거야. 나는 쭈뼛쭈뼛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일하는 데선 아무한테도 웃는 얼굴을 보이고 않고, 또 사람들하고 말도 안 해. 늘 네 생각만 한다고. 이런 거짓말이 홍이를 가장 화나게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로지 홍이를 내 곁에 매어두고 싶은 마음에 난 서툰 거짓말을 하고 만다. ―하지만 베니. 현실적인 문제로 나는 일을 해야 해. 넌 집이 부자라 괜찮지만 난 가난하잖니. 내가 학비를 벌지 않으면 학교에도 갈 수가 없다고. 알겠니? ―나도 일할래. 하며 홍이는 날 난처하게 했다. 하지만 내 늦은 귀가를 어두운 방에서 울면서 기다리는 것보다 같은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쪽이 나을 것도 같았다. 일주일 후, 홍이는 빵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그 첫 월급으로 내게 맛있는 불고기를 사주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것이 일을 시작한 첫 번째 이유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정말 배가 터질 정도로 불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불고기를 먹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뒤에 탄 홍이는 불룩 튀어나온 내 배를 끌어안고 말했다. ―윤오가 많이 먹어 줘서 너무 기뻐.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그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등으로 홍이의 온기가 전해진다. 홍이는 내게 완전히 몸을 의지하고 있다. 나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멀어지기 시작한 두 사람의 마음을 비끄러매기 위해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았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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