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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12>

등록 2005-10-13 16:13수정 2005-10-13 16:13

먼하늘가까운바다 <12>
먼하늘가까운바다 <12>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도, 그 흔해빠진 말들을
나는 그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했었다

공지영

율동 공원 호숫가를 지나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서려는데 검은 코트에 푸른 모자를 눌러쓴 록이가 근처 제과점에서 빵을 사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록이는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내가 차를 세우자 록이는 차에 올라탔다. 추워서 죽는 줄 알았네, 하고 차에 탄 록이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물었다.

“왜 그래? 얼굴이… 또 누가 결혼한대? 아니면 뚱뚱했던 동창이 요가랑 헬스랑 지방 흡입해서 팔다리가 길고 낭창한 여자로 변해서 나타난 거야?”

“록!”

어이가 없는 내가 대답하려고 하자 록이가 깔깔 웃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었구나. 아니면, 그 일본 작가라는 사람이 너무 멋있었구나! 게다가 약혼자 사진을 보여주는데 그 여자가 예전에 언니가 일본에서 그렇게 싫어했던 그 칸나인지 글라디올러스인지 그 여자를 닮았든가…. 팔다리가 길고 수양버들처럼 낭창낭창하고 말도 여자답게 가만가만 하고….”

기어를 P로 올리고 자동차 키를 챙겨 내리려다가 나는 록이를 돌아보았다.


“농담, 농담…. 그런데 이상도 하지. 나도 모르게 7년 전에 언니가 공항에 파란 얼굴로 돌아왔던 그 생각이 나잖아!”

록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깨를 옹송그리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7년 전 그 얼굴이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 발을 모으고 얼굴을 묻고 있던 번개가 끄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잠을 청하려는 듯했다. 추운 겨울밤의 냉기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내 뺨은 달아올라 있었다. 차문을 잠그면서 그가 앉아 있던 좌석이 보였다. 이제 이 차를 타면서 그가 내 곁에 앉아 있었던 그 기억을 잊으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내가 떠났던 그의 방에서 그도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두고 왔던 보랏빛 나비 귀고리랑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던 소년 인형을 그는 어떻게 했을까… 사랑한다고도, 결혼하자고도, 그 흔해빠진 말들을 나는 그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했었다. 그가 내 목을 휘어감고 입술을 맞추었을 때, 이건 처음이야, 하는 말들을 나도 하지 못했다. 그 처음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낙인처럼 내 가슴에 찍혀져 버렸다고도 나는 말하지 못했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섰다. 내가 들어서는 기척에 엄마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아직 귀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엄마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리모컨이 쥐어져 있었고 그 앞에 불 밝힌 TV에는 여자들이 나와 울고 웃고 남자들은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꼭 우리 집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연둣빛 트레이닝복을 꺼내 들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록이였다. 록이의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사사에 히카리… 라는 글씨가 내 눈에 박혀 왔다. 록이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책을 내밀었다. 나는 모른 척 진회색 슈트를 벗어던지고 연둣빛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록이가 책장을 열고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었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 슬픈 귀가 열린다. 그 슬픈 귓속으로 베토벤의 선율이 밀려든다. 피아노는 이노가시라 공원의 빗소리처럼 내 귓바퀴를 두드린다. 비창이라는 곡이다. 한국인 친구는 이 곡의 제목이 싫다고 말했다.”

나는 연둣빛 트레이닝복 위로 카키색 파카를 걸쳤다.

“그 비창이 이 비창이지?”

록이가 내 책상 위에서 비창 소나타가 든 CD를 꺼내 내게 보이며 물었다.

“난 저번에 이 책을 읽고 언니한테 묻고 싶었어. 이 사사에 히카리가 혹시 그 사람 아닌가 하고… 상처가 될까봐 물어보지 않았는데 오늘 언니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었어.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언닌 정말 몰랐던 거야?”

“난 일본 작가 소설 안 읽어!”

나는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민준이 오빠가 방금 집으로 전화했었어. 언니가 휴대폰을 받지 않는다고.”

나는 손잡이를 돌렸다.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뛰는 거지?”

나는 록이의 질문을 뒤로 하고 집밖으로 나왔다. 7년 동안 한 번도 그 친구를 잊은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이 록이의 질문과 엉켜들었다.


우리는 입으로 전하는 호흡으로 부력에 저항하며
언제까지고 바다 밑에서 사랑을 했다

쓰지 히토나리

누군가가 내 볼을 어루만진다. 그날의 홍이가 틀림없는데 나는 잠에서 눈을 뜰 수가 없다.

―일어나, 준고. 학교 지각하겠어. 자, 착하지, 어서 일어나세요.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한다. 1교시 수업인 예술학 출석률이 아슬아슬하다. 어서 일어나라고 따사로운 손이 내 볼과 이마와 눈을 어루만진다.

―홍, 가려워.

홍이 손을 잡으려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홍이를 찾으면서 점점 의식이 깨어난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환영 같은 손. 엷게 눈을 뜨고 실내를 둘러본다. 부드럽게 나를 깨운 건 홍이의 손이 아니라 아침 햇살이었다.

기지개를 켜고 침대를 빠져나와 트렁크에서 꺼낸 소형 카세트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실내에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비창>이 흐르기 시작한다. 테이프에는 같은 곡이 몇 번이고 되풀이 녹음되어 있다. 그가 남긴 아홉 곡의 교향곡과 서른두 곡의 피아노소나타, 그리고 스무 곡에 가까운 현악사중주 모두가 좋은 건 아니다. 오히려 화려하고 힘찬 베토벤의 작풍은 내 취향과는 멀다. 하지만 이 초기 피아노소나타 <비창>만은 몇 번을 들어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또 하나의 명곡 <월광>도 애착이 가는 곡이지만, <비창>에는 제목에는 쓰여 있지 않은 희망이 선율 안쪽에 감춰져 있는 느낌이 든다.

왜 이 곡을 내 마음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걸까.

베토벤은 27살 때 귀에 이상이 있음을 자각한다. 병은 이 음악가에게 절망을 가져다 주었다. <비창>은 이 같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만들어진 곡이다.

내 유년시절과 이 곡의 탄생에 나는 적지 않은 공통점을 느낀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인기 없는 가수로 매일 술에 빠져 지냈다.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베토벤은 열네 살에 일가를 책임지기 위해 궁정 오르간연주자가 된다. 아버지의 스파르타식 교육 탓에 그는 소중한 유년 시절을 피아노 앞에서만 보냈다. 소년 시절 베토벤의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어머니였다. 내 어린 시절과는 부모의 역할이 반대지만, 왠지 비슷한 경우라 느껴진다. 가혹한 인생을 견딜 수 없었던 그의 귀는 세상을 거절하기 시작한다. 이는 자기 손으로 스스로를 내면으로 닫아버리는 병이다.

1799년 베토벤이 스물여덟 되던 해, 청각을 잃어가는 절망 속에서 이 곡이 만들어졌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곡에 <비창>이란 이름이 붙여졌는지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곡에서 신의 존재를 보려 하고 있다. 특히 제3악장의 기도와 같은 선율의 아름다움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말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신의 영역을 표현한 것이다.

어느 날, 내가 늦게까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담요 속에 있자, 홍이는 내 이마에 손을 얹고는 괜찮아, 넌 이제 혼자가 아니야 하고 말했다. 그녀에게 깊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일까, 홍이에게서는 성모와 같은 자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도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내게 가끔 홍이가 보이는 자상함은 내가 알지 못하는 모성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홍이 팔을 잡고 그녀를 침대의 바다 속으로 끌고 간다. 외로웠고 수면 속으로 가라앉을 것 같아 그녀에게 매달려 있고 싶었다. 두 사람은 사랑의 바다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가라앉지 않도록 꼭 끌어안았다. 우리는 입으로 전하는 호흡으로 부력에 저항하며 언제까지고 바다 밑에서 사랑을 했다.

―윤오, 이제 정말 일어나야 돼. 학교랑 아르바이트 전부 지각할 거야.

―괜찮아, 베니. 난 이미 인생의 모든 것에 지각한 상태니까.

홍이가 아침햇살 속에서 웃었다. 웃는 얼굴이 천진하기만 했다. 입가에 옥니가 보인다. 내게는 천사 같은데, 홍이는 자기 옥니를 싫어했다.

―한국에서는 최씨란 성에 곱슬머리, 옥니를 다 갖추면 고집스런 사람으로 봐.

내가 보기에 홍이는 고집이 센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세월의 바다를 헤엄치면서도 나는 조금씩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셔츠를 걸치고 바지에 다리를 끼운다. 흐트러진 머리를 고치고 방을 정리한다. 룸서비스로 시킨 커피를 다 마실 즈음에는 기억 속의 다정한 홍이와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윤오, 어서 나가자.

홍이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우리는 기치조지의 햇살이 넘치는 거리를 함께 달려나갔다. 잰걸음으로 역을 향하면서도 홍이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만원전철 속에서도 홍이나 나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꼭 붙어 장난꾸러기들처럼 키득키득 웃어 주변 승객들의 빈축을 샀다. 하지만 그런 미소도 신주쿠까지.

홍이가 다니는 일본어학교는 신주쿠 역의 서쪽 출구에, 내가 다니는 대학은 거기에서 네 정거장 더 간 요츠야에 있었다. 홍이는 마음이 안 놓이는 얼굴로 혼자 플랫폼에 내렸다. 가끔 내 팔을 끌어 함께 내리려고 하기도 했다. 난 손잡이를 꽉 잡았다. 문이 닫히고 전철이 달리기 시작하면 홍이는 플랫폼에서 우는 흉내를 냈다. 멀어져가는 홍이 모습이 언제까지고 눈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 날은 하루종일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호텔 로비에 내려가 보니, 이연희 씨 옆에는 홍이 대신 다른 여성이 서 있었다. 새로운 통역이 나를 보더니 처음 뵙겠습니다 하며 새로운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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