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5>

등록 2005-10-13 15:29

먼하늘가까운바다 <5>
먼하늘가까운바다 <5>
내가 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사랑했던 내 자신이었다

이런 만남을 어떤 종류의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꼭 이런 만남을 어떤 종류라고 정의해야 하나? 준고는 언제나 내가, 이런 걸까 저런 걸까, 그건 대체 무슨 의밀까, 조잘거리며 턱을 괴고 있으면 그 특유의 약간 갈색 띤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그가 나의 연인이었을까. 그럴 때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귀여워 못 견디겠는 듯, 어린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와 같은 표정이 있었다. 맙소사, 7년이라는 세월이, 그토록 안간힘을 써서 버텼던 그 세월이 지나가기나 한 것인지 나는 믿을 수가 없어져버렸다. 시간이 종이처럼 딱 접혀져버리는 것 같았다. 호숫가에서 그를 발견하고 턱에 숨이 차게 뛰어가던 그날로 나는 어떤 경계도 없이 되돌아가도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대기하고 있던 밴에 올라탔다. 이연희 과장이 나의 태도에 당황하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무례하고 좋지 않은 태도였다. 하지만 이연희 과장을 신경쓸 만한 여유가 내겐 없었다. 그가 올라타자 차는 공항을 출발했다.

우리는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차가 급회전을 할 때 아차, 하면 서로 어깨가 닿을 만큼의 거리가 있다. 아차, 하면 닿을 수 있으나 우리 두 사람 다 서로에게 가 닿지 않을 것을 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늘 낯익었던 풍경은 유화가 번진 것처럼 뭉쳐 있다. 바라보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안다.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도 묻고 싶을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하고…. 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말을 아낄 것이었다. 그냥, 축하합니다, 결국 당신은 해냈군요, 라고 말해주고도 싶었다. 평소의 최홍이라면 그럴 것이었다. 나 자신을 천 번쯤 납득시킨 얼굴로, 눈물 같은 건 꾹 참고 사사에 선생님, 여기가 한강이에요,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북한산이에요. 인수봉의 이마가 희고 아름답지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서울만큼 큰 강과 웅장한 산을 가진 대도시를 본 적이 없어요, 라고 씩씩한 한국 여자로서, 일본 작가인 그에게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다이조브? 하고 그가 물었던 호숫가가 내 눈앞으로 떠올라왔다. 다이조브라는 일본말은 괜찮아? 하고 묻는 한국말과 같은 의미지만, 뉘앙스에 이상한 위안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우산 위로 부딪치는 빗방울보다 부드러웠다.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이, 다이조오브으?, 말 꼬리를 친절하게 올리며 그는 취한 내 얼굴 위로 우산을 건네며 물었다. 빗방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작은 우산 속에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이 들어가자, 나는 문득 집에 돌아온 듯한 안온함을 느꼈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걸 믿느냐고 물었던 건 그래서였을까? 왜 그에게 그런 말을 꺼냈을까. 왜 그에게, 일본인이고 몇 번 마주친 적도 없는 그에게 나는 그런 말을 꺼냈을까.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고, 그가 그렇지 않다고 하면 변하지 않는 사랑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가 그의 말 한마디에 사라지기라도 할 거라고 나는 믿었을까? 다이조브…. 나는 대답했었다. 우리말로 한자를 읽으면 대장부(大丈夫)가 되는 그 말. 대장부도 아니면서 나는 대장부처럼 씩씩하게 괜찮다고 대답했었다.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는데, 실은 외롭고, 실은 허무하고 그래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누구의 옷자락이라도 움켜쥐고 날 좀 어디론가 데려가 줄래요, 실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는데…. 그러나 그가 아오키에서 사사에로 변해 있듯이 나도 변해 있었다. 말괄량이 베니에서 이제는 최홍 기획실장으로. 스물둘에서 스물아홉으로.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을 하던 여자에서 그런 말 같은 건 꺼내지 않는 여자로. 아니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나는 최씨에 곱슬머리에 옥니를 가진 여자였다. 내 동생은 최씨에 곱슬머리에 옥니에다 말띠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한국 여자들이 가지고 있으면 불편한 고집과 배짱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자매였다.

―민준 오빠가 불쌍해.

동생 록이는 가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가 왔어, 라고 내가 말하면 록이는 무어라고 대답할까, 나는 그게 무서웠다. 두 살 아래의 동생이긴 하지만 록이는 언제나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내가 언니였다면 나는 지난 일 같은 건 그냥 아름답게 간직해버리고 말 거야. 노래방 같은 데서 노래 부를 때만 조금 생각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릴 거라구.”

“잊는다구?”

내가 물었을 때 록이는 맥주잔을 들다 말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잊는 거, 잊어버리는 거 말이야.”

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내가 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사랑했던 내 자신이었다. 그토록 겁도 없이 달려가던 나,였다. 스물두 살, 사랑한다면, 그가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었던, 사랑한다면, 함께 무엇이든 이야기하고 나누고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던, 스물두 살의 베니,였다. 그를 만나지 못해도, 영영 다시는 내 눈앞에 보지 못한다 해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를 떠날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공지영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너무나도 부조리한 마지막이었다

먼하늘가까운바다 <5>
먼하늘가까운바다 <5>
그날 나는 이노가시라 공원 벤치에서 눈을 떴다. 전날 너무 마신 탓인지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시야를 가린 연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나는 벚꽃이 모두 진 후의 신록의 계절을 좋아한다.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들과 그 사이로 비쳐들어 발 아래서 살랑살랑 물결치는 햇빛이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무릎을 안고 눈부신 호수를 바라보았다. 수면에서 반짝반짝 햇살이 차올라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감은 눈꺼풀 안쪽에 그 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온기가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때 같으면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것도 저 아이 덕인가?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아파트가 있는 돈대 쪽을 돌아보며 내 침대에서 자고 있을 한국 친구의 잠든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상하게 수업 중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홍이가 떠나질 않았다. 고바야시 칸나가 바로 앞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술 취해 카운터에 엎드린 홍이의 뒷모습이 있었다. 왜 그녀는 그렇게까지 취해 쓰러져야 했을까. 한국 여자들은 그런 식으로 술을 마시는 걸까. 그래, 그 순간이었다. 내가 홍이를 모델로 언젠가 소설을 써야겠다 생각한 건.

점심시간에 칸나는 새 남자친구와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있었다. 바로 한 달 전까지 그녀 곁에는 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자리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너무나도 부조리한 마지막이었다. 평소의 냉정함을 유지할 수가 없어 나는 꼴사납게도 칸나의 새 남자 앞에서 이성을 잃고 말았다. 누군가가 달려와 나를 말렸지만 난 폭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초라한 내 모습에 더욱 상처를 받아 대학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냥 사랑할 수 없게 된 것뿐이야, 하고 떠난 칸나의 말을 수도 없이 헤아려보았지만 도저히 그녀 마음을 알 수가 없었고 결국엔 남을 믿지 못하게 됨으로써 스스로를 수렁으로 끌고 갔다. 처음 하는 사랑이었기에 마음의 크기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몰랐었다.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칸나가 떠났다는 것보다 그 자리에 있던 것, 그래 난생 처음 알게 된 사랑의 기쁨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에 나는 오히려 당황하고 허둥댔다.

칸나는 널 갖고 논 거야, 넌 피해자라고, 친구들이 말했다. 저 녀석도 금방 차일 게 뻔해. 친구들의 위로는 내게 더욱 상처를 주었다.

―아오키, 그럼 또 봐.

그날 칸나는 내게 말했다. 내가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버린 슬픔은 어느새 미움으로 변했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원망 탓에 나는 웃음을 잃고 말았다.

최홍의 등장으로 상처 입은 내 마음은 잠시나마 평온함을 되찾아 눈부신 봄 햇살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을 회복했다. 홍이는 미워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란 것을 가르쳐주었다. 한꺼번에가 아니라 조금씩, 설교를 하거나 깨우쳐주려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럽게 강요하지 않는 부드러움으로, 엉킨 내 마음을 풀어 서서히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방은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었고, 책상 위에 내가 두고 간 메모 뒤에는 자화상일까, 메롱 하는 귀여운 낙서가 남겨져 있었다. 종이가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메모 위에는 휘파람 부는 사내아이 인형이 놓여 있었다.

어질러져 있던 방은 몰라볼 정도였다. 잔뜩 쌓아 올려 둔 책들은 다시 책꽂이에 꽂혔고, 스탠드는 갓의 먼지와 때가 말끔히 닦여 밝기를 더했으며, 바닥과 테이블 위, 싱크대 할 것 없이 모두가 반짝반짝 윤이 났다. 벽의 얼룩과 기름때도 말끔히 지워졌다. 내 마음속에 있던 것이 몽땅 새것으로 바뀐 것 같이 놀라웠다. 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불러들였다. 이상하게도 거기에, 그러니까 방 한쪽에 최홍이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홍이는 단지 내 방을 청소하고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나의 어리석음을 내 대신 깨끗이 쓰레기통에 버려준 것이다. 음울하기만 하던 내 마음에 푸른 하늘을 가져다 주었고, 우물쭈물하는 내 생활에 넓고 파란 바다를 불러왔다. 그녀가 내 어두운 삶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빨리 상처를 딛고 일어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홍이는 억지도 강요도 하지 않았으나,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나를 건져주었다. 얼마나 알기 쉽고 사랑스런 교훈인지. 말끔해진 방안에서 혼자 침울해하고 있는 건 너무나도 바보스런 일이었다.

홍이는 그 후로도 뜻밖의 순간에 나타나 같은 방법으로 청소를 하고 돌아갔다. 즐거운 듯이 천진난만하게 청소하는 홍이를 보고 있으면, 어째서일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인정받은 것 같이 행복했고 또 누구든 상관없이 먼저 용서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고 오로지 칸나를 원망하기만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홍이의 존재는 내게 마치 성모와도 같았다. 1997년 초여름,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고, 한 살 아래의 홍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쓰지 히토나리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노안이 오면 책을 읽으세요 1.

노안이 오면 책을 읽으세요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2.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중증외상센터, 원작 소설 초월…주지훈 배우는 말 그대로 만찢남” 3.

“중증외상센터, 원작 소설 초월…주지훈 배우는 말 그대로 만찢남”

‘해뜰날’ 가수 송대관 유족 후배들 슬픔 속 발인 4.

‘해뜰날’ 가수 송대관 유족 후배들 슬픔 속 발인

스승 잘 만난 제자, 제자 덕 보는 스승…손민수·임윤찬 7월 한무대 5.

스승 잘 만난 제자, 제자 덕 보는 스승…손민수·임윤찬 7월 한무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