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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

등록 2005-10-13 15:26수정 2005-10-13 15:26

먼하늘가까운바다
먼하늘가까운바다


그가 내 인생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무어라 하든 말든 나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기적도 있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정말 있으며,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면 풍요로운 우주의 선(善)이 나를 도와줄 거라는 열렬하고 턱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벚꽃이 날리던 그 봄날에 성큼성큼 걸어와 떨어진 인형을 주워 주던 그 모습 그대로…. 아니, 그 모습 그대로라는 말이 과연 합당할까. 형편없이 말랐던 그때보다 살이 조금 더 올라 있었고 얼굴은 조금 더 까칠해져 있었다.

그 호숫가 나무다리 위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왜 그렇게 가슴이 철렁했는지 나는 아직까지도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만년 동안 고독하게 얼음바다에 떠 있던 빙하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주 낯익은 느낌이 밀려왔었다. 그 느낌은 조수처럼 부드러운 것이었지만 또한 대양의 해류처럼 막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오래된 빙하가 잘려나간 것 같은 차가움이 어려 있었으며, 그 단면 맨 위층에는 그것을 위장하려는 무표정이, 그 다음 층에는 아프리카 초원의 한 귀퉁이에서 혼자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날씬한 맹수의 슬픈 빛이, 그리고 맨 아래에는 스스로 폭발해버리고야 말겠다는 터무니없는 의지가 곁들여진 에너지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말로 하자면 케이크의 단면 같은 복잡한 느낌을 나는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다 느껴버렸다. 아니, 느꼈다기보다는 날아오는 공을 얼결에 받아버린 얼치기 외야수 같은 형국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가 내 인생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머릿속으로는 그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안 돼, 라거나 그 사람은 일본인이야, 라거나 앞으로의 내 인생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들도 함께 스쳐갔을 것이다. 빤히 바라보는 내 눈길이 어색한 듯 그때 그는 잠시 눈길을 어디다 둘지 몰라 했다. 귀여운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아직 머릿결이 싱싱했던 스물둘이었다. 그의 개구쟁이 같은 표정 때문에 이 모든 직관들은 다 사라지고 나 역시 얼굴이 조금 붉어졌던 것 같다.

이연희 과장이 나를 툭 쳤다. 그와 나의 사로잡힌 듯한 시선에서 내가 먼저 눈길을 돌렸다. 사사에 선생님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나는 그만 아오키…씨, 하고 말해버렸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나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먼저 그를 알아본 내 입술을 나무라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윤오, 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는지 모른다.

“실례했습니다. 사사에 선생님,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다 기억할 수 없다. 주차장 쪽으로 가기 위해 유리문을 밀었을 때 내 얼굴로 쏟아지던 차디찬 겨울의 공기에 정신이 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보라구, 윤오, 이 정도는 추운 게 아니야. 한국에서는 겨울에 말하지 않고 있어도 하얀 입김이 끓는 주전자에서 나오는 것처럼 뿜어져 나온다니까…. 겨울 밤, 추위에 떨며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던 그에게 한 말이 왜 이런 순간에, 앞뒤도 없이, 누구에게 도움이 된다고, 떠오른단 말인가. 그가 처음 내게 입술을 가져다대던 그 순간과 우리가 헤어지기 전, 입을 꾹 다문 채로 그저 나를 바라만 보던 그의 마지막 눈동자가 이 난데없는 재회의 자리에서 떠오르면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할아버지는 말하곤 했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기적은 없다고 믿는 부류와 결국은 모든 게 기적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게 그거 아니예요? 하고 물으면 할아버지는 그런가, 하면서 웃었다. 나처럼 기적이 있다고 굳게 믿는 인간들이, 이런 기적에 가까운 일 앞에서 오히려 멍청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아야 기적인데, 나한테서 일어난다면 그게 무엇이든 기적일 수가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울음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더욱더 부자연스러워지고 굳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 전 비창 소나타의 첫 구절이 내 귀에 맴돌았던 이유가 떠올랐다. 그가 왔다. 그가 정말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일본 술은 위험하다고 타일렀지만, 한국 술이 더 세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

창을 열자 눈앞에 상심한 얼굴의 남산이 우뚝 솟아 있다. 서울 거리를 짧은 겨울의 저녁 해가 비추고 있다. 일본의 겨울풍경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르다. 하지만 처음 왔는데도 무척이나 그리운 풍경이다. 반투명한 청색 필터를 통해 바라보는 한 편의 시 같은 경치. 경험한 적 없는데 기억에 있는 풍경.

신라호텔 실내는 차분한 가구의 조도로 통일되어 있어 머리와 마음을 식히기에 좋다.

첫 취재가 시작되려면 30분 정도 시간이 있다.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홍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녀는 줄곧 내 시선에서 도망쳤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일단 방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담배를 꺼내 남산을 바라보며 한 대 피웠다. 보라색 연기가 창을 자욱하게 한다.

그날, 친구들과 공원 입구에 있는 꼬치구이집에 갔다가 카운터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홍이를 보았다. 나는 친구들 어깨 너머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홍이를 지켜보았다. 시끌벅적한 술집 안에서 홍이가 있는 곳만은 왠지 소리가 없었다. 비가 뿌리기 시작하는데 홍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들에게 급한 볼일이 생각났다고 변명을 하고는 홍이 뒤를 쫓았다. 호수 가운데쯤, 나무다리 중간에서 홍이를 따라잡아, 가지고 있던 우산을 받쳐주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어요? 하고 홍이가 중얼거렸다. 호수 수면에 부딪치는 비를 바라보며 어려운 질문인걸 하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분명 어딘가엔 있을 거야.

홍이는 빗줄기가 만들어낸 물안개 끝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게 어딘데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가 갈구하는 사랑의 크기를 아는 것이 두려웠고, 대답할 만한 여유도 그때의 내겐 없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비로부터 그녀를 지켰다.

방에 어울리지 않는 전자음이 멀리서 울리고 있다. 정신이 든 나는 창가에서 떨어져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인사말도 없이 고바야시 칸나가 도착했네 하고 말했다. 담배 끝을 재떨이에 부비며, 어, 이제 막 하고 대답을 한다.

“좀 전에 초고가 나왔는데 서둘러 봐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서.”

칸나가 말했다. 서두를 일은 없었다. 출국 전에 자세한 부분까지 모두 체크를 해두었다. 게다가 원고가 게재되는 건 다다음달이니 귀국 후에 해도 충분한 이야기였다. 건성으로 칸나의 설명을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남산이 바로 눈앞에 서 있다. 노스탤지어란 말이 딱 맞는 그리운 풍경의 파노라마. 기억을 흔들어놓는다.

홍이는, 미안하지만 난 외국 남자랑 결혼 안 해요 하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나는 우산을 들고 있던 손을 바꿔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상해요. 나 그쪽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덜컥 했어요. 왠지 그쪽을 잘 아는 것 같아서. 두 개로 쪼개진 빙하의 양쪽 단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남산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다. 남산이 내 오랜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다.

홍이는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더 엉뚱한 말을 덧붙였다.

―근데 나보고 결혼하자고 하지 말아요.

남산 저편으로 해가 저문다. 산 앞쪽은 어둑어둑한데 산의 윤곽은 석양을 받아 타들어가듯 깜박이기 시작한다. 하늘은 우주와 동화되기 시작하고, 청색에서 군청색으로 깊이를 더하고 있다. 창밖의 추위를 상상하며 나는 수화기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있는 거야?”

귓전에서 칸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래 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한다. 칸나는 업무적인 이야기를 사적인 내용으로 바꾸었다.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난 쭉 너랑 결혼하려고 생각했었어. 지금이니까 분명히 말하는 거지만.”

칸나가 이제 와서 뭘 초조해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대학시절에 나는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차였다.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그녀는 나와 결혼하려고 생각했다는 것일까.

“칸나, 가봐야겠다. 곧 취재가 시작될 거야.”

말을 끝내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트렁크를 열고 전화기를 던져 넣었다. 문득 시선이 멈추었다. 집을 나오기 전에 부적처럼 넣어온 인형-휘파람을 불고 있는 소녀인형이다. 살짝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홍이가 방에 두고 간 것이다. 그날 남겨진 건 소녀인형뿐, 나머지 한쪽의 소년인형은 어디에도 없었다. 왜 소녀만 두고 갔을까. 홍이는 언젠가는 돌아올 생각이 아니었을까 하고 난 제멋대로 해석했다.

그날 나는 홍이에게 공원 반대쪽에 있는 술집으로 가자고 했다. 친구들을 꼬치구이집에 남겨둔 채였지만, 홍이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녀는, 여느 때의 경쾌하게 달리던 씩씩한 홍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말수가 없는 나를 상대로 홍이는 무섭게 술을 마셔댔다. 일본 술은 위험하다고 타일렀지만, 한국 술이 더 세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 술집을 나온 건 한밤중이었다. 혀는 돌아가지 않았고 발도 풀려 있었다. 홍이를 부축하며 나는 그녀의 집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걸 알았다.

<열쇠는 우체통에 넣어두세요. 나는 친구 집으로 갑니다. 다음에 또 마시죠. 그리고 안심해요. 난 그쪽에게 절대로 결혼하자고 하지 않을 테니까.>

편지를 베개 맡에 남겨두고 방을 나왔다. 갈 곳은 없었다. 그날 밤은 공원에 있는 음악당 무대 위에서 노숙자들과 사이좋게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홍이의 잠든 얼굴을 가슴에 안고 나는 아침이 밝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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