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3>
언제나 부드럽던 그의 손이 그렇게
억세게 느껴졌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차가 거의 공항에 다다랐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민준이었다. “홍, 나야.” 그는 여느 때처럼 내 이름을 장난스레 불렀다. 홍,이라는 외자로 부르면 홍이,라고 부를 때와는 달리 중성적인 느낌이 있었다. 나는 내 이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민준이 나를 홍,이라고 부를 때의 그 경쾌함은 좋아하고 있었다. 복잡해지지 않고 서로 끌어당기거나 밀어내거나 해야만 하는 피곤함 같은 것이 거기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일본에서 작가가 온다면서? 방금 기획회의 끝나고 나우 리그렛 씨가 보낸 메일을 확인했어.” -어떻게 일본남자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민준의 떨리던 목소리가 오늘 그의 경쾌한 목소리에 겹쳐져 오는 듯했다. 나는 잠시 굳어졌다. “오늘만이야. 통역하는 사람이 쓰러졌대. 저녁 약속은 지키지 못할 거 같아.”
내가 출판일로 일본인을 백명쯤 만난다 해도 민준에게 부끄러울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또 대답해버리고 만 것이다. 오늘만이라고. 그러자 내가 어제 고른 트레이닝복의 연둣빛이, 기우는 오후의 노란 햇살처럼 따사로이 차 안으로 밀려드는 환영이 느껴졌다. 어쩌자고 그런 화사한 빛깔을 고르고 말았지, 하는 생각이 바보처럼 밀려왔다. 비행기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연희 과장과 나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잔 사 가지고 서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오후의 하늘은 맑았다. “실장님이 통역을 하실 정도로 일본어를 잘하시는 줄 몰랐어요… 연수 가셨던 거예요?” 이연희 과장이 딱히 할 말도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전 1년이나 학원을 다녔는데도 힘들었는데…. 아직도 막상 일본 사람 앞에 서면 말이 잘 안 나와요. 워낙 어학에 재능이 있으신가 봐요.” 이연희는 오늘따라 나의 일본어 실력에 대해 집요하다. 아니, 오늘따라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것이다. “아니에요, 내가 처음 일본에 갔을 땐, 말을 알아들을 수도 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우선 낯익은 맥도널드에 들어갔죠. 춥고 배고파서 커피랑 빵을 좀 먹으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래서 묻는 말에 하이, 하이, 우리말로 네, 네, 대답했는데 내 손에 커다란 빅맥이 놓여져 있지 않겠어요? 이걸 어떻게 다 먹나 싶었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나왔죠.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공원에 앉아 혼자서 그걸 먹는데, 내 주변의 노숙자들이 다 날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다음날 다시 맥도널드에 가서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묻는 말에 어제와는 반대로 이이에, 이이에, 우리말로 아니요, 아니요, 했죠. 근데 내 손에 또 빅맥이 들려져 있는 거예요.” 이연희 과장이 까르르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 노숙자들 좀 나누어 주시지 그랬어요? 근데 어느 공원이었어요? 도쿄?”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그건 이노가시라 공원이라고, 우리말로 치면 우물의 머리라는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공원이었다고, 선배 언니가 그 근처에 살던 곳이라서 무작정 따라갔는데 뜻밖에도 도쿄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거지 중의 하나인 곳이었다고 대답하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피아노 선율 같은 것이 들려왔다. 물론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환청이었다. 띠리리리리 라라 라라… 그걸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노가시라 공원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같기도 하고, 사슴떼가 야트막한 언덕을 빠르게 질주하는 소리 같기도 한…. 나는 잠시 내 환청을 믿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이 소리는 그가 아침마다 듣던 피아노 소리, 그의 엄마가 연주회에서 치던 피아노 소리…. 그가 내 손을 억세게 이끌고 그의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었다. 언제나 부드럽던 그의 손이 그렇게 억세게 느껴졌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후로 오래도록 그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순간에는 이 환청을 들었었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었지만, 말해도 믿어줄 사람도 없고 실은 나 혼자 우스워지고 말겠지만, 누구에게든 하나쯤은 있는 그런 간절한 징크스라고나 할까. 사사에 선생님께서 저기 오시네요, 과장이 꽃다발을 든 채로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소설 같은 걸 쓰는거야” 공항 건물 밖으로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영하 10도의 추위와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출판사에서 준비한 밴에 올라탔다. 옆에 홍이가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나는 다른 때보다 더 말이 없어졌다. 말이란 언제나 오해를 낳는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말이 두려웠다. 상대방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벅찬 일이었다. 정색을 하고 논쟁하는 사람들을 항상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실 없는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쪽이 훨씬 힘 있다고 유치하게도 믿고 있었다. 그날, 홍이는 내게 말했다. -윤오는 어째서 자기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 거야? 한국 남자들은 확실하게 말을 해. 일본에서는 말 없는 것이 남자의 미덕인지 몰라도, 아무 말도 안 하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도 있는 거야. 윤오란 준고(潤吾)를 한국식으로 부른 것이고, 나는 반대로 홍이를 일본식으로 불렀다. -베니(紅), 나는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소설 같은 걸 쓰는 거야. 그렇지, 하고 홍이는 어깨를 들썩여보였지만,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언제나 우리들의 논쟁 아닌 논쟁은 싱겁게 끝을 맺고 말았다. 지금 옆에 앉아 있는 홍이에게 뭔가 말을 걸어야 한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 필요하다. 7년이란 세월이 방해를 한다. 입은 무겁게 닫힌 채 갑갑하리만큼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모른다. 차가 서울 시내로 들어왔을 때, 차가운 하늘 아래서 속력을 다해 달리는 여자를 발견했다. 정체 때문에 서행하고 있는 자동차 옆을 여자는 경쾌하게 달려 지나갔다. 예전의 홍이 모습을 떠올린다. 그날, 나는 이노가시라 공원 호수 주변을 걷고 있었다. 벚꽃이 지고 공원에는 무성해진 파란 잎들이 웃고 있었다. 봄날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 나는 상쾌한 바람과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멀리서 분명 나를 향해 달려오는 여자가 있었다. 한 달 전 나무 다리 위에서 이야기를 나눈 한국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홍이는 이미 내 앞에 와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고는, 이거 받으세요 하며 막힘 없이 말했다. 그녀가 내민 건 지난번 다리 위에서 내가 주워준 휘파람 부는 소년인형이었다. “받아도 돼요?” 홍이는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죠? 쓸쓸할 때 이걸 보고 있으면 기운이 나요. 당신이 곁에 두고 봤으면 좋겠어요.” 휘파람을 부는 소년이 내 손 위에서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지난번에 너무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요.” 칸나에게 막 차였을 때였다. 난 짚이는 데가 있어 웃음으로 그 자리를 얼버무렸다. 그녀의 웃는 얼굴과 왠지 헤어지기가 싫어 나는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홍이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고마워요, 신난다 하며 티없이 밝게 웃었다. 지금, 빛은 내 손목을 차고 오른다. 내가 앉은 조수석 쪽으로 빛이 스며들어, 운전석 쪽은 반대로 깊이 그늘져 있다. 몰래 홍이를 훔쳐본다. 홍이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옆얼굴은 빛이 차단되어 어둡다. 환영일까 하고 자문해본다. 여기 있는 홍이는 한강의 용이 보여주는 환영일까? 그날, 나는 홍이와 공원 입구에 있는 꼬치구이집에 지금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게 안은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우리는 자주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와 홍이는 서로 귀를 기울여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일본어, 그리고 필요한 최소한의 일본어. 그래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아직 실연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나는 옆에 있는 홍이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칸나를 생각했다. 칸나가 아닌 것은 알지만, 어깨가 부딪칠 때마다 추억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때마다 맥주를 위로 흘려보내 조바심을 달래야 했다. 홍이는 소꿉친구이자, 함께 성당에 다닌다는 남자친구 이야기를 했다. 나는 거기에 대항이라도 하듯 고바야시 칸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쓸데없는 것까지 이야기를 하고 만다. 홍이가 외국인이어서 둘 사이에 경계할 것이 없으므로 서로의 현실을 솔직히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차인 이유를 묻기에 상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대답했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내가 미덥지가 못하다는군.” 왜 차였는지 이유는 몰랐다. 일방적인 결별 선언에 나는 격분했었다. 제멋대로라고 칸나에게 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가슴이 죄어와 고개를 떨군 나날을 보냈다. 난 우리가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완벽한 연인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칸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연희씨가 몸을 돌려 홍이에게 뭐라고 말을 한다. 홍이가 기계적으로 저기가 남산이에요 하며 창 밖을 가리키며 통역을 한다. 웅장한 산이 차의 진행 방향을 막고 서 있다. -베니, 너는 어째서 지금 여기 있는 거니? 하려던 말을 삼켰다. 몸을 구부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남산을 올려다보며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몰래 한숨을 토해냈다. 자동차가 조용히 신라호텔 앞 로터리로 미끄러져 들어가 회전문 앞에 섰다. 도어맨이 달려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어오자 기억들이 차례차례 얼어붙어갔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억세게 느껴졌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차가 거의 공항에 다다랐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민준이었다. “홍, 나야.” 그는 여느 때처럼 내 이름을 장난스레 불렀다. 홍,이라는 외자로 부르면 홍이,라고 부를 때와는 달리 중성적인 느낌이 있었다. 나는 내 이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민준이 나를 홍,이라고 부를 때의 그 경쾌함은 좋아하고 있었다. 복잡해지지 않고 서로 끌어당기거나 밀어내거나 해야만 하는 피곤함 같은 것이 거기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일본에서 작가가 온다면서? 방금 기획회의 끝나고 나우 리그렛 씨가 보낸 메일을 확인했어.” -어떻게 일본남자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민준의 떨리던 목소리가 오늘 그의 경쾌한 목소리에 겹쳐져 오는 듯했다. 나는 잠시 굳어졌다. “오늘만이야. 통역하는 사람이 쓰러졌대. 저녁 약속은 지키지 못할 거 같아.”
내가 출판일로 일본인을 백명쯤 만난다 해도 민준에게 부끄러울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또 대답해버리고 만 것이다. 오늘만이라고. 그러자 내가 어제 고른 트레이닝복의 연둣빛이, 기우는 오후의 노란 햇살처럼 따사로이 차 안으로 밀려드는 환영이 느껴졌다. 어쩌자고 그런 화사한 빛깔을 고르고 말았지, 하는 생각이 바보처럼 밀려왔다. 비행기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연희 과장과 나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잔 사 가지고 서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오후의 하늘은 맑았다. “실장님이 통역을 하실 정도로 일본어를 잘하시는 줄 몰랐어요… 연수 가셨던 거예요?” 이연희 과장이 딱히 할 말도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전 1년이나 학원을 다녔는데도 힘들었는데…. 아직도 막상 일본 사람 앞에 서면 말이 잘 안 나와요. 워낙 어학에 재능이 있으신가 봐요.” 이연희는 오늘따라 나의 일본어 실력에 대해 집요하다. 아니, 오늘따라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것이다. “아니에요, 내가 처음 일본에 갔을 땐, 말을 알아들을 수도 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우선 낯익은 맥도널드에 들어갔죠. 춥고 배고파서 커피랑 빵을 좀 먹으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래서 묻는 말에 하이, 하이, 우리말로 네, 네, 대답했는데 내 손에 커다란 빅맥이 놓여져 있지 않겠어요? 이걸 어떻게 다 먹나 싶었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나왔죠.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공원에 앉아 혼자서 그걸 먹는데, 내 주변의 노숙자들이 다 날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다음날 다시 맥도널드에 가서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묻는 말에 어제와는 반대로 이이에, 이이에, 우리말로 아니요, 아니요, 했죠. 근데 내 손에 또 빅맥이 들려져 있는 거예요.” 이연희 과장이 까르르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 노숙자들 좀 나누어 주시지 그랬어요? 근데 어느 공원이었어요? 도쿄?”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그건 이노가시라 공원이라고, 우리말로 치면 우물의 머리라는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공원이었다고, 선배 언니가 그 근처에 살던 곳이라서 무작정 따라갔는데 뜻밖에도 도쿄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거지 중의 하나인 곳이었다고 대답하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피아노 선율 같은 것이 들려왔다. 물론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환청이었다. 띠리리리리 라라 라라… 그걸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노가시라 공원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같기도 하고, 사슴떼가 야트막한 언덕을 빠르게 질주하는 소리 같기도 한…. 나는 잠시 내 환청을 믿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이 소리는 그가 아침마다 듣던 피아노 소리, 그의 엄마가 연주회에서 치던 피아노 소리…. 그가 내 손을 억세게 이끌고 그의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었다. 언제나 부드럽던 그의 손이 그렇게 억세게 느껴졌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후로 오래도록 그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순간에는 이 환청을 들었었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었지만, 말해도 믿어줄 사람도 없고 실은 나 혼자 우스워지고 말겠지만, 누구에게든 하나쯤은 있는 그런 간절한 징크스라고나 할까. 사사에 선생님께서 저기 오시네요, 과장이 꽃다발을 든 채로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소설 같은 걸 쓰는거야” 공항 건물 밖으로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영하 10도의 추위와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출판사에서 준비한 밴에 올라탔다. 옆에 홍이가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나는 다른 때보다 더 말이 없어졌다. 말이란 언제나 오해를 낳는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말이 두려웠다. 상대방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벅찬 일이었다. 정색을 하고 논쟁하는 사람들을 항상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실 없는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쪽이 훨씬 힘 있다고 유치하게도 믿고 있었다. 그날, 홍이는 내게 말했다. -윤오는 어째서 자기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 거야? 한국 남자들은 확실하게 말을 해. 일본에서는 말 없는 것이 남자의 미덕인지 몰라도, 아무 말도 안 하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도 있는 거야. 윤오란 준고(潤吾)를 한국식으로 부른 것이고, 나는 반대로 홍이를 일본식으로 불렀다. -베니(紅), 나는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소설 같은 걸 쓰는 거야. 그렇지, 하고 홍이는 어깨를 들썩여보였지만,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언제나 우리들의 논쟁 아닌 논쟁은 싱겁게 끝을 맺고 말았다. 지금 옆에 앉아 있는 홍이에게 뭔가 말을 걸어야 한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 필요하다. 7년이란 세월이 방해를 한다. 입은 무겁게 닫힌 채 갑갑하리만큼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모른다. 차가 서울 시내로 들어왔을 때, 차가운 하늘 아래서 속력을 다해 달리는 여자를 발견했다. 정체 때문에 서행하고 있는 자동차 옆을 여자는 경쾌하게 달려 지나갔다. 예전의 홍이 모습을 떠올린다. 그날, 나는 이노가시라 공원 호수 주변을 걷고 있었다. 벚꽃이 지고 공원에는 무성해진 파란 잎들이 웃고 있었다. 봄날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 나는 상쾌한 바람과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멀리서 분명 나를 향해 달려오는 여자가 있었다. 한 달 전 나무 다리 위에서 이야기를 나눈 한국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홍이는 이미 내 앞에 와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고는, 이거 받으세요 하며 막힘 없이 말했다. 그녀가 내민 건 지난번 다리 위에서 내가 주워준 휘파람 부는 소년인형이었다. “받아도 돼요?” 홍이는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죠? 쓸쓸할 때 이걸 보고 있으면 기운이 나요. 당신이 곁에 두고 봤으면 좋겠어요.” 휘파람을 부는 소년이 내 손 위에서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지난번에 너무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요.” 칸나에게 막 차였을 때였다. 난 짚이는 데가 있어 웃음으로 그 자리를 얼버무렸다. 그녀의 웃는 얼굴과 왠지 헤어지기가 싫어 나는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홍이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고마워요, 신난다 하며 티없이 밝게 웃었다. 지금, 빛은 내 손목을 차고 오른다. 내가 앉은 조수석 쪽으로 빛이 스며들어, 운전석 쪽은 반대로 깊이 그늘져 있다. 몰래 홍이를 훔쳐본다. 홍이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옆얼굴은 빛이 차단되어 어둡다. 환영일까 하고 자문해본다. 여기 있는 홍이는 한강의 용이 보여주는 환영일까? 그날, 나는 홍이와 공원 입구에 있는 꼬치구이집에 지금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게 안은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우리는 자주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와 홍이는 서로 귀를 기울여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일본어, 그리고 필요한 최소한의 일본어. 그래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아직 실연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나는 옆에 있는 홍이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칸나를 생각했다. 칸나가 아닌 것은 알지만, 어깨가 부딪칠 때마다 추억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때마다 맥주를 위로 흘려보내 조바심을 달래야 했다. 홍이는 소꿉친구이자, 함께 성당에 다닌다는 남자친구 이야기를 했다. 나는 거기에 대항이라도 하듯 고바야시 칸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쓸데없는 것까지 이야기를 하고 만다. 홍이가 외국인이어서 둘 사이에 경계할 것이 없으므로 서로의 현실을 솔직히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차인 이유를 묻기에 상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대답했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내가 미덥지가 못하다는군.” 왜 차였는지 이유는 몰랐다. 일방적인 결별 선언에 나는 격분했었다. 제멋대로라고 칸나에게 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가슴이 죄어와 고개를 떨군 나날을 보냈다. 난 우리가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완벽한 연인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칸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이연희씨가 몸을 돌려 홍이에게 뭐라고 말을 한다. 홍이가 기계적으로 저기가 남산이에요 하며 창 밖을 가리키며 통역을 한다. 웅장한 산이 차의 진행 방향을 막고 서 있다. -베니, 너는 어째서 지금 여기 있는 거니? 하려던 말을 삼켰다. 몸을 구부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남산을 올려다보며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몰래 한숨을 토해냈다. 자동차가 조용히 신라호텔 앞 로터리로 미끄러져 들어가 회전문 앞에 섰다. 도어맨이 달려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어오자 기억들이 차례차례 얼어붙어갔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