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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2>

등록 2005-10-13 15:18수정 2005-10-13 15:18

먼하늘가까운바다 <2>
먼하늘가까운바다 <2>
내가 준, 하고 입을 떼면 그가, 아무리 먼 데 있어도 내 목소리를 들어벌리것만 같았다

나는 검정 계통의 바지 정장을 입고 집을 나섰다. 날은 아주 추웠다. 막 퍼지는 햇살 아래 누워 있던 번개가 내 기척에 조용히 눈을 뜨다가 감았다. 추위에 강한 털, 잘 말아 올라간 꼬리, 힘있게 서 있는 귀. 시베리아에서 썰매를 끄는 러시아 개처럼 번개도 눈과 비와 바람을 견딜 수 있는 치밀한 속털을 가지고 있는 풍산개였다. 7년 만에 내가 돌아왔을 때 진돗개였던 미루 대신 우리 마당을 차지한 번개에게 아직 곁을 주지 않고 있었다.

주차장까지 짧은 거리를 걸어갔을 뿐인데도 벌써 코가 매웠다. 얼음덩어리 같은 내 차에 올라탔을 때 다시금 오한처럼 아찔한 기억들이 몰려들었다. 이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7년 만에 일본어를 쓴다는 것이 내게 이렇게 많은 생각들을 한꺼번에 가져다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 마음속에는 오래된 호리병이 하나 놓여 있다. 그 호리병 속에는 머리카락이 아직도 싱싱했던 스물두 살의 베니, 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살고 있을 것이었다. 살고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그 뚜껑을 한 번도 열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소녀는 오래된 동화의 그 거인처럼 처음에는 그 뚜껑을 열어주는 사람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했겠지만 지금은 아마도 그 뚜껑을 여는 사람을 파괴해버릴 결심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김포예요. 인천이 아니라, 나리타가 아니라 하네다에서 오시니까.”

일본 소설을 담당하고 있는 이연희 과장이 말했다. 그 작가 이름이 뭐야? 내가 심드렁하게 묻자 이연희는 사사에 히카리예요, 하더니, 전 처음에 이름이 예뻐서 여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실은 얼굴도 예뻐요. 남자치고 그렇다구요, 하고 웃었다. 사사에 히카리.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라는 작품으로 일본의 N문학상 수상 …. 나는 기획안을 대충 훑으며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밴에 올라탔다. 겨울 한강은 아름다웠다. 물빛은 하늘을 따라 푸르렀고 간간히 커다란 날개를 펴고 낙하하는 겨울 새들이 보였다. 이렇게 길고 넓은 강을 따라 공항으로 가는 길을 가진 나라가 또 있을까, 하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만일 비행기가 인천으로 내린다면 이 강이 다다르고야 마는 바다까지 볼 텐데 싶어 조금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해 김포에 내렸을 때 뜻밖에도 동생 록(綠)이와 민준이 날 마중 나와 있었다. 꽃다발을 내밀며 민준이 내게 홍, 무사한 귀환을 축하해, 했다. 그의 목소리는 늘 경쾌한 ‘미’였다. 미, 파, 솔의 건반만 있다면 그의 목소리를 다 묘사해낼 수가 있다. 화가 났을 때는 낮은 옥타브의 라나 솔이 된다. 홍,이라는 명랑한 발음으로 나를 맞는 민준을 나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민준의 얼굴은 그로부터 6개월 후, 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라고 묻던 그의 얼굴과 언제나 오버랩된다.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야, 라고 내가 말을 꺼냈을 때, 그가 짓던 그 참담한 표정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내가 한참을 입술을 물고 있다가 대답하자, 그가 말했었다.

대답하지 말지 그랬니.

공지영
공지영
우리가 그러니까, 결혼하기로 약속한 애인이었던 것은 아니잖아, 하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 후 그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버렸을 때, 거기서 어떤 여자와 약혼을 할 거라고 엄마가 한숨 쉬며 내게 소식을 전했을 때도 나는 그 생각을 했다. 5년 후 다시 돌아온 민준은 미국에서 한 약혼은 취소되었다고 말했다. 무엇 때문인줄 아니, 하고 그가 물을까봐 나는 무서웠다. 늦은 저녁 우리 집 앞에 나를 데려다주면서 그는 손을 내밀어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을 다시 잡아야 할지 어떨지 망설이는 나에게 그는, 좋은 친구로서, 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미국에서 약혼을 파기한 일이 속상했고 또 고마웠다. 그 모순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는 모두 민준을 아주 어릴 때부터 그냥, 준이라고 불렀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피해왔다. ‘준’이라는 글자는 차마 내 입으로 호칭할 수 없는 듯했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준, 하고 입을 떼면 그가, 아무리 먼 데 있어도 내 목소리를 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는 그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소녀는 이제 호리병에 갇혀서 제 지난날을 후회로 짓이기고 있을 것이다.


아니다, 이연희 과장이 들고 있는 백합의 흰 꽃다발을 보아서라도 이런 생각은 그만해야 했다. 오늘만이야, 하고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한국에는 이런말이 있어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이제껏 기적이라든지 우연이란 말을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면 놀라움에 앞서 사고가 정지되고 만다. 홍이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무슨 말을 한다. 당황한 홍이가 일본어로,

“아오키 씨?”

하고 작은 소리로 묻는다. 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메모를 훔쳐보고는 고쳐 말한다.

“실례했습니다. 사사에 선생님,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사에 히카리는 내 필명이다. 본명인 아오키 준고(靑木潤吾)는 공표하지 않았다.

“저는 이번에 통역을 맡은 최홍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선생님의 담당편집자인 이연희 씨입니다.”

홍이가 약간 고개를 숙이고 말하자, 꽃다발을 내민 내일출판사 편집자 이연희가 서툰 일본어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고 인사한다.

나는 꽃다발을 받고도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재회에 동요한 나머지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작게 숙이고 백합 꽃다발을 가슴에 안았다.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하얀 옷을 즐겨 입던 홍이는 지금 검정색의 성숙한 복장을 하고 내 앞에 서 있다. 그 시선에서는 예전의 상냥함을 찾을 수가 없고, 어딘가 차갑고 무표정해 어색하기만 하다. 기적적인 재회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 어떤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는 걸까.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주어진 것일까? 아니면 결정적인 이별을 예고하는 전조일까?

그날, 나는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커다란 실연의 아픔을 짊어지고 고개를 떨군 날들을 지내고 있었다. 수업을 빠지고 공원을 거닐며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려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노가시라 공원의 벚꽃이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활짝 핀 꽃잎이 눈처럼 날리던 날이었다.

아이들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보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흰옷에 훌쩍 큰 키 때문에 눈에 띄었다. 사내아이 하나가 홍이와 부딪쳐 그녀가 들고 있던 뭔가를 떨어뜨렸다. 모든 것이 순간의 일이었지만, 나는 그때 두 사람 사이에서 춤을 추며 흩날리던 벚꽃의 우아한 움직임과 소년들의 웃음소리, 홍이의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 불어오는 바람 냄새, 나무다리 위에 굴러떨어진 휘파람 부는 소년인형 등을 기억한다. 나는 얼른 인형을 주워 흰 옷을 입은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다른 한쪽 ― 소녀인형 곁으로 소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왔다.

“다행이에요, 상하지 않아서. 정말 애교 있는 귀여운 인형인데요!”

홍이는 한 쌍의 인형을 손으로 감싸고는 이거 닥종이인형이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형이에요, 하고 말했다. 나는 당황해 아, 일본사람이 아니군요, 하고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홍이는,

“일본사람이 아니면 안 되나요?”

하고 되물었다. 당황한 내가 고개를 젓자 홍이 얼굴이 한순간에 봄처럼 꽃을 피웠다.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실연으로 쓰라리던 마음이 순간 위로되었다.

낮게 드리운 구름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던 벚꽃이 바람이 일자 꽃보라를 만들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벚꽃 예쁘죠? 라고 자랑을 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홍이가 말했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한국에서 왔군요.”

빤히 들여다보는 눈길이 당황스러웠다. 불순하게도 입맞추는 순간이 연상되어 동요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살아요? 아니면 여행?”

“모르겠어요. 살아야 하는지 스쳐지나가야 하는지, 여기가 좋아질지 아닐지도 ….”

그녀가 말하는 일본어에는 억양이 없었다. 일부러 의식하고 악센트를 지운 거란 걸 나중에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작은 소리로 떠듬떠듬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다. 서툰 일본어는 오히려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세심히 단어를 고르면서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홍이 모습에 끌렸다. 하지만 그건 일본인인 나의 일방적인 오해로 그녀는 그저 최선을 다해 말을 엮어내는 것뿐이었다. 어학실력이 향상됨에 따라 홍이의 일본어는 속도와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는 첫인상과는 다른 건강한 일본어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말과 함께 소녀는 지기 싫어하고 씩씩한 한 여성으로 내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언제나 첫인상만큼 믿지 못할 것도 없다.

“스쳐지나갈 건지 머무를 건지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홍이는 그때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단어들을 엮어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똑바로 쳐다볼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지금 생각한 건데 어쩌면 사는 쪽으로 결정할지도 모르겠어요.”

쓰지 히토나리
쓰지 히토나리
우리는 함께 잠시 벚꽃을 바라보다 헤어졌다. 또 만날 수 있겠죠 하고 내가 말하자, 홍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금은 갈색빛이 도는 윤기 있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자 지적인 이마가 드러났다. 넓은 이마 밑의 정렬적인 눈동자는 세상의 빛을 빨아들여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지금 나는 같은 눈동자를 훔쳐보며, 한번 더 이 눈동자에 그날과 같은 눈부신 빛이 깃들게 할 수는 없을까 기원한다. 시선을 비키며 걷기 시작한 홍이는 과거를 완전히 잘라내버린 전혀 딴사람이다. 그날의 빛나던 눈동자는 거기에 없다. 그녀는 이미 다른 세상 속에서 다른 누군가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사는 것이 틀림없다.

기적적인 재회에 흥분하고 있는 나를 타이를 필요가 있었다. 마음의 지평에는 웅장한 한강과 같은 7년이란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최홍의 현재를 방해할 권리가 내겐 없었다.

“선생님, 가시죠.”

먼저 앞서 걸어가는 통역자를 곤혹스러워하며 편집자가 송구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백합 꽃다발을 안고 발을 뗄 수가 없어 그저 옛 연인인 홍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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