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하늘가까운바다 <1>
한국과 일본의 인기 작가인 공지영씨와 쓰지 히토나리의 합동소설을 연재한다. 한·일 두 나라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축으로 삼아 두 나라 관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울러 조감할 <먼 하늘 가까운 바다>는 당분간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두 차례씩 실린다. 두 작가는 동일한 스토리를 각각 남녀 주인공의 시점에서, 각자의 문학적 특징을 살리면서 써 나감으로써 같지만 다른 두 편의 소설을 완성시킬 예정이다.
감기의 첫 징후처럼 코끝이 약간 매웠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연둣빛 트레이닝 복을 한 벌 샀다. 거의 옐로에 가까운 그린 빛이다. 퇴근하는 길에 지희랑 종로의 이태리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조금 일찍 도착한 김에 가까운 지하 아케이드를 둘러보다가 그 눈부신 연둣빛을 발견했다. 꼭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그만 그 연둣빛에 끌리듯 다가가 그것을 만지고야 말았다. 만지지 마시고 보기만 하세요, 라고 분명 써 있었는데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무채색 겨울 들판 구석에 혼자 핀 아기 민들레의 새싹 같은 빛이었다. 더구나 순면 소재의 타월 같은 감촉이 아주 좋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보송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톡, 톡 베이비 파우더를 바르면 느껴지는 그런 산뜻한 느낌이 그 옷에는 있었다. 나는 내가 그 옷집의 금기를 깨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연둣빛은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주인이 팔짱을 끼고 다가와 으흥, 하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옷 한 벌 샀어, 하자 지희는 내가 산 그 트레이닝 복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야, 이제 홍이한테도 봄날이 오나 보다, 했다. 무슨 소리야, 하고 내가 물으니까, 너 이제 이런 상복 좀 벗어버려, 하면서 내 진회색 수트를 직접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서야 늘 지희가 나보고 제발 이런 칙칙한 검정이나 회색 혹은 진한 보라색 옷은 입지 말라고 타박을 주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만져버렸어, 그래서 그냥 산 거야. 트레이닝 복 한 벌 사는 데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나 오늘 해물 리소토 먹을래, 하고 서둘러 말했다. 그날 아침 나는 그 트레이닝 복을 꺼내 들었다. 오늘은 기획회의가 좀 미뤄지게 되어서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뛰고 출근을 하려던 것이었다. 연둣빛 트레이닝 복만 입고 나서기에는 좀 추울 테니까 카키색 오리털 파카를 걸치고 검정 털모자를 뒤집어 쓰고 뛰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식탁에서 아버지는 뜻밖에도 나보고 공항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요즘 심혈을 기울여 출판한 일본의 젊은 작가가 온다는 말을 회의 시간에 들었던 생각이 났다. 그건 우리 부서의 일은 아니었지만 명색이 기획실장인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입맛이 없어서 플레인 요구르트에 키위를 잘게 자른 것을 좀 집어넣어 먹으려던 참이었다. “글쎄 오늘 통역을 해주려던 후나 선생이 쓰러졌단다. 지난번에 보니까 다이어트 한다고 밥을 새 모이처럼 조금 먹는 거, 그거가 원인인 것 같아….” 전화는 아버지가 받았고 지시도 아버지가 내려야 하는데 엄마는 이미 통역자의 병의 원인까지 추리해내고 있었다.
■ 공지영
1963년 서울태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1998년 <창작과 비평> 등단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별들의 들판> 등
장편 <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 '21세기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등 수상 나보고 통역을 하라고? 하는 얼굴로 나는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그래, 오늘만이다, 하고 말하면서 얇은 햄을 끼운 빵을 입 속으로 밀어 넣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아빠, 나 일본말, 얼마나 하기 싫어하는지 아시잖아요, 엄마만 아니었다면, 아침만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난데없이 이노가시라 공원의 벚꽃이 일제히 떨어지는 기억이 났다. 눈보라처럼, 부드러운 눈보라처럼, 그 부드러움으로 나를 길 잃게 만들었던 그 베이비 파우더 빛깔의 부드러운 흰빛들. 나로서도 난데없는 기억이었다. 감기의 첫 징후처럼 코끝이 약간 매웠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내가 잠시 흰 플레인 요구르트가 든 접시를 휘저으며 아찔해하자 엄마가 또 한마디 거들었다. “거봐, 너도 다이어트 한다고 매일 밥도 안 먹고 뛰기만 하니까… 큰일이다.” “말하지 않은 지 칠년이에요. 저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오늘만이다, 내 말을 자르며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식탁에서 일어나셨다. 오늘만이라는데, 통역자가 쓰러졌다는데, 왜 무리한 다이어트를 했느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민준과의 저녁 약속을 취소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나는 메일로 간단하게 사연을 알리려고 내 아이디를 입력했다. 나우 리그렛…. 민준이 물었다, 네 아이디 무슨 뜻이야? 지금 후회한다는 그 영어 말하는 거야? 그런가? 하며 나는 휘파람을 부는 척했었다. 후회하니? 하고 누가 물을까봐 겁이 났었나보다. 약속을 다음날로 연기하자는 메일을 쓰고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지희의 말처럼 옷장 안은 온통 무채색 빛깔의 옷들로 가득했고 그 밑바닥에 혼자 연둣빛 트레이닝 복이 놓여 있었다.
평생 걸려도 풀 수 없는 올가미 속에 나와 홍이가 있다 눈 아래 펼쳐진 서울의 조감도는 정밀한 반도체 기판(基板), 마치 일렉트로닉IC의 미래도시를 연상케 한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도시는 훨씬 거대하고 그 중심을 좌우로 흐르는 한강은 마치 에너지를 이동시키는 대동맥 같다. 출국 직전 칸나는 내 등에 대고는, 그 사람 만날 거지 하고 참고 있던 말을 터뜨렸다. 내 머릿속에 그 사람의 고개 숙인 듯한 얼굴이 되살아난다. 태양이 구름 사이사이로 얼굴을 내밀자 기판인 도시에 갑자기 활기가 넘친다. 한강 수면이 예리하게 반사된 순간, 나는 거기에서 수천 년의 역사를 살아온 한 마리 용을 보았다. 그날, 마음의 벽에 후회라는 상처를 새겼다. 그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바라보며 7년을 보냈다. 그런 내게 그 사람이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 방문은 마음 편한 여행이라 할 수 없다.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기내에서 밀려오는 후회로 마음도 영혼도 함께 흔들렸다. 한강이 다시 반짝인다. 나도 모르게 이마를 창에 댄다. 내뿜는 김에 창이 뿌옇게 된다. 지금이란 시간은 홍이와 헤어진 순간에 멈춘 채 오늘까지 연연히 이어진 시간의 쇠사슬이 만들어낸 매듭이다. 이 짧은 여행 중에 나는 그 매듭을 풀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평생 걸려도 풀 수 없는 올가미 속에 나와 홍이가 있다. 그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서울을 찾아, 같은 하늘 아래에서 그녀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다. “거짓말. 그 사람 잊지 못했으면서.” 칸나의 목소리는 진실을 꿰뚫는다. 도대체 누가 후회란 말을 만들었을까. 신은 사람에게 후회하게 하여 뭘 배우게 하려는 것일까. 무겁게 짓눌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등에 지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날, 홍이와 나는 이노가시라 공원 호수에 놓인 다리 중간에서 만났다. 몇 초였을까, 시간의 쇠사슬이 우리를 옭아매었다. 크게 뜬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바라보았을까. 그리고 또 어느 날 홍이는 새하얀 티셔츠에 트레이닝 복을 입고 이노가시라 공원 호숫가를 달리고 있었다. 빛나는 수면보다 더 하얗고,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빨리. 나는 멀리 낙엽이 깔린 숲 기슭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쓰지 히토나리
1959년 도쿄태생
1989년 처녀작 <피아니시모>로 '스바루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1997년 <해협의 빛>으로 아쿠타가와상 수상
1999년 <백불> (흰부처)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프랑스 굴지의 가오리와 함께 작업한 <냉정과 열정사이>등이 국내에서도 소개됨 그리고 이별이 가까워지던 날, 홍이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내게 소리를 쳤다. 이상하게도 그 기억만큼은 소리가 없다. 물 소리도 바람 소리도 웃음소리도 거리의 소리도 아무것도 없다. 나를 향해 항의하는 그녀의 붉어진 얼굴만이 마음속 화면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날, 나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줄곧 그녀가 돌아오기를,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돌아올 것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지금 나는 햇빛 찬란한 서울 거리를 홍이의 웃는 얼굴과 겹쳐 바라본다. 건물의 형태나 거리 모습이 점점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되자, 긴장한 내 몸이 굳어간다. 한국어 안내방송이 흐른다. 리드미컬하고 음악 같은 외국어. 그때 홍이는 좀처럼 내 앞에서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어리석게도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기내에 겨울 햇살이 스며든다. 비행기의 선회에 따라 빛줄기가 7년이란 세월을 되돌아보듯 기내를 가로지른다. 빛의 자락을 찾아 창밖을 내다본다. 태양과 시선이 부딪친다. 비쳐든 햇살에 눈이 부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만다. 감은 눈 뒤편에 그저 아무 말 없이 달리는 하얀 옷의 그녀, 최홍이 있다. 어째서 홍이는 그렇게 달려야만 했을까.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어째서 홍이의 외로움을 좀 더 이해해주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녀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없었을까. 착륙하는 순간 기체가 흔들렸다. 서울에 도착했다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네다를 출발해 겨우 두 시간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시차도 없다. 7년 동안, 어째서 나는 서울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혹은 너무 가까운 나라여서. “준고는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날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 거잖아. 난 그 사람이 미워. 아직도 네 마음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사람이.” 칸나는 가끔 내게 잔소리를 한다. 나는 이미 지난일이라 되풀이한다. 그래 모든 게 이미 늦은 옛날 이야기다. 성급한 승객들이 통로에 늘어서기 시작하지만 나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어?” 연신 내리는 빗속에서 홍이와 나는 우산 속에 갇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 어려운걸. 하지만 분명 어딘가엔 있을 거야.” 홍이는 이노가시라 공원 호수 수면을 바라보며, 어딘가에? 그게 어딜까?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어딘가지, 하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수면에는 빗방울이 만드는 무수한 원들이 만들어졌다 금방 사라져갔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도착 로비로 발을 옮겼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현대적인 로비의 눈부신 공간 끝에서 시선이 매듭을 만든다. 갑자기 소리가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기억이 순식간에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모세가 바다를 둘로 나눈 것처럼 시야를 가르는 길이 생기더니, 그 끝에 홍이가 서 있다. 우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움켜쥔 채 서로 아무 말 없이 그저 멍하니 한강의 용이 가져다준 기적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연둣빛 트레이닝 복을 한 벌 샀다. 거의 옐로에 가까운 그린 빛이다. 퇴근하는 길에 지희랑 종로의 이태리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조금 일찍 도착한 김에 가까운 지하 아케이드를 둘러보다가 그 눈부신 연둣빛을 발견했다. 꼭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그만 그 연둣빛에 끌리듯 다가가 그것을 만지고야 말았다. 만지지 마시고 보기만 하세요, 라고 분명 써 있었는데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무채색 겨울 들판 구석에 혼자 핀 아기 민들레의 새싹 같은 빛이었다. 더구나 순면 소재의 타월 같은 감촉이 아주 좋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보송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톡, 톡 베이비 파우더를 바르면 느껴지는 그런 산뜻한 느낌이 그 옷에는 있었다. 나는 내가 그 옷집의 금기를 깨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연둣빛은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주인이 팔짱을 끼고 다가와 으흥, 하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옷 한 벌 샀어, 하자 지희는 내가 산 그 트레이닝 복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야, 이제 홍이한테도 봄날이 오나 보다, 했다. 무슨 소리야, 하고 내가 물으니까, 너 이제 이런 상복 좀 벗어버려, 하면서 내 진회색 수트를 직접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서야 늘 지희가 나보고 제발 이런 칙칙한 검정이나 회색 혹은 진한 보라색 옷은 입지 말라고 타박을 주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만져버렸어, 그래서 그냥 산 거야. 트레이닝 복 한 벌 사는 데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나 오늘 해물 리소토 먹을래, 하고 서둘러 말했다. 그날 아침 나는 그 트레이닝 복을 꺼내 들었다. 오늘은 기획회의가 좀 미뤄지게 되어서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뛰고 출근을 하려던 것이었다. 연둣빛 트레이닝 복만 입고 나서기에는 좀 추울 테니까 카키색 오리털 파카를 걸치고 검정 털모자를 뒤집어 쓰고 뛰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식탁에서 아버지는 뜻밖에도 나보고 공항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요즘 심혈을 기울여 출판한 일본의 젊은 작가가 온다는 말을 회의 시간에 들었던 생각이 났다. 그건 우리 부서의 일은 아니었지만 명색이 기획실장인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입맛이 없어서 플레인 요구르트에 키위를 잘게 자른 것을 좀 집어넣어 먹으려던 참이었다. “글쎄 오늘 통역을 해주려던 후나 선생이 쓰러졌단다. 지난번에 보니까 다이어트 한다고 밥을 새 모이처럼 조금 먹는 거, 그거가 원인인 것 같아….” 전화는 아버지가 받았고 지시도 아버지가 내려야 하는데 엄마는 이미 통역자의 병의 원인까지 추리해내고 있었다.
공지영
1963년 서울태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1998년 <창작과 비평> 등단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별들의 들판> 등
장편 <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 '21세기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등 수상 나보고 통역을 하라고? 하는 얼굴로 나는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그래, 오늘만이다, 하고 말하면서 얇은 햄을 끼운 빵을 입 속으로 밀어 넣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아빠, 나 일본말, 얼마나 하기 싫어하는지 아시잖아요, 엄마만 아니었다면, 아침만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난데없이 이노가시라 공원의 벚꽃이 일제히 떨어지는 기억이 났다. 눈보라처럼, 부드러운 눈보라처럼, 그 부드러움으로 나를 길 잃게 만들었던 그 베이비 파우더 빛깔의 부드러운 흰빛들. 나로서도 난데없는 기억이었다. 감기의 첫 징후처럼 코끝이 약간 매웠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내가 잠시 흰 플레인 요구르트가 든 접시를 휘저으며 아찔해하자 엄마가 또 한마디 거들었다. “거봐, 너도 다이어트 한다고 매일 밥도 안 먹고 뛰기만 하니까… 큰일이다.” “말하지 않은 지 칠년이에요. 저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오늘만이다, 내 말을 자르며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식탁에서 일어나셨다. 오늘만이라는데, 통역자가 쓰러졌다는데, 왜 무리한 다이어트를 했느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민준과의 저녁 약속을 취소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나는 메일로 간단하게 사연을 알리려고 내 아이디를 입력했다. 나우 리그렛…. 민준이 물었다, 네 아이디 무슨 뜻이야? 지금 후회한다는 그 영어 말하는 거야? 그런가? 하며 나는 휘파람을 부는 척했었다. 후회하니? 하고 누가 물을까봐 겁이 났었나보다. 약속을 다음날로 연기하자는 메일을 쓰고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지희의 말처럼 옷장 안은 온통 무채색 빛깔의 옷들로 가득했고 그 밑바닥에 혼자 연둣빛 트레이닝 복이 놓여 있었다.
평생 걸려도 풀 수 없는 올가미 속에 나와 홍이가 있다 눈 아래 펼쳐진 서울의 조감도는 정밀한 반도체 기판(基板), 마치 일렉트로닉IC의 미래도시를 연상케 한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도시는 훨씬 거대하고 그 중심을 좌우로 흐르는 한강은 마치 에너지를 이동시키는 대동맥 같다. 출국 직전 칸나는 내 등에 대고는, 그 사람 만날 거지 하고 참고 있던 말을 터뜨렸다. 내 머릿속에 그 사람의 고개 숙인 듯한 얼굴이 되살아난다. 태양이 구름 사이사이로 얼굴을 내밀자 기판인 도시에 갑자기 활기가 넘친다. 한강 수면이 예리하게 반사된 순간, 나는 거기에서 수천 년의 역사를 살아온 한 마리 용을 보았다. 그날, 마음의 벽에 후회라는 상처를 새겼다. 그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바라보며 7년을 보냈다. 그런 내게 그 사람이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 방문은 마음 편한 여행이라 할 수 없다.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기내에서 밀려오는 후회로 마음도 영혼도 함께 흔들렸다. 한강이 다시 반짝인다. 나도 모르게 이마를 창에 댄다. 내뿜는 김에 창이 뿌옇게 된다. 지금이란 시간은 홍이와 헤어진 순간에 멈춘 채 오늘까지 연연히 이어진 시간의 쇠사슬이 만들어낸 매듭이다. 이 짧은 여행 중에 나는 그 매듭을 풀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평생 걸려도 풀 수 없는 올가미 속에 나와 홍이가 있다. 그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서울을 찾아, 같은 하늘 아래에서 그녀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다. “거짓말. 그 사람 잊지 못했으면서.” 칸나의 목소리는 진실을 꿰뚫는다. 도대체 누가 후회란 말을 만들었을까. 신은 사람에게 후회하게 하여 뭘 배우게 하려는 것일까. 무겁게 짓눌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등에 지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날, 홍이와 나는 이노가시라 공원 호수에 놓인 다리 중간에서 만났다. 몇 초였을까, 시간의 쇠사슬이 우리를 옭아매었다. 크게 뜬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바라보았을까. 그리고 또 어느 날 홍이는 새하얀 티셔츠에 트레이닝 복을 입고 이노가시라 공원 호숫가를 달리고 있었다. 빛나는 수면보다 더 하얗고,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빨리. 나는 멀리 낙엽이 깔린 숲 기슭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쓰지 히토나리
1959년 도쿄태생
1989년 처녀작 <피아니시모>로 '스바루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1997년 <해협의 빛>으로 아쿠타가와상 수상
1999년 <백불> (흰부처)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프랑스 굴지의 가오리와 함께 작업한 <냉정과 열정사이>등이 국내에서도 소개됨 그리고 이별이 가까워지던 날, 홍이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내게 소리를 쳤다. 이상하게도 그 기억만큼은 소리가 없다. 물 소리도 바람 소리도 웃음소리도 거리의 소리도 아무것도 없다. 나를 향해 항의하는 그녀의 붉어진 얼굴만이 마음속 화면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날, 나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줄곧 그녀가 돌아오기를,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돌아올 것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지금 나는 햇빛 찬란한 서울 거리를 홍이의 웃는 얼굴과 겹쳐 바라본다. 건물의 형태나 거리 모습이 점점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되자, 긴장한 내 몸이 굳어간다. 한국어 안내방송이 흐른다. 리드미컬하고 음악 같은 외국어. 그때 홍이는 좀처럼 내 앞에서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어리석게도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기내에 겨울 햇살이 스며든다. 비행기의 선회에 따라 빛줄기가 7년이란 세월을 되돌아보듯 기내를 가로지른다. 빛의 자락을 찾아 창밖을 내다본다. 태양과 시선이 부딪친다. 비쳐든 햇살에 눈이 부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만다. 감은 눈 뒤편에 그저 아무 말 없이 달리는 하얀 옷의 그녀, 최홍이 있다. 어째서 홍이는 그렇게 달려야만 했을까.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어째서 홍이의 외로움을 좀 더 이해해주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녀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없었을까. 착륙하는 순간 기체가 흔들렸다. 서울에 도착했다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네다를 출발해 겨우 두 시간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시차도 없다. 7년 동안, 어째서 나는 서울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혹은 너무 가까운 나라여서. “준고는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날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 거잖아. 난 그 사람이 미워. 아직도 네 마음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사람이.” 칸나는 가끔 내게 잔소리를 한다. 나는 이미 지난일이라 되풀이한다. 그래 모든 게 이미 늦은 옛날 이야기다. 성급한 승객들이 통로에 늘어서기 시작하지만 나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어?” 연신 내리는 빗속에서 홍이와 나는 우산 속에 갇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 어려운걸. 하지만 분명 어딘가엔 있을 거야.” 홍이는 이노가시라 공원 호수 수면을 바라보며, 어딘가에? 그게 어딜까?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어딘가지, 하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수면에는 빗방울이 만드는 무수한 원들이 만들어졌다 금방 사라져갔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도착 로비로 발을 옮겼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현대적인 로비의 눈부신 공간 끝에서 시선이 매듭을 만든다. 갑자기 소리가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기억이 순식간에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모세가 바다를 둘로 나눈 것처럼 시야를 가르는 길이 생기더니, 그 끝에 홍이가 서 있다. 우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움켜쥔 채 서로 아무 말 없이 그저 멍하니 한강의 용이 가져다준 기적 앞에 서 있을 뿐이다.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