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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교수평가, 미국도 이렇게 획일적으로 안 한다

등록 2020-02-14 04:59수정 2020-02-14 11:20

서울대 양일모 교수팀 정책연구보고서, 획일적 평가 문제점 분석하고 대안 제시
신자유주의 원조 미국도 “양보다 질 추구하고, 멘토적 평가로 격려하고 성장시켜”
총리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발주 ‘인문학 분야 평가제도 개선 연구’

정부가 발주한 정책연구보고서에서 ‘다양성이 불가피한 인문학 분야의 경우 질적 평가를 중심으로 평가 틀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
정부가 발주한 정책연구보고서에서 ‘다양성이 불가피한 인문학 분야의 경우 질적 평가를 중심으로 평가 틀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
획일적인 대학 평가와 그에 따른 교수 평가가 대학 사회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해치고 있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발주한 정책연구보고서에서 ‘다양성이 불가피한 인문학 분야의 경우 질적 평가를 중심으로 평가 틀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영삼 정부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해 온 신자유주의적 대학 평가 방식에 변화가 생길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울대 양일모 교수(자유전공학부 학부장) 등 6명의 연구자는 총리실 산하 연구기관인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연구과제로 최근 제출한 보고서 ‘인문학 분야 평가제도 개선 연구’에서 “대학 순위평가와 책무성 평가는 대학을 획일화하고, 대학 간 과잉경쟁을 초래하며, 평가 준비 등 불필요한 용도로 자원을 낭비한다는 비판들이 제기된다”며 “특히 한국과 같이 평가과정의 공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에는 평가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하여 정량적인 지표를 핵심적인 지표로 설계하고 있다”고 현황을 설명했다. 이에 따라 “현재 대학의 인문학 분야에 대한 (교수) 업적평가는 이공계 분야의 평가방식을 준용하고 있”으며 “수량적 기준(논문 편수 등)을 사용하는 사례가 많으나 이러한 수량적 기준은 해당 학문 분야를 평가하는 합리적인 기준으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학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학문에 동일한 잣대를 대고 있어서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국내외 선행 연구와 외국의 평가제도를 일별한 뒤, 인문학 전문가 14명의 표적집단면접(FGI)을 거쳐, 390명의 인문학자와 비교집단인 사회과학 연구자 7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미국 대학의 업적평가 제도’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와 달리 질적 평가를 위주로 하며, 세부 기준도 각 대학과 학문 분야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연구중심대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하기까지) 저술 1권에 논문 2~3편 정도를 함께 제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연구성과의 심사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대학들이 연구의 양적인 요건보다는 질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어 심사한다는 점이다. 논문의 경우 해당 학문 분야 최고 수준의 학술지(top journals)에 게재된 논문들을 높게 평가하고, 저술의 경우에도 해당 분야의 권위 있는 대학출판사에서 출판된 책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한다.”

특히 정년보장 심사의 경우 “부적격자를 탈락시키는 과정이기보다는 후보자들을 격려하고 훈련해 동료 교수로서 성장시켜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학과 학과의 특징에 따라서 각기 다른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또한, 최초 임용 시에 해당 교수에게 기대되는 각종 세밀한 요구사항을 미리 제시하고, 임용 후에는 그에 따라 역할을 부여하며, (…) 이 과정에서 정년보장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려운 교수들은 자진하여 타 대학으로 이동하는 등 심사대상자에게 이직을 준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를 주고 있으며, 정년보장을 받은 후에는 기대하는 역할이 확장되어 대학에 대한 더 많은 봉사(주로 행정 업무)를 기대한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신자유주의 원조 국가로서 치열한 경쟁 시스템을 갖췄을 것 같은 미국이지만, 교수평가만은 우리보다 훨씬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교수 평가 제도를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된 귤’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만한 대목이다.

결론은 자명하다. 인문학 분야 업적평가의 기준(논문, 저술 등)을 다양화해야 하고, 정성적 평가의 비중을 대폭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학의 특성에 따라 평가 기준을 다양하게 설계하고, 같은 대학 안에서도 인문학자가 소속된 학사 단위의 특성과 학자 개인이 역점을 두는 활동의 특성 등에 따라 평가 기준을 다양화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조언했다. 연차 평가 등 단기적인 평가보다는 프랑스처럼 4~5년마다 장기적인 관점(조교수 임용 후 부교수 승진, 부교수 승진 후 정년보장)에서 평가하고, 중간에 실시하는 평가는 보상적 또는 징벌적 평가보다는 인문학자의 역량을 키워주는 멘토형 평가로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연구비 지원도 1~2년 단위 단기적인 지원보다는 장기적인 지원(3~5년)으로 바꿔나가고, 계획서에 의한 사전평가 시스템보다는 업적에 대한 사후 평가 및 지원이 필요하며, 평가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세부 학문 분야별 전문가단을 확보해 더욱 엄격한 평가를 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결론 내렸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인문학 분야 연구지원금을 대부분 집행하는 한국연구재단이 선도적 구실을 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촉구했다. 또 “업적 평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평가를 통하여 학자들의 학문적 성장을 돕고, 학자들의 잠재적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평가가 설계되어야” 한다며, “평가가 징벌적 혹은 보상적 차원보다는, 학자로서 성장해 나가는 데 필요한 조언을 제공하고, 대학이 그에 적합한 조건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향후 인문학 분야 업적 평가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인 업적 평가 모형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특정한 대학과 학과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기준과 절차 등을 탐구하는 연구로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연구를 총괄한 양일모 교수는 <한겨레>와 한 전화 통화에서 “현재의 평가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 가량 지나면서 인문학자들 스스로 양적 평가에 길들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딜레마”라며 “공정성과 신뢰도를 확보할 수 있는 질적 평가 시스템을 개발하고 적용하기 위해 인문학자들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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