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좌파 문화이론지 <문화/과학>이 이달 말 나오는 겨울호로 지령 100호를 맞는다. 상업적 잡지들도 연명이 어려워진 세태에서 실천적 지식인들의 헌신과 신념으로 일군 값진 성과다.
1992년 창간한 계간 <문화/과학>은 창간호 ‘과학적 문화론을 위하여’부터 ‘페미니즘 2.0’(83호) ‘인류세’(97호) 등 혁신적이고 통섭적인 주제 선정으로 한국 사회 진보 이론 발전에 기여해온 대표적 좌파 잡지다. <문화/과학>이 <창작과비평>이나 <문학과지성> 같은 다른 진보적 문예지와 다른 점은 이론 연구에 머물지 않고 실천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1999년 문화운동 시민단체인 ‘문화연대’를 창립해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2003년부터 2년마다 한국 최대의 진보좌파 학술문화 행사인 ‘맑스 코뮤날레’를 다른 단체들과 함께 열고 있다. 2007년 생태문화 코뮌주의 실천을 위해 ‘민중의 집’을 설립했고, 2015년에는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지순협 대안대학)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문화/과학>은 이달 말 나오는 100호를 끝으로 2기 편집인 체제에서 3기로 넘어간다.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열린 ‘<문화과학> 100호 발간 및 기념 심포지엄 소개 기자간담회’에는 1기 편집인 강내희 지식순환협동조합 이사장과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2기 편집인 이동연 한예종 교수, 3기 공동편집인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와 박현선 서강대 인문한국(HK) 연구교수 등 1~3기 편집인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문화과학> 97호, 83호, 창간호.
종이 잡지들이 잇따라 폐간되는 가운데 <문화/과학>이 27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 재생산 시스템에서 어느 정도 비켜나 있었기 때문이다. 강내희 이사장의 부인인 손자희 전 발행인이 지령 70호에 이르기까지 교열과 편집, 제작, 유통을 무임금 노동으로 감당했고, 편집위원 가운데 정규직 교수들은 원고료를 받지 않고 오히려 기금 마련에 나서기도 했다.
종이 잡지계 전반의 쇠락이나 좌파 문화이론에 대한 수요 감소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대학 교수들을 옭아매는 논문 생산 및 평가 시스템이다. 논문 평가 실적을 채우기 급급해 <문화/과학> 같은 계간지에 글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강내희 이사장은 “<문화/과학>은 처음부터 학진(한국연구재단) 등재지의 길을 거부했다”며 “등재지가 되면 익명의 심사위원 입김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 자유로운 문제제기나 날카로운 비평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광현 교수는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파리기후협약 탈퇴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체제 해체 과정과, 100호를 맞는 <문화/과학>의 두번째 순환이 교차한다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다”며 “인류가 거대한 전환을 맞는 2020년대를 맞아 여성 편집위원들이 전면적으로 결합하는 <문화/과학> 3기 체제는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오는 30일 서강대에서 100호 발간 기념 심포지엄을 연다. 100호는 ‘인간의 미래’와 ‘문화운동 30년: 1987~2019’ ‘계간 <문화/과학>을 말한다’ 등으로 구성할 예정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