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한국고전소설 연구의 방법적 지평>(알렙).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인 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최근 출간한 책이다. 올해 63살인 저자가 쉰이 되기 전에 발표한 15편의 글을 모았다.
책 표지를 보니 ‘방법적 지평’이란 글자가 크게 도드라진다. 지난 1일 전화로 만난 저자에게 궁금해하니 “학문은 방법론의 문제”라고 답했다. “수십 년이 지나 연구 결과를 보면 디테일(세부 사실)보다는 입장이 남아요. 단재 신채호를 보세요. 요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디테일을 빌미로 단재를 공격하더군요. 비록 디테일은 틀릴 수 있지만 단재의 입장은 남아요.”
그가 쉰 이후 추구하는 학문적 방법론은 ‘한국학을 통합인문학 관점에서 접근하기’이다. 한국학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문학과 사상, 예술 사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 방법론의 대표적 결실이 지난해 나와 호평을 받은 그의 책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1 회화, 2 서예)이다.
15편은 총론을 빼고 장르론, 문예사회학, 역사주의, 비교문학적 접근과 같은 4개 항목 아래 배치됐다. 왜 이론과 방법론이 중요할까? “(국문학의) 서사 연구는 세계, 현실, 역사,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해요. 부단한 방법론적 물음과 모색이 필요한 이유죠.”
그는 1980, 90년대 자신의 학술 활동을 두고 “실증주의 혹은 형식주의와 속류 민중주의와의 싸움”이었다고 했다. 요즘 학계 동향을 두고는 “표면적 사실관계만 따지는 실증주의가 횡행하고 있다”고 했다. “실증주의와 형식주의는 정신의 위축과 비판성 상실로 이어지죠. 속류 민중주의도 진실을 쫓는 데 걸림돌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속류 민중주의조차도 없어져 귀한 게 되었어요. 대신 실증주의만 횡행하죠. 실증과 속류 민중주의를 넘어서야 텍스트에 대한 정당한 해석을 이끕니다.”
쉰살 이전 논문 모아 책 출간
‘한국고전소설 연구의 방법적 지평’
“요즘 학계 실증주의만 횡행
‘주체적 인간’ 춘향을 ‘창녀’라니
인간 내면 읽는 게 학문에 중요”
그는 29살이던 85년에 쓴 논문 ‘<춘향전>의 역사적 성격 분석-봉건사회 해체기적 특징을 중심으로’를 예로 들었다. 서울대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이상택 교수도 비록 <춘향전>에 대한 해석은 달랐지만 제자의 이 논문은 일찍이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춘향전>의 정치학과 미학을 민중적 세계관과 관련지어 해명한 최초의 연구이죠.” 그는 이 판소리계 소설에서 민중(춘향)과 양심적 양반(이 도령)의 연대가 천민인 춘향의 주도 아래 이뤄지고 있다면서 그 바탕에는 18세기 민중의 상승하는 힘이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춘향의 수청 거부 뒤 민중이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점에도 주목하며 <춘향전>은 당대 민중의 세계관을 정점에서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사회역사주의적 접근이라는 제 학문의 방법론을 구현한 대표적인 논문이죠. 저는 당시 춘향을 인간해방의 관점에서 신분제를 뛰어넘으려는 주체적 인간형으로 접근했어요. 춘향을 민중들의 이상과 희망을 당당히 대변하는 인물로 본 거죠. 그런데 최근 식민지근대화론자인 이영훈 교수는 춘향을 자신의 이익을 꾀하려고 이 도령에게 접근한 창녀로 보더군요. 조선 시대 기생제도가 식민지 시대 위안부와 연결된다고 주장하면서요.”
15편 가운데 가장 마음이 가는 글로 석사논문 <청구야담 연구-한문단편소설을 중심으로>(1981년)를 꼽았다. ‘본고에서는 특히,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특수한 현실이 당대의 전체적 역사 과정에서 보편성과 전망을 획득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 주목하고자 했음을 밝혀둔다.’ 논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카를 마르크스 주저 <자본론>의 학문적 방법에서 영감을 받은 논문이기도 하죠.” <자본론>은 유신말인 78년 그가 제안해 서울대 대학원생 7명이 꾸린 ‘비밀공부모임’에서 탐독했던 책이다. “다른 친구들은 감옥에 가는데 공부하는 게 부끄러웠어요. 대신 공부로 민주주의를 모색하고 민족민중운동에 동참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르크스와 앵겔스, 루카치의 주요 저작을 깊이 읽었어요. <자본론>도 3권 모두 영어로 완독했죠. <자본론> 서술이 추상에서 구체로 가잖아요. 제 석사 논문도 그 방법을 원용했어요.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방법이었죠.”
계획을 묻자 내후년 정년 이전에 ‘한국고전소설사’를 내는 게 목표라고 했다. “최근 몇십년 동안 한국고전소설사 책이 나오지 않았어요. 국문과 한문소설을 다 망라해 다뤄볼 생각입니다.”
인터뷰 끝에 이런 말도 했다. “한국 학문의 존재감은 세계적으로 미미합니다. 저 변방입니다. 인간을 제대로 읽는 게 한국 학문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해요. 자료 너머 인간의 내적 고뇌를 읽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해요. 굉장히 심각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박희병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국고전소설 연구의 방법적 지평> 표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