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립묘지인 ‘팡테옹’에는 위고, 볼테르, 루소, 졸라, 말로 등 프랑스를 빛낸 위인들이 묻혀 있다. 1791년부터 2015년까지 팡테옹에 묻힌 73명 중 여성은 단 2명이었다. 남편과 합장된 경우를 빼면 자신의 업적으로 묻힌 여성은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 마리 퀴리가 유일했다. 그래서 남녀차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2015년에 새로 묻힌 4명 중 2명이 여성이었다. (여권 신장에 앞장섰던 정치인 시몬 베유가 지난해 추가됨에 따라 지금까지 팡테옹에 안장된 여성은 모두 5명이다.) 둘 다 나치 점령하의 레지스탕스로 수용소를 경험했으며, 그중 한 사람은 드골 전 대통령의 조카딸이었다. 드골앙토니오즈는 “수용소에서 굶주린 포로들이 동료에게 먹을 것을 양보하던 광경이 잊히지 않는다”며 인간의 위대함을 믿고 평생 노숙인과 빈곤층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은 위대한 레지스탕스이자 인류학자이며 페미니스트인 제르멘 틸리옹(1907~2008)이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무명이나 다름없다. 그의 저서는 물론 논문, 심지어 신문이나 잡지나 텔레비전의 기사로도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틸리옹과 함께 팡테옹 후보로 거론된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데 말이다.
프랑스 국립묘지 팡테옹에 묻혀
틸리옹은 <증여론>으로 유명한 마르셀 모스에게 인류학을 배웠으며, 이는 그의 이후 삶으로 연결됐다. 그는 1934년부터 모스의 권유로 20대 여성의 몸으로 혼자 알제리 산악지방에 사는 베르베르인들의 극단적인 남권사회에 들어가 4년간 현지조사를 하고 그들의 생활문화를 연구했다. 4년간의 고독한 현장연구를 마치자마자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파리로 돌아와, 남성들도 대부분 등을 돌린 레지스탕스 활동을 조직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37년에 설립된 인류박물관 지하실을 파시즘에 반대한 지식인들의 집합소로 삼아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비합법의 <레지스탕스>를 발간해 배포했다. 1941년부터 레지스탕스 지식인들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재판이 열려 19명 중 10명이 사형판결을 받고 7명이 총살당했다. 이에 저항시인 루이 아라공은 사형당한 사람에 포함된 러시아인들에 대해 “조국의 볼셰비즘에서 도망쳐 프랑스인이 되었고, 인류와 여러 민족의 과학인 인류학에 의해 인류의 현실에 눈을 뜬 두 사람이 히틀러의 민족주의(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그들이 인류박물관의 기둥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인류박물관의 가르침은 그 정복의 도구에 불과한 나치의 학문과는 상반된 것이다”라고 썼다.
틸리옹도 룩셈부르크의 목사이자 나치 스파이였던 자의 밀고로 1942년 어머니와 함께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 “독일의 적을 돕고 낙하산병을 숙박시켰으며 스파이 행위를 하여 프랑스를 배신했으며, 게슈타포 첩보활동을 방해하고 감옥에서 3명의 사형수를 탈옥시키려고 했다”는 이유로 여러 교도소와 수용소를 거치는 가운데 어머니는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그럼에도 틸리옹은 알제리인을 이해하면서 닦은 관찰의 안목으로 강제수용소의 구조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그곳 사람들에게 수용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강연을 했다. 그곳의 생활이 아무리 비참하다고 해도 그곳을 이해하는 것이 그런 폭력에 희롱당하지 않고 그것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틸리옹은 수용소에서 병에 걸리고 어머니를 여의였음에도 살아 돌아온 데 대해 “분노와 범죄를 폭로해야 한다는 집념, 그리고 우정에 의한 협력은 있었으나, 본능적이고 육체적으로 살고 싶다는 희망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1945년 4월 약 300명의 프랑스인 여성수용자와 함께 스웨덴 적십자사에 의해 구출된 틸리옹은 7월에 파리로 돌아와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원으로 복귀했다. 이후 많은 전범들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레지스탕스에 대해 조사하는 ‘국가청산인’의 대표가 되었다. 1946년 강제수용소에 관한 저서를 발표했으며, 그 조사는 평생 계속되었다. 죽음과 함께한 삶에 대해 증언하는 것, 수용소 정보를 가능한 한 철저히 수집하고 보존하는 것이 앞으로의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 그는 평생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1946년에 레지스탕스 훈장을 비롯하여 많은 포상을 받은 그는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여성과 아동에 관한 퇴역군인부의 조사를 담당하는 등 레지스탕스와 관련된 활동을 계속했다. 1951년에는 소련 강제수용소에 대한 조사에 참여하여 공산당 출신의 레지스탕스 동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1954년에 알제리 독립전쟁이 터지자, 틸리옹은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미테랑의 요청으로 알제리 산악지방 주민들을 조사했다. 이어 1955년부터 프랑스령 알제리 총독부에 사회복지센터를 설치하고 훈련받은 약 1천명의 직원을 배치하여 1962년의 휴전 때까지 알제리 전역의 120곳에 초등교육, 무료진료소, 행정 원조, 직업준비교육을 제공했다. 1962년 사회복지센터의 시찰관 10명이 프랑스 극우민족주의자들의 무장 지하조직에 의해 살해되자, 틸리옹은 <르몽드>에 ‘어리석음에 의해 저질러진 냉혹한 살해’라는 제목으로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알제리 사하라 사막을 조사하여 <1957년의 알제리>를 출판했다. 또 ‘강제수용제도에 반대하는 국제위원회’에 참여하여 알제리의 포로수용소와 감옥에 대해 조사했다.
1957년에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지도자 사디의 요청을 받고 고문과 처형이라는 악순환을 끝내기 위해 테러 지하조직과 프랑스군의 교섭을 돕기 시작했다. 그 직후 사디가 체포되자, 틸리옹이 증언에 나서 처형을 면제받게 했다. 사디의 옥중기에 근거해 만든 영화가 <알제리 전투>였다. 그는 1960년 프랑스 교육부 장관의 요청으로 감옥 교육과 일제리 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만드는 등 알제리와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활동했다. <상호보완적인 적>에서 프랑스의 고문과 처형 및 알제리의 테러를 비판하고,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등과 함께 위원회를 만들어 고문을 규탄했다.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자 틸리옹은 레지스탕스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알제리협회 결성에 앞장섰다.
“20세기 대표하는 인간성의 옹호자”
알제리 독립 후 파리로 돌아온 틸리옹은 알제리 사회학을 강의하면서 교도소 내 교육 개선 등의 여러 인권활동에 종사했다. 2000년에는 당시 정부에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군이 저지른 고문을 인정하고 단죄할 것을 요구했다. 그 사이에도 인류학 조사와 레지스탕스 연구를 계속했다. 특히 1966년의 <할렘과 의형제들>에서는 이슬람의 여성 억압은 종교가 아니라 친족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밝히는 등 여성의 지위에 관한 조사와 연구에도 종사했다.
틸리옹은 2008년 101살의 나이로 숨졌다. 그의 생전에 알제리 정부는 틸리옹이 알제리와 프랑스의 대화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는 국제행사를 열었다. 사르코지 당시 대통령은 그의 마지막 생일을 축하하면서 20세기를 틸리옹의 세기라고 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식민지전쟁, 강제수용소, 고문, 테러와 같은 20세기의 모든 비극과 악을 겪으면서도 그 비극에 번롱당하지 않고 언제나 크게 눈을 뜨고서 그 비극의 정체를 파악하고, 비극에 번롱당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으로 행동했다. 프랑스의 사상가 토도로프는 틸리옹의 이런 삶을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정열’이라고 요약하고,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인간성의 옹호자라고 일컬었다.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