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다산경제관에서 ‘새로운 학문 생산체제와 지식 공유를 위한 학술단체와 연구자 공동 심포지엄’이 열려 (왼쪽부터) 홍기빈(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박상민(한국사고와표현학회), 이재윤(한국정보관리학회), 박배균(연구자의 집), 천정환(인문학협동조합)이 토론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올해 초 새 학기부터 부산대·전남대·제주대 등 10개 국공립대 교수와 학생들은 전자 논문 열람에 불편을 겪고 있다. 학교 쪽이 국내 최대 학술논문플랫폼인 디비피아(DBpia)와 구독료 인상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최근에야 표면화하고는 있지만, 현재의 학술논문 유통 구조에선 예견된 문제였다.
학술논문은 이렇게 유통된다. 학회가 학술지를 발간해 소속 연구자들로부터 게재료를 받고 이들이 생산해낸 논문을 싣는다. 학회는 저작권료를 받고 논문을 민간데이터베이스 업체에 넘겨준다. 디비피아 등 업체들은 학생·연구자들이 논문을 열람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로 대학도서관들로부터 이용료를 받는다. 전체 이용료의 20~25%가 학회에 주는 저작권료로 돌아간다. 인터넷이 상용화한 1990년대 후반부터 이런 구조가 만들어졌고, 학회들이 부족한 운영비를 충당한다는 차원에서 가볍게 시작했던 일이 20년 지나 굳어지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문제는 논문 유통을 틀어쥔 국내 민간데이터베이스 업체들과 국외저널들이 구독료를 올리면서 불거지고 있다. 4년제 대학의 전자자료 구입비는 지난해 기준 1536억원에 달한다. 이 중 90%가 국외 출판사들이 운영하는 전자저널 구독료다. 나머지 10%가 국내 민간 업체에 내는 구독료다. 재정이 여의치 않은 대학들이 도서 등 자료구입비까지 줄여가며 전자저널 구독료를 내다가 결국 구독을 해지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상황은 국내에서만 겪는 일은 아니다. 이미 17년 전인 2002년 헝가리에서 열렸던 ‘부다페스트 오픈액세스 이니셔티브’는 영리 업체들이 유통하는 학술지의 가격이 지나치게 상승해 학술 자료를 이용하기 어려워진 상황에 심각성을 느낀 여러 나라의 연구자들이 모여 오픈액세스라는 목표를 확인하고 실천전략을 세운 국제적인 모임이었다.
논문 구독료 상승 문제가 현실화하자, 국내 학계에선 공적 지식의 집약체인 논문을 업체를 통하지 않고 연구자 및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하는 오픈액세스 운동이 움트고 있다. 지난해 4월 문헌정보학 분야의 8개 학술단체가 ‘오픈액세스출판 선언문’을 발표한 뒤 민간 학술데이터베이스 업체와 계약을 종료하고 공공 학술논문 플랫폼에서 논문들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흐름을 학계 전체로 확대하고, 더불어 학술 생산 체제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데 모이는 자리가 마련됐다.
29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학술단체협의회와 국공립대학도서관협의회 등 37개 학회와 단체들이 주최한 ‘새로운 학문 생산체제와 ‘지식 공유’를 위한 학술단체와 연구자 공동 심포지엄’이 열렸다. 발표자로 나온 박서현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는 본질적으로 “학문 지식은 코먼스(공유재)”라는 점을 지적했다. 학문 지식은 이미 생산된 지식에 기반하여, 논쟁·평가·인용 등 연구자들의 사회적 협동을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학회와 자본이 공모해 지식 생산자에게 기생하고, 지식의 자유로운 공유를 막아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박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이런 구조를 바꾸기 위해 국가도 기업도 아닌 지식 생산자들과 학술단체들이 주체가 된 오픈액세스 플랫폼이 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라인에 논문을 공개해 동료 연구자의 평가와 대중의 논평을 받는 ‘공개 동료 평가’ 방식으로 운영되는 등의 대안적 플랫폼을 만들고, 이를 위키미디어코먼스 같은 지식 코먼스 운동과 연동하는 방식 등 여러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플랫폼의 변화만으로는 한국의 지식 생산 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현재 구조가 ‘학술지 등재제도’란 논문 생산 체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제도는 신자유주의적 고등교육 정책의 일환으로서 경쟁력 강화와 국제화란 명목으로 1998년 도입됐다. 학술지를 우수등재지·등재지·등재후보지 등으로 나누고, 여기에 논문이 얼마나 실렸느냐를 대학과 교수 평가의 핵심 지표로 삼은 것이다. 이에 따라 교수, 연구자들은 논문 집필에 매달려 ‘논문 편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논문의 질도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렇기에 그는 “2014년에 유보되었던 학술지 등재제도의 폐지를 다시 한 번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외 학술저널 구독료가 상승하자 대학들은 도서 등 자료구입비를 줄여가며 대응하다 결국 구독을 해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서울의 한 대학교 도서관. 한겨레 자료 사진
정경희 한성대 교수(디지털인문정보학트랙)는 한국기록관리학회에서 학술지를 오픈액세스로 전환한 사례를 발표했다. 지난해 오픈액세스출판 선언에 참가한 한국기록관리학회는 지난해 9월로 디비피아와 저작권 계약이 만료되자, 올해 2월 발간된 학술지부터 오픈액세스로 전환했다. 저작권료 수입이 사라진 대신 인쇄본을 찍지 않고, 회원들도 동료 논문 심사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학회는 학술지 논문을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와 국회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을 통해 공개하고, 교보문고 스콜라 등 민간 업체에도 무료 공개를 조건으로 논문을 제공했다.
참가 학회와 단체들은 이날 발표한 선언문에서 “공공기관의 전자논문 서비스는 오픈액세스 등 확고한 지식 공유 정신에 입각하여 개편되어야 하며, 지식 생산자인 연구자들이 주체가 되어 운영하고 시민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한국연구재단의 학회 및 학술지 평가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며, 대학 또한 논문 편수로 연구자와 대학 교육자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잘못된 제도를 이제는 버려야 한다. 이를 위해 질적 평가제도의 확충은 물론, 연구자의 다양한 사회적 기여에 대해서도 적절히 평가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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