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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일본 군마현에서 나온 비늘갑옷은 백제식이었다

등록 2019-03-09 10:31수정 2019-03-10 14:48

〔토요판〕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⑨일본판 폼페이와 한반도

6세기초 하루나 화산 폭발 인한
군마 가나이히가시우라 유적
일가족 4명 묻힌 비극 현장에서
‘사슴뼈 비늘갑옷’ 출토돼 관심
서울 몽촌토성 출토 것과 동일

일본 군마현에 있는 가나이히가시우라는 6세기 초 하루나 화산의 폭발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 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특히 백제의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사슴뼈 비늘갑옷이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왼쪽은 몽촌토성에서 나온 갑옷의 복원 모습이며, 오른쪽 위는 가나이히가시우라, 아래는 몽촌토성의 갑옷 출토 당시 모습이다. 권오영 교수 제공
일본 군마현에 있는 가나이히가시우라는 6세기 초 하루나 화산의 폭발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 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특히 백제의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사슴뼈 비늘갑옷이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왼쪽은 몽촌토성에서 나온 갑옷의 복원 모습이며, 오른쪽 위는 가나이히가시우라, 아래는 몽촌토성의 갑옷 출토 당시 모습이다. 권오영 교수 제공
백제에서는 무령왕이, 신라에서는 지증왕이 갓 즉위한 6세기 초, 일본에서는 폭군으로 악명 높은 부레쓰(武烈)의 학정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가미쓰케누(上毛野)라고 불리던 지금의 군마(群馬) 지역은 내륙에 위치하고 바다가 없어 여름에는 섭씨 40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운 곳이다. 한여름의 더위에 한 사내가 부인과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걷고 있었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면서 하루나산(榛名山)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화산쇄설물(화산 폭발 때 나오는 가스와 화산재 등의 물체)이 쏟아져 내렸다. 가족은 급히 개울 옆에 엎드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유독가스에 질식한 이들은 곧바로 숨을 거두었고, 이어서 수십분 동안 화산쇄설물이 이들을 덮쳤다. 화산 폭발의 피해자는 이들만이 아니었다. 화산쇄설물은 분화구 동북쪽으로 25㎞까지 흘러가서 수백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마을과 논밭, 도로가 모두 화산쇄설물에 덮여버렸다. 일본판 폼페이의 비극으로 불리는 가나이히가시우라 유적이다. 일본 고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나카스지 유적도 이때 통째로 매몰된 여러 마을 중 하나다.

Hr-FA(Hr=하루나산, F=후타쓰다케봉, A=화산재) 대재앙을 가까스로 피한 사람들은 다시 삶을 이어갔다. 가옥을 수리하여 마을을 일으키고, 수로를 복구하여 논을 만들었다. 화산재를 파내고 밭을 만들거나 화산재 위에 기름진 흙을 퍼붓고 그 위에 밭을 만드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갔다. 마침 부레쓰의 폭정도 끝나고 게이타이(繼體)라는 새로운 왕이 옹립되어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새로운 왕을 맞이한 왜는 한반도의 신라, 백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20년 시간차 지닌 군마현 유적

하지만 군마에서는 태평성대가 오래가지 못하였다. Hr-FA가 분화한 지 20년 정도 시간이 지나고 하루나산이 다시 분화한 것이다. 이번에는 화산분출물의 종류가 달라서 경석(輕石: 마그마가 분출될 때 그 안에 있는 화산가스가 빠져나가 구멍이 많이 뚫리고 가벼운 흰색의 돌)이 하루나산의 동편을 광범위하게 뒤덮었다. Hr-FP(하루나산 후타쓰다케봉, P=경석)라고 불리는 이번의 화산 폭발로 훨씬 많은 마을이 통째로 매몰되었는데, 그중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적이 구로이미네(黑井峰) 유적이다.

하루나 화산 폭발로 묻히기 전의 구로이미네 유적지를 복원한 모형. 권오영 교수 제공
하루나 화산 폭발로 묻히기 전의 구로이미네 유적지를 복원한 모형. 권오영 교수 제공
갑옷을 입은 채 절을 하듯 엎드린 자세로 숨진 사내의 모습. 일본 군마현 가나이히가시우라 유적. 권오영 교수 제공
갑옷을 입은 채 절을 하듯 엎드린 자세로 숨진 사내의 모습. 일본 군마현 가나이히가시우라 유적. 권오영 교수 제공
하루나 화산 폭발로 두껍게 쌓인 경석(Hr-FP)의 모습. 권오영 교수
하루나 화산 폭발로 두껍게 쌓인 경석(Hr-FP)의 모습. 권오영 교수
20년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매몰된 구로이미네 마을과 나카스지 마을은 1500년 전 사람들의 삶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주민들이 이사를 가거나 가옥을 폐기하면 가재도구가 남아 있지 않게 되어 발굴조사를 하여도 많은 정보를 얻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화산의 피해를 본 군마의 마을은 주민들이 미처 대피하지 못할 정도로 긴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면서 가재도구가 가옥의 안팎에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마을에서 벌어진 일상의 삶이 그대로 숨죽인 채 발굴의 삽이 들어올 때까지 살아 있었던 셈이다. 말을 몰고 대피하던 인간과 말의 발자국 흔적, 그럼에도 결국 사망한 10대 소년의 유해까지 발굴되면서 당시의 급박했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나카스지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의 연대는 전부 동일한 시점에 매몰된 것으로, 구로이미네 유적의 유물보다는 20년 정도 오래된 것들이다. 따라서 유물의 편년과 변천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추적할 수 있다. 여기에서 얻어진 연대관은 군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를 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구로이미네 유적과 나카스지 유적은 일본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유적이고, 당연히 각종 교과서에 실렸다.

그런데 이런 유적을 왜 우리가 알아야 하는가? 고대 한일관계사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2012년 11월 군마현의 학자들은 지하에 쌓여 있는 3m 두께의 Hr-FP 경석과 그 아래의 Hr-FA 화산재를 차례로 걷어내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4명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중 철제 비늘갑옷(철판을 작게 잘라서 생선 비늘처럼 엮은 갑옷)을 입은 사내는 쇠창, 많은 화살촉, 그리고 또 한 벌의 비늘갑옷을 들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내는 지면에 철제 투구를 놓고 그 위에 이마를 댄 채 화산의 반대편 낮은 쪽을 향해 마치 절하듯이 엎드린 자세였다. 돌과 유리로 만든 멋진 장신구를 머리와 허리에 패용한 채 숨진 여성은 부인으로 추정되는데 역시 엎드린 채 사망하였다. 화산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공동연구에 의해 Hr-FA는 총 15회에 걸쳐 분화가 반복되었는데, 이들은 두번째 분화까지만 하더라도 목숨을 유지하였으나 세번째 분화에 모두 절명하였음이 밝혀졌다.

가나이히가시우라(金井東裏)라는 다소 긴 이름이 붙게 된 이 유적은 한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서 유명해졌지만, 연구가 진행될수록 더욱 놀라운 사실을 쏟아냈다. 남성이 들고 가던 갑옷은 입고 있던 갑옷과 마찬가지로 쇠로 만든 비늘을 엮어 만든 것인데, 가슴 부위에 사슴의 뼈를 갈아서 만든 비늘갑옷 한 벌을 포개어 놓은 상태였다. 이러한 동물 뼈 비늘갑옷은 일본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오직 한국의 서울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적이 있을 뿐이다. 규슈나 오사카도 아니고 백제 왕성에서 유일한 비교대상이 출토되었으니 일본 학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엔 일본서기 기록 근거해
‘한반도 포로 잡아온 것’ 해석
연구 결과 현지 유력 가문이
‘선진 문물 도입’ 노력한 것 드러나
갑옷 남자도 “도래인 형질” 판명

일본 고고학 연구자는 국내 한명
고대 한일관계사 규명 멀어져

일본 선주민인 조몬인(왼쪽)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인 야요이인(오른쪽)의 얼굴. 일본국립역사민속박물관
일본 선주민인 조몬인(왼쪽)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인 야요이인(오른쪽)의 얼굴. 일본국립역사민속박물관
한반도계 유물이 많이 나온 군마현 간논야마 고분의 내부. 권오영 교수 제공
한반도계 유물이 많이 나온 군마현 간논야마 고분의 내부. 권오영 교수 제공
한반도계 주민과 재지인의 혼인 흔해

군마지역은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신라와 백제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곳이다. 오래전부터 백제 계통의 토기와 유리, 신라 계통의 금동관과 신발, 마구, 가야 계통의 귀걸이 등이 발견되었다. 한반도계 유물이 발견되는 배경을 두고서는 이 지역의 우두머리인 가미쓰케 일족이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수차례 한반도에 출병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중시하여, 이때 신라인들을 포로로 잡아왔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발굴조사가 진행될수록 한반도의 주민들이 포로로 잡혀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미쓰케 일족이 선진 문물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고, 한반도계 이주민이 군마지역에 적극적으로 이주, 정착, 활동한 사실이 밝혀졌다. 군마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을 키우는 목마장으로 유명한 이곳에 말이 들어오게 된 배경에 한반도계 주민들의 활약이 있었음도 밝혀졌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풍의 사슴뼈 비늘갑옷이 출토되었으니 일본 학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불행한 남성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첨단 과학기술이 동원되었다. 화산재의 온도가 아주 고온은 아니었던 덕분에 인골과 철기는 녹지 않았고, 철제 갑옷 안에는 인골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엎드린 채 사망하였기 때문에 뒤통수는 일부 손상을 입었지만 얼굴은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분석 결과 키 164㎝ 정도의 40대 남성, 장요근(허리의 앞쪽에 붙어서 다리로 연결되는 부위)과 하지근이 발달한 점에서 일상적으로 승마를 하던 무사로 추정되었다. 얼굴은 전형적인 “도래인(한반도계 이주민)의 형질”을 지녔으므로 긴키나 북부 규슈, 혹은 한반도에서 이주한 인물로 추정되었다.

옆에서 발견된 여성은 30대의 연령, 추정 키 143.8㎝, 임신 경험이 있는 경산부, 얼굴의 형태가 간토(군마·사이타마 등 도쿄 주변)와 도호쿠(미야기·이와테 등 혼슈 북방) 지방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근육과 뼈가 발달한 점에서 귀족적인 생활이 아니라 노동을 많이 한 경력의 소유자로 판명되었다. 두개골만 남은 2명의 어린아이 중 한 명은 다섯살 정도, 성별 불가로 판명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분석이 불가능하였다.

스트론튬(Sr) 동위체비 분석이라는 첨단기술을 활용한 결과 부부로 추정되는 이 남녀는 유소년기를 같은 곳에서 보냈는데, 군마의 북편에 해당되는 나가노가 유력한 후보로 추정되었다. 반면 다섯살 어린아이가 자란 곳은 이 아이가 사망한 군마라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군마현의 한 고분에서 나온 신라계 말장식. 권오영 교수 제공
군마현의 한 고분에서 나온 신라계 말장식. 권오영 교수 제공

군마현의 한 고분에서 나온 신라식 금동관. 다카사키시 자료
군마현의 한 고분에서 나온 신라식 금동관. 다카사키시 자료
이 남성이 한반도 출신이라면 왜 나가노에서 자라다가 군마에서 사망하였을까? 간토나 도호쿠 계통의 얼굴을 지닌 여성은 왜 나가노에서 자라서 군마에서 사망하였을까? 지나친 상상은 금물이지만 한 가지 그려봄직한 가설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에서 이주한 조상을 둔 남성과 간토-도호쿠 출신 조상을 둔 여성이 나가노에서 만나 혼인하고, 군마로 이주하여 자식을 낳고 살다가 화산 폭발로 함께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열도로 이주해 정착한 한반도계 주민이 재지인(현지인)과 혼인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야마구치현 도이가하마(土井ケ濱) 유적에서는 야요이시대(기원전 5세기~기원후 3세기 무렵) 무덤이 많이 발견되면서 300점에 달하는 인골 자료가 확보되었다. 체질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한 결과 동남아시아적 전통을 간직한 선주민(조몬인)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야요이인)이 공존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들의 혼혈에 의하여 현대 일본인의 주축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이제 일본 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우연한 기회 혹은 정략적인 목적으로 한반도 주민과 일본열도 주민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진 경우는 매우 많이 확인된다.

군마현의 옛 이름인 가미쓰케누의 우두머리가 묻혀 있는 호도타 고분. 권오영 교수 제공
군마현의 옛 이름인 가미쓰케누의 우두머리가 묻혀 있는 호도타 고분. 권오영 교수 제공
1명 대 10명, 한국 대 일본의 연구자

우리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황국사관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 왜곡을 바로잡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해결된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미해결 상태인 부분도 많다. 고대 한일관계사의 해명은 문헌자료만 가지고는 곤란하고 고고학적 자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일본 학계에서 ‘도래인’, ‘도래계 문물’이라고 부르는 실체는 실은 한반도계 이주민, 한반도계 문물이다. 왜곡된 한일관계사를 해명하는 데에는 이른바 도래인과 도래계 문물에 대한 연구가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되고 수많은 독소를 품고 있는 <일본서기>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온 생생한 자료에 눈을 돌려야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 이런 주제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언론에서는 가끔씩 특집이라는 형태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임나일본부라는 망령을 관에서 끄집어내어 국민들을 분노케 한 후, 몇몇 전문가의 발언을 빌려 망령을 채찍질하면서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의 반복은 고대 한일관계사의 해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퇴보를 유도할 뿐이다.

국내에서 일본 고대사, 특히 7세기 이전 시기를 전공하는 연구자는 10명 남짓이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나마 ‘연구자집단’이라고 불릴 만하다. 그런데 우리의 고조선-삼국시대에 해당되는 일본 야요이시대와 고분시대를 전공하는 고고학 연구자는 단 1명이다. 그것도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50대 후반의 연구자이다. 우리의 고대사와 관련된 일본 고고학을 정면으로 다룰 수 있는 젊은 연구자는 여태껏 배출되지 않고 있다. 가나이히가시우라 유적이나 도이가하마 유적처럼 고대 한일관계사의 수수께끼를 풀 정보를 담고 있는 유적을 다룰 한국인 연구자는 앞으로도 한동안 없을 것이다. 반면 한국 고고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활동하는 일본인 연구자는 필자가 아는 사람만 손꼽아 보아도 10명이 넘는다.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과제를 해결할 연구자 양성에 우리는 실패한 셈이다. 일본 고대사나 고고학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친일파’라는 멍에를 뒤집어쓸 위험성이 높고 취직도 어려운 사회 분위기에서 평생을 바칠 신진 연구자를 찾는다는 것은 기성세대의 과욕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반일과 항일, 지일과 극일의 문제를 다시금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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