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관에 시신을 매장하는 문화는 고대 베트남 중부지역과 중국 남부, 한반도 서남부, 일본 규슈지역에 퍼져 있었다. 중국과 베트남은 옹관을 세워서 사용했다. 사진은 참족의 유적에서 나온 옹관을 호이안의 사후인문화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모습. 권오영 교수
영산강 유역에서 나온 대형 옹관을 발굴 당시의 모습대로 전시하고 있다. 전남 나주박물관. 권오영 교수
2018년 1월27일 오전 베트남 호이안의 한 호텔에서 잠을 깼다. 이른 아침부터 호텔 안팎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23살 이하 챔피언십 결승전인 우즈베키스탄과 베트남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와 대형 텔레비전이 설치된 카페 앞으로 모여들었다. 붉은 옷에 국기를 몸에 감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기가 벌어진 중국 장쑤(江蘇)성은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 따뜻한 곳이지만, 이날은 웬일인지 폭설 탓에 경기장 상태가 엉망이었다. 평생 이런 눈을 처음 보았을 베트남 선수들에게 미끄러운 운동장과 추위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경기는 막상막하였고, 필자도 어느덧 베트남 시민들과 한데 어울려 “베트남 꼬렌(파이팅)!!! 박항세오(박항서의 베트남식 발음)!!!”라고 외치고 있었다. 연장 후반 막판에 한 골을 먹으면서 안타깝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베트남 시민들의 얼굴은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오히려 필자가 더 큰 아쉬움을 삼키며 답사를 속행하였다.
중·베트남 세우고, 한반도는 눕힌 옹관
2011년의 통계를 보면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남성과 혼인하여 귀화한 전체 여성 중 중국과 베트남 출신이 각각 34%로 두 나라를 합하면 68%라는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다. 중국 출신 여성 중에는 우리 동포(조선족)와 한족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실상은 베트남 출신 여성의 비율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인을 파병한 나라는 대한민국이었다. 희생자 역시 미군 다음으로 많아서 5천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베트남은 대한민국이 두번째로 수출을 많이 한 국가이자, 국내 최대 기업의 휴대폰 생산기지이다. 지난달에는 이 기업의 대표가 베트남을 방문하여 베트남 총리와 함께 대규모 투자계획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베트남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정보, 특히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는 매우 낮은 수준이다. 여기에는 역사학계의 책임도 크다. 현행 고등학교 교과목 중에는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이 있는데, 그 교과서의 내용은 대부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만 집중할 뿐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서술은 매우 인색하다. 현재 대학교에서 베트남의 역사를 교육하고 연구하는 교수는 2~3명 정도에 불과한데, 그나마 모두 근현대사 전공일 뿐 고대사나 고고학 전공자는 한명도 없다. 베트남에 대한 우리 역사학계의 관심은 베트남전을 둘러싼 현대사를 제외하면 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세기 후반 다이비엣(大越)국 리(李)왕조의 리롱뜨엉(李龍祥) 왕자가 고려로 망명하여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사실이 추가된 정도다. 하노이를 방문한다면 다이비엣 역대 왕조의 왕성이자 리롱뜨엉이 출생하였다고 전해지는,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한 탕롱(昇龍)성을 방문해볼 만하지 않은가?
“다낭과 호이안 일대의 베트남 중부에서는 참파(Champa), 혹은 임읍(林邑)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였다. 함안 2년(372) 정월에 백제와 임읍의 왕이 각기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해 6월에 백제왕 여구(근초고왕)를 진동장군영낙랑태수에 봉하였다.”
일본 규슈 지역의 옹관 모습. 비스듬하게 묻은 게 특징이다. 권오영 교수
백제가 중국의 동진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체결한 이 사건은 한국 고대사에서는 상식 중의 상식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임읍에 대해 궁금증을 갖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기원전 111년, 한나라 무제가 베트남 북부에 설치한 3개의 군(이른바 교지삼군) 중 가장 남쪽에 있던 일남군의 외곽에서는 사후인(Sa Huynh: 기원전 6세기~기원후 2세기 사이에 번성한 금속문명) 문화를 기반으로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일파인 참(Cham)족이 성장하고 있었다. 베트남 중부에서 발전한 사후인 문화는 청동기와 철기 등 금속기의 사용, 대형 옹관의 존재, 작은 유리구슬로 구성된 장신구의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대형 옹관은 베트남 중부-중국 광시(廣西)성과 광둥(廣東)성-한반도 서남부-일본 규슈(九州) 북부를 무대로 발전하였다. 베트남과 중국의 옹관이 곧바로 세워두는 방식인 데 비하여 한반도는 눕히고, 규슈는 비스듬히 두는 방식이다. 옹관의 형태도 같지는 않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신을 대형 항아리에 모신다는 관념은 동일하다. 공교롭게도 이들 옹관묘의 분포 범위를 따라 포타시(Potash) 유리가 퍼져나갔다. 포타시 유리는 융제로서 포타시(칼리: 칼륨화합물)를 사용하여서, 고(高)알루미나 소다 유리와 화학조성이 다른 부류이다. 기원후 3세기 이후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대유행한 고알루미나 소다 유리가 부남이란 해상왕국과 관련이 있다면, 그 이전에 유행한 포타시 유리는 사후인 문화, 옹관묘 분포권과 관련되어 있다.
참파산 침목이 백제 거쳐 일본으로
사람 얼굴을 조각한 수막새도 옛 베트남 지역에 있던 참파, 한반도의 백제, 중국의 동진·동오 유적지에서 나오고 있다. 사진은 참파의 왕성이었던 짜끼에우에서 나온 수막새들. 권오영 교수
중국 난징에 있는 육조박물관의 인면 수막새기와. 권오영 교수
백제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인면 조각의 수막새 조각. 권오영 교수
참족(짬족)은 마침내 기원후 2세기 말 건국에 성공하는데 이것이 임읍, 즉 참파(짬파)이다. 참파는 남쪽의 부남과 경쟁하면서 마침내 372년 동진과 정식 국교를 맺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참파의 왕성은 현재 다낭시 외곽에 있는 짜끼에우(Tra Kieu) 유적이고, 종교적 성지는 미선(My Son) 사원, 무역항은 호이안(Hoi An)이다.
짜끼에우성은 평지에 축조된 장방형의 성인데, 중국과 인도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어서 해상무역으로 번성한 참파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수막새기와가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그 원형은 육조(동오, 동진, 송, 제, 양, 진)의 도성이었던 건강성(현재의 장쑤성 난징)에 있다. 건강성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얼굴을 표현한 동오-동진 대의 수막새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동북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백제 왕성인 풍납토성에서 그 영향을 받은 수막새기와가 발견되었다. 참파와 백제의 왕성에서 육조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 동시에 출현한 것이다.
미선 유적은 7~13세기 무렵에 축조된 40기 정도의 힌두교, 불교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는 베트남 전쟁 중에 미군의 공습에 의해 파괴된 사원도 있는데, 전쟁이 끝난 뒤 복구작업 중 불발탄이 폭발하여 희생자가 발생하는 비극도 있었다. 미선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미선 유적을 조사한 프랑스 학자들은 사원을 장식하던 수많은 조각상들을 떼어서 다낭 시내의 참(Cham)조각박물관에 보관, 전시하였다. 그중 압사라(Apsara: 힌두교식 신화에서 등장하는 물의 요정)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참파와 고대 한국은 서로 접촉이 없었을까. 372년 동진에서 양국의 사신은 서로 조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파와 동북아시아의 관계는 그 뒤에도 지속된다. 595년 일본 오사카 앞바다의 아와지섬(淡路島)에 침목이 표류하다가 도착하였다. 침목은 고급 목재와 향목으로 사용되었는데 참파가 주요 생산지이다. 이 침목은 백제를 경유하여 일본열도에 유통되던 물품으로 추정된다. 침목은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귀한 목재로 취급되었는데, 역시 참파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641년 일본에서 백제 사신과 분쟁을 겪었던 곤륜(崑崙) 사신도 참파의 사신일 가능성이 높다. 736년에는 참파 출신의 승려 불철(佛哲, 佛徹)이 나라(奈良)의 다이안지(大安寺)에 거주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범어와 임읍악(참파 음악)을 전해 주었다.
현재는 베트남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참족 남성의 모습. 베트남 민족학박물관. 권오영 교수
참파는 8세기 후반~9세기 전반에는 환왕(環王), 9세기 후반 이후에는 점성(占城)이라 불렸다. 점성은 바다를 통해 이슬람 세계와 연결되었으며, 중국의 무역 도자를 중개하였다. 호이안의 각종 박물관에는 그 흔적이 전시되어 있으며,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거주하던 시가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과연 고려와 조선의 상인들은 호이안을 방문하였을까? 혹시 그들의 활동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못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젊은 세대가 다낭과 호이안을 방문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파는 10세기 이후에 베트남 북부의 다이비엣, 캄보디아의 진랍(眞臘: 크메르)과 치열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캄보디아 시엠립의 앙코르와트에는 수리야바르만 2세와 전투를 벌이는 적군으로서 참파 군대가 묘사되어 있다. 참파는 영토와 중심지의 변화를 겪었지만 쉽게 망하지 않고 1832년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우리와 너무 비슷한 베트남 역사
A는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유사 이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으며 한편으로는 문화적 영향도 많이 받았다. 13세기에는 몽골군의 침략을 받는 큰 위기를 받았으나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쌀을 주식으로 하며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중국 세력의 팽창으로 인해 점차 영토를 상실하고 현재는 반도로 밀려났으나, 한때는 현재 중국 영토의 일부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 땅에 있는 고대의 영토에 대해 고토란 의식을 지니고 있고, 중국과 역사분쟁, 영토분쟁을 겪고 있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자존심이 강하며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다. 근대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해방되었으나 곧 남과 북이 분단되어 내전을 겪기도 하였다. 당시 전쟁의 참상과 양민학살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A는 어느 나라인가? 대한민국이기도 하고 베트남이기도 하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이렇듯 유사하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면, 한국사 연구에서 베트남에 대한 비교 연구가 필수적이지 않을까? 아직도 한국 고대의 대외관계사는 한-중 관계, 한-일 관계가 전부이고, 근대 이후에야 그 범위가 확대된다고 믿는 역사학자가 많다. 최근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장을 발판으로 우리의 활동무대가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역사 속의 우리 이웃이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일대일로로 상징되는 중국의 팽창주의적 국제 전략을 모방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방식은 유라시아 각지에 분포하는 다양한 우리의 이웃들과 상호 존중과 신뢰를 토대로 서로 발전하는 길이다. 그 첫번째 대상이 베트남임을 우리의 역사와 현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에 대한 깊은 이해는 대한민국이 정치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의 돌풍은 현재도 진행형이지 않은가! 박항세오!!! 베트남 꼬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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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가 주변국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사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참파의 무역항이었던 호이안의 현재 모습. 권오영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