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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왜 학문 칸막이 허물어야? 서로 섞을 때 창의성 나와요”

등록 2018-07-23 18:49수정 2018-09-03 14:18

[짬] 연세대 철학과 이승종 교수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

연세대 철학과 이승종 교수는 지난 20일 기자와 인터뷰를 앞두고 연구실 탁자 위에 녹음기를 올려놓았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학술 토론이나 대화 내용은 꼭 녹음했단다. 녹음 자료는 그가 지금껏 낸 책들의 자양분이 됐다. 최근 낸 책 <동아시아 사유로부터-시공을 관통하는 철학자들의 대화>(동녘)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서양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을 전공한 저자가 유가와 불교, 도교, 정약용의 사유를 새롭게 들여다본 글이 절반이며, 나머지는 여기에 대한 논평문과 토론 대화 글이다. 대화자의 전공도 서양철학을 비롯해 동양철학, 사회학, 경제학, 물리학 등 다양하다. 이름난 석학도 있고 대학원생도 있다. “제가 전에 낸 세권의 저술(<비트겐슈타인이 살아있다면:논리 철학적 탐구> <크로스오버 하이데거:분석적 해석학을 향하여>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도 모두 이런 방식으로 썼죠.”

서양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전공에도
동양과 서양간 철학적 대화 열정
“근대 이후 철학 ‘분과화’ 장벽 쌓아
한국 철학계도 대화나 융합엔 소홀”

소설 ‘싯다르타’가 철학으로 이끌어
”편견 내려놓아야 세상 제대로 봐”

이승종 교수의 최근 저서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표지.
이승종 교수의 최근 저서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표지.
공자와 제자의 대화를 기록한 <논어>나 플라톤의 대화 편을 기억한다면 이 교수의 이런 작업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1993년 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내가 품었던 기획인 ‘동서 간의 철학적 대화’를 가급적 은밀히 추진하기로 맘먹었다.’ 당시 한국 철학계가 동양과 서양철학의 대화를 금기시하고 있어 이런 시도가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근대 이후로 학문의 분과화가 가속화되었죠. 동양도 사정은 비슷해요. 동양과 서양철학, 서양철학 안에서도 대륙과 영미 철학 사이에 장벽이 높아요. 그 사이에도 여러 장벽이 촘촘하죠. 이러다 보니 장벽의 월경은 위험한 것으로 금기시되었죠.”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던 학문인 철학의 본래적 통합성이 학문의 분과화 과정에서 와해되어 갔다는 것이다.

그가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되고 22년이 지났다. 지금은 어떠냐는 질문에 “노코멘트”라는 답이 돌아왔다. “미디어는 융합적 사유와 학제 간 연구를 강조하지만 학계나 대학에서 그런 시도가 진정성 있게 이뤄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책엔 그가 한 동양철학자의 박사 논문을 비판한 글과 이에 대한 반론이 실려 있다. “제가 논문을 읽고 먼저 이메일을 보냈어요. 그 뒤 답이 와 같이 실었죠.” 대화의 장점은? “사람은 저마다 달리 조건 지어진 유한자이죠. 각자의 한계를 넘기 어려워요. 하지만 대화자의 눈을 통해 세상과 텍스트를 달리 보는 대리 체험을 할 수 있어요. 이를 통해 자신의 이해 경계를 깨뜨려 변화의 계기를 얻기도 해요. 누가 옳고 그른지는 2차적 문제죠. 제가 대화를 제 말로만 매듭짓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죠. 차이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철학 내부의 칸막이를 허물면 실익이 뭘까? 그는 창의성을 이야기했다. “창의성은 학문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동양의 전통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신’이 창의성입니다. 창의성이 전무후무한 새로움은 아닙니다. 성경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고 했죠. 전에 있던 것들을 재구성하고 서로 섞을 때 창의성이 나오죠. 다른 방식으로 섞을 때 새로운 것이 나옵니다. 그 섞음이 곧 융합이죠.”

그를 철학으로 이끈 안내자는 고교 때 읽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였다. “헤세가 이 책에서 보여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너무 진정성 있게 다가왔어요. 제가 가야 할 길을 보여준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죠.” 1985년 대학원을 다닐 땐 직접 법정 스님을 찾아 출가 결심을 밝히기도 했단다. “수행이 빠진 대학 철학 교육에 실망했어요. 스님이 제 말을 듣고 절도 속세고 중도 속인이라면서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정진하라고 했죠. 스님 눈빛이 너무 추상같아 거역할 수 없더군요.” 2015년 안식년엔 미얀마를 찾아 한 달 가량 수행을 했단다. 출가하지 않은 건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수행에 대한 갈망은 식지 않은 것이다.

그는 책에서 공자의 사상을 ‘2인칭(너)을 섬기는 사유’로 해석해 논증했고, 장자는 차이를 해체해 균형과 대긍정에 이르려 한 사상가로 높이 평가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3인칭 시점 철학의 이념은 객관성이며 세계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추구한다. 반면 1인칭 철학의 이념은 주관성이다. 또 이론 대신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서술을 추구한다. 쉽게 만나기 힘든 두 철학의 화해에 도전한 이가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란다. 비트겐슈타인이 주저 <논리-철학 논고>에서 1인칭 철학의 하나인 ‘유아론’과 3인칭 철학의 하나인 ‘경험적 실재론’을 화해시켰다는 것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대화체로 이뤄져 있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주저 <철학적 탐구>는 1인칭이나 3인칭 시점이 아니라 2인칭 시점에 의해 형성된다.’

이 교수는 공자가 실존했던 실명의 제자들과 나눈 실제 대화를 기록한 <논어>에서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각기 다른 원인별 처방을 내리는 공자의 모습에 주목했다. 아버지라도 도둑질을 했다면 고발해야 한다는 섭공과 달리 공자는 아버지를 숨겨주는 자식의 모습에서 정직함을 본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3인칭 관계와 구별한 것이다. 하지만 2인칭 철학의 상대 의존성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어렵게 한다. 이 교수는 공자가 ‘예’를 통해 1인칭과 2인칭 관점이 빠지기 쉬운 주관성과 상대성의 극복을 꾀하려 했다고 풀었다. 공자는 예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는 장자와 데리다를 묶어 논한 글에서는 ‘차이조차도 해체하려는’ 장자의 사유에 초점을 맞춘다. <장자> 제물론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저것과 이것이 그 대립을 없애버린 경지, 이를 도추(도의 지도리)라고 한다. 지도리이기 때문에 원의 중심에 있으면서 무한한 변전에 대처할 수 있다. 옳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며, 옳지 않다도 하나의 무한한 변전이다. 그러므로 (시비를 내세우는 짓은) 자명한 차원에 비추어 보느니만 못하다고 한다.” 이 교수는 장자의 해체는 “대긍정의 도추와 자명한 차원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요 치료제일 뿐”이라면서 덧붙였다. “다가오는 무한한 변전에 순조로이 응하기 위해 자신을 다시 한 번 해체하고 무화하는 것만이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문과 같은 것이다.” 그는 데리다도 해체 작업이 스스로의 해체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음을 인정했지만, 이 가능성은 데리다 자신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을 전공한 서양철학자의 동양 철학에 대한 이런 친화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도 제 몸과 마음의 계보학적 주소가 동양임을 잊어본 적이 없어요. 저를 철학의 길로 이끈 <싯다르타>는 인도 불교 사상을 보여줍니다. 이 두 점이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과 친화력을 간직시켜주었죠.” 그는 동·서 융합적 사유의 경지를 높인 한국 철학자로 박동환 연세대 명예교수와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를 꼽았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저를 가르치신 박동환 교수님과 저술을 통해 알게 된 김형효 교수님이 저의 멘토입니다.”

이승종 교수.
이승종 교수.
재작년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주저 <철학적 탐구>(아카넷)를 번역했다. 20년이 걸렸단다. “너무 힘들어 더는 번역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최근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와 한국칸트학회 쪽이 맞서고 있는 칸트 저술 번역 논란을 두고는 “번역은 뜻이 통해야 합니다. 이것 한마디면 충분해요. 원의를 훼손하지 않는 것과 가독성은 양립 가능합니다”고 했다. “번역자는 번역한 작품으로 말하면 됩니다. 예술가가 예술작품으로 말하듯이 말입니다. 칸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순수이성비판>의 (한국칸트학회 쪽) 새 번역이 나오면 기존(백종현 교수)의 번역과의 우열이 갈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 시대, 철학의 가치는?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했는데 그는 자신을 단죄한 아테네 시민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음을 역설한 바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그리스의 격언은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결국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말입니다. 불교 철학의 핵심인 연기론의 12단계 중 첫 단계도 무지입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철학은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는 무엇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안다는 편견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부처가 강조한 무지의 자각은 편견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 사람은 편견 덩어리입니다. 장자는 그 편견을 성심(成心)이라 불렀는데 그의 철학도 성심의 해체를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편견은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생겨난 이데올로기인데 사람들은 거기에 사로잡혀 그것대로 살아갑니다. 우선 그걸 내려놓아야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풍성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계획을 물었다. “<우리와의 철학적 대화>라는 가제 아래 우리 사회의 학자와 예술가들에 대한 연구와 대화를 담은 원고를 준비 중입니다. 김형효, 박이문 등의 철학자를 비롯해 미학자 고유섭, 소설가 서영은 등이 주요 등장인물입니다. <철학적 동역학>이라는 가제 하에 동역학의 ‘역’자를 힘(力), 변화(易), 시간(曆), 역사(歷) 이렇게 네 동음이의어로 풀고 아우르는 원고도 준비 중입니다. 그러나 이번 책이 그랬듯 저 원고들이 책으로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을 두고 “아침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논어>의 명제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했다. “철학이 분과 학문이 되고 철학자가 철학 교수라는 직업으로 변모한 현대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존재는 불편한 충격이자 절망 속의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의 철학에 끌린 것도 거기에 녹아 있는 구도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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