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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동정과는 다른, ‘복잡한 현실’ 헤쳐나가야 하는 사랑

등록 2018-03-18 09:46수정 2018-03-18 10:58

[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⑬ <논어>와 사랑(仁)
가상의 유토피아 도시를 무대로 그린 어설라 K.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며>에서 사랑을 발명한 대가는 풍요의 가짜 낙원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는 것이다. 사진은 오멜라스를 모티브로 삼은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 ‘봄날’의 한 장면.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상의 유토피아 도시를 무대로 그린 어설라 K.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며>에서 사랑을 발명한 대가는 풍요의 가짜 낙원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는 것이다. 사진은 오멜라스를 모티브로 삼은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 ‘봄날’의 한 장면.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이영광, ‘사랑의 발명’)

신형철의 아름다운 글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한겨레> 2016년 8월12일치 13면, 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6477.html)에 따르면, 이 시는 어느 취객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마음을 그린다. 지독한 음모에라도 휘말린 것인지, 아니면 원통한 실직이라도 하게 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예기치 못하게 절필해야 하는 상황에라도 처한 것인지, 누군가는 만취해 버렸다. 그는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이제 더는 살지 못하겠다고 스스로 구덩이에 들어가 하늘을 보고 죽음을 청하려 든다. 그러한 자살 행위는 “신이라는 가장 결정적인 관객을 염두에 둔 최후의 저항”이자 “인간이 무책임한 신을 모독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갑자기 음모로부터 풀려나거나, 직장으로 복직하게 되었거나,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신이 강림하여 절망에 빠진 그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다. 기적은 화자가 그에게 동정심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절망에 빠진 그를 바라보다가, 화자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 죽을 사람”이 다름 아닌 “내가 곁에만 있으면 살 사람”이기에, 이 사람을 계속 살게 하고 싶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그는 사랑을 발명한 것이다. 신형철이 보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동정과 사랑은 동의어이다. 이리하여 이 시는 단지 술집에 절박하게 마주 앉아 있는 연인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사 이래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 같은 이야기가 된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랑의 기적

올해 초 작고한 작가 어설라 K. 르귄도 ‘오멜라스를 떠나며’에서 사랑의 발명과 유사한 기적을 묘사한 바 있다. 이제 기적이 일어나는 배경은 취객이 모여 있는 어두운 술집이 아니라, 꿈에도 그리던 복지사회가 구현된 밝은 도시이다. “울려 퍼지는 즐거운 종소리가 도시를 휘감고 지나며 달콤한 음악이 되어 들려왔다.” “주식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 폭탄도” 없기에, 이러한 복지사회는 마치 기적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단 한 명의 아이가 어두운 지하실에서 박약한 상태로 가두어져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나머지 모든 사람은 풍요를 구가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달콤한 풍요가 바로 그 아이의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자신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풍요로운 삶을 기꺼이 누린다. 아이 한 명은 지하실에서 고통받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에.

그러나 여기에도 진짜 기적이 일어난다. 갑자기 아이가 지하실에서 풀려나거나, 신이 강림하여 아이를 구원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군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고통받는 아이를 보고서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서 있다. 그 고통받는 아이를 뇌리에서 지울 수 없기에, 그는 오멜라스를 떠난다. 그런 식으로 오멜라스의 이상한 풍요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기적이다. 그들은 모두 침묵 속에 묵묵히 한참을 서 있다가 그길로 오멜라스를 떠난다. 그들은 아이를 희생한 대가를 치르고 주어지는 풍요를 더는 받아들일 수 없기에, 다시는 오멜라스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을 발명한 대가는 풍요의 가짜 낙원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는 것이다.

어설라 K. 르귄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고통에 처해 있는 아이의 이미지는 이토록 강렬하다. 그래서일까.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 피터 싱어 역시 자신의 윤리적 비전을 개진하기 위하여 고통받는 아이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이번에는 지하실에 갇혀 고통받는 아이가 아니라, 물에 빠져 죽어가는 아이의 이미지이다. 피터 싱어는 <당신이 구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저서에서 도덕적 책무에 대한 논의를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출근길 연못을 지나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이를 발견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그 아이를 구하려 든다면, 그 과정에서 당신의 옷은 젖고 직장에 결국 지각하고 말 텐데. 피터 싱어가 응용윤리 수업시간에 그러한 질문을 던지면, 대개의 학생들은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까짓 옷이 젖는 것이 대수이랴. 그까짓 한두 시간 지각이 대수이랴.

신의 무정함을 깨달은 사람들이
신의 가호에 대한 대안으로,
즉 일종의 자구책으로
인간의 사랑(仁)을 발견한 건 아닐까?
이영광의 시에서 나오는 화자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발명해온
인류의 긴 역사의 한 부분에
<논어>를 위치시킬 수도 있다

피터 싱어가 그러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 중국 고대의 사상가 맹자 역시 그와 유사한 사고 실험을 했다. 이번에는 연못이 아니라 우물이다.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았을 때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라고 맹자는 물었다. 그리고 피터 싱어의 응용윤리 수업을 듣는 학생들처럼,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다들 그 아이를 즉각 구하려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을 동정심을 발휘하여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려 들 것이라고. 그러니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라고 한 가브리엘 마르셀은 타당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동정한다는 것은, 그 순간 그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다. 당신은 죽지 않아도 돼! 신형철에 따르면, “마르셀의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너를 살리겠다는 뜻인 동시에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나도 존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존재해야만 해! 즉 이 사랑은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맹자 역시 이러한 동정심의 실현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생각했다.

신의 가호에 회의를 품게 된 시대

맹자의 이 유자입정(孺子入井, 아이가 우물에 빠짐)의 사고 실험은 중국 고대의 인성론(人性論)을 논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유자입정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는 <논어> ‘옹야’(雍也) 편에 이미 보인다. 공자의 제자 재아는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인한 사람은 우물 안에 사람(혹은 仁)이 있다고만 하면, 따라 들어가겠죠?”(仁者雖告之曰井有仁(人)焉其從之也) 이 질문에서 사랑 혹은 동정을 느끼는 사람은 인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인(仁)은 <논어>에서 자주 쓰이는, <논어>의 세계를 대표할 만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지만 공자가 인이라는 개념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조방과 같은 학자가 지적했듯이, 인이라는 용어는 전국시대의 문헌에는 흔히 나타나지만, 그 이전 서주 시대 문헌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즉 인은 기원전 5세기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주 쓰이게 된 용어이다. 공자는 바로 그 시대의 사람, 즉 인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기 시작한 세대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세대는 바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신의 가호에 의지하는 일에 회의를 품게 된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의 무정함을 깨달은 당시 사람들이 신의 가호에 대한 대안으로, 즉 일종의 자구책으로, 인간의 사랑(仁)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마치 이영광의 시에서 나오는 화자처럼.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발명해온 인류의 긴 역사의 한 부분에 <논어>를 위치시킬 수도 있다.

이영광의 시는 다행히도(?) 사랑이 발명된 순간 끝난다. 그러나 일단 발명된 사랑은 이 세상에 남겨져 현실 속을 살아가야 한다. 그 현실은 사랑의 발명가들이 미처 던지지 않은 다른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술집에서 취하여 죽어버리겠다던 사람은 그다음 순간 토해서 주변을 더럽히지 않았을까? 고약한 주사를 부리지 않았을까? 사랑을 발명한 그 다음날 숙취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술값이나 제대로 지급했을까? 사람들이 “더러운” 사회계약을 파기하고 마침내 오멜라스를 떠나고 난 뒤, 그 지하실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작 동정심과 정의감을 불러일으킨 그 아이는 여전히 고통 속에 있지는 않을까? 오멜라스를 떠나버린 사람들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결국 정주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까? 정주했다면 그들은 지하실 없는 복지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어떤 사회계약을 만들었기에 그것이 가능했을까?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철학자 피터 싱어는 고통받는 아이의 이미지를 끌어와 인간의 도덕적 책무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한겨레> 자료사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철학자 피터 싱어는 고통받는 아이의 이미지를 끌어와 인간의 도덕적 책무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한겨레> 자료사진

두 아이가 동시에 우물에 빠진다면…

피터 싱어가 말한 것과 같은 사건이 실제로 2007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연못에 정말 빠졌던 것이다. 그런데 달려온 경찰은 관련된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못에 들어가서 아이를 구해내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아이는 죽고 말았다. 물속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조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가며 물속에 뛰어들어야 하는가? 재아가 “인한 사람은 우물 안에 사람(혹은 仁)이 있다고만 하면 따라 들어가겠죠”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자는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우물 속으로 뛰어들지는 않는다.”(君子可逝也不可陷也) 즉 공자에 따르면, 단순히 동점심에 휩싸여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16세기 중국의 정치사상가 왕정상(王廷相)은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묻는다. 두 아이가 동시에 우물에 빠지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동시에 두 아이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느 쪽 아이를 우선해야 하죠? 우선을 정하는 기준은 무엇이죠? 그 기준은 누가 정하죠?

이러한 질문이 쏟아지는 복잡한 정치 현실 속에서, 동정과 사랑은 더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정서적인 격동을 좀더 섬세하게 구별하기 시작한다. “소고기 사주는 사람을 주의하세요.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입니다.” 돼지고기를 사주기 위해서는 동정심 정도로 충분하지만, 소고기를 사주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혹은, 돼지고기를 사주는 이는 “순수한” 동정심에서 그러는 것이지만, 소고기를 사줄 때는 뭔가 정치적 속셈에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혹은, 동정심은 처지가 좀더 나은 사람이 처지가 열악한 사람에게 베푸는 시혜이기에 결국 불평등을 조장하는 감정은 아닐까? 인간의 “사랑”은 이러한 질문들로 가득한 복잡한 정치 현실 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언젠가 정치라는 우물에 빠진 사랑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는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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