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탄생 100돌을 기려 지난 12월30일 찾은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 동산(東山)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와 묘비. 무덤 왼편으로 이름 모를 묘소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종사촌이자 평생의 벗인 송몽규의 무덤이 있다.
1931년 늦가을, 윤동주 가족은 그가 태어난 명동촌 제일 큰 기와집을 떠나 도회지인 용정시의 작은 초가집으로 이사한다. 큰고모 아들인 송몽규까지 포함해 여덟 식구가 함께한 그 초라한 집에서 동주는 용정 은진중학교를 다녔고, 서른여 편의 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2월30일 북간도 용정의 야트막한 산에 자리한 공동묘지, 탄생 100돌을 기려 찾은 ‘동주’의 무덤은 을씨년스러웠다. ‘시인윤동주지묘’. 오랜 비석에 겨울 햇살이 따사롭지만 떼 하나 없는 맨흙의 봉분이 자아내는 스산함은 한동안 마음을 헤집었다. 영화, 연극, 출판 등 근년에 분 국내의 ‘동주 열풍’과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 행사의 하나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이도백하에서 열린 ‘윤동주 그의 시대’ 토론회는 쓸쓸한 무덤만큼이나 동주에 대한 기존 시선에 여러 물음을 낳게 했다. ‘순결하고 유약한 문학청년, 민족독립에 힘쓴 위대한 저항시인’이란 오랜 숭모는 어느새 게으른 통념이 되어 오히려 그를 신비화하거나 ‘만들어진 고전’이란 식의 무시를 부추기는 기제가 돼온 건 아닐까? 한국과 조선족자치주를 넘어 일본에서도 그의 시가 교과서에 수록되고 애송되는 까닭은 또 무얼까?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발표에서 다른 시선의 동주를 전하며 실마리를 던져줬다. “시어를 철저하게 자신으로부터 출발해 나를 사랑하고 맹자의 여민동락을 노래한 시인”으로서의 동주다. 또 “과부나 고아, 난민을 사랑하고 복선 철도노동자, 여성노동자 등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한” 동주다. 실제 그의 산문 <종시>에는 노동자를 “건설의 사도”라거나 “땀과 피를 아끼지 않는다”고 예찬한 구절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뭇 시인과 달리, 사라져 가는 한글로 작품을 쓴 “한글 사랑 시인”과 “평화를 애호한 잔혹한 낙관주의자”로서의 동주도 인상적이다.
1931년 늦가을, 명동촌을 떠나 평생의 벗인 ‘몽규’를 포함한 여덟 식구가 함께 지낸 용정의 초가집터가 보여준 메마른 풍경은 귀국해서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생전에 그가 서른여 편의 시를 쓴 곳으로 추정되는 그곳은 지금 낡은 합판을 덧대 지은 가건물과 휑뎅그렁한 빈터로 남아 있다.
이창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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