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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미국·한국 정치 포퓰리즘 우려…잘못땐 시민 깨어나 행동해야”

등록 2023-09-19 09:00수정 2023-09-19 09:10

박명림 교수-존 던 교수 ‘민주주의 위기’ 대담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연세대 인간평화와치유연구센터 소장)와 존 던 케임브리지대학교 명예교수가 13일 오후 서울 중구 더 플라자호텔 회의실에서 대담하기에 앞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연세대 인간평화와치유연구센터 소장)와 존 던 케임브리지대학교 명예교수가 13일 오후 서울 중구 더 플라자호텔 회의실에서 대담하기에 앞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정치사상계의 대가로 손꼽히는 존 던 영국 케임브리지대 명예교수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지난 13일 만나 양극화와 포퓰리즘, 국제정세 등으로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와 이를 타개할 ‘정치적 지도력’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던 교수는 김대중, 빌리 브란트, 넬슨 만델라 등 3명의 정치 지도자를 집중 조명하는 ‘평화와 통합의 세계 지도자: 김대중·브란트·만델라’ 학술대회 참가차 최근 방한했다.

박명림(이하 박) 오늘의 세계는 국내적으로는 많은 나라들이 심각한 양극화와 포퓰리즘에 빠져 있고, 국제적으로는 미-중 갈등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진영대결이 심화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더해 식량, 에너지, 대감염병, 그리고 기후변화 문제도 심각하다. 인류가 복합적인 다중위기에 접어든 상황이다.

존 던(이하 던) 인간의 삶은 배우는 과정이다. 그런데 정치적 학습에서 인간은 특히 더디다. 인류는 지금 인간 종으로서도 국민으로서도 매우 어렵다. 이 상태가 이어지면 국가도, 인류도 생존하기 어렵다. 위기의식이 없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위기 상황을 이해하지도, 이 상황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선순위를 정확히 파악하여 소통할 수 있는 ‘정치적 지도력’이 필수적이다. 기후위기 같은 전례 없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한다. 다만 체제가 안정돼 있고 구조화돼 있을수록 바꾸기 쉽지 않고, 바꾸려면 지불해야 할 대가가 따른다.

정치 지도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정치 지도자들은 대개 정치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권력 독점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번 국제회의에서 다룬 김대중, 빌리 브란트, 넬슨 만델라 같은 정치인들은 연립정부, 대연정, 국민통합정부와 같이 권력 공유를 통해 훨씬 더 큰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국가라는 실체를 통해 일정 기간 동안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이 정치이고, 이를 위해 개인들은 때로 경쟁하고 때로 연합을 이루며 국가 권력을 쟁취하려 노력한다. 정치인들은 최고 지위의 장악과 유지 자체를 목표로 삼을 수도, 최고 지위를 활용해 만들어낼 업적에 더 관심을 둘 수도 있다.

박 최근에는 전문 정치 영역 밖에서 정치적 지도력을 장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 같은 경우처럼 정치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지도자가 국가 권력을 쟁취하는 일이 잦아졌다. 트럼프는 기업인, 윤 대통령은 검사 출신이다.

던 아마추어 정치인이 정치에 뛰어들 수 있지만 최고의 자리를 획득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와 윤석열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서는 정치인은 보통 정치 영역 내부에서 성장해 올라간다. 그러나 한국, 브라질, 미국에서 보듯 대통령제 아래에선 직업 정치인 아닌 사람이 최고 권력을 잡기도 하며, 최근 그런 추세가 더 강해지고 있다.

존 던 케임브리지대학교 명예교수가 13일 오후 서울 중구 더 플라자호텔 회의실에서 대담하고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존 던 케임브리지대학교 명예교수가 13일 오후 서울 중구 더 플라자호텔 회의실에서 대담하고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정치는 모든 것을 아우르기 위한 조정 또는 조율의 기예다. 대화와 타협이 필수인 이유다. 내 생각과 다른 다수의 목소리에 따라야 할 때도 있다. 법이나 경제 영역은 그렇지 않다. 법의 경우 합법이냐 불법이냐, 시장의 경우 이익이냐 손해냐를 이분법적으로 가른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와 법치는 근본 원리 면에서 서로 다르다고도 말한다.

‘법치’란 말에서 ‘법’은 성문화되어 있는 규칙들을 가리키고, 법을 ‘집행’한다는 것은 성문화된 규칙들을 실행하는 과정이다. 이 규칙들은 입법이란 행위를 통해 안정화되어 있는 체계들이지만, 해석과 적용에는 늘 문제가 뒤따른다. 이와 달리 정치적 결정은 정치 행위의 실행자가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또 경쟁하는 당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회·특권·부를 가진 자들일수록 당사자가 되기 쉬워서, 내려진 결정이 시민들의 이해와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시민들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따라서 정치적 지도력은 어떤 법을 기초로 삼고 적용할 것인가, 또 그걸 실행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등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법은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고 정치적 판단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기도 한다. 명백히 정치적인 결정을, ‘법 집행일 뿐’이라며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종종 ‘우린 애국자, 너흰 반국가세력’이라고 규정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인데 이런 식의 흑백논리는 대화와 타협의 여지를 없앤다. 특히 대통령제처럼 한명의 지도자가 정치적 지도력을 독점하는 경우라면 이는 더욱 심해진다. 최근 ‘아래로부터의 포퓰리즘’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위로부터의 포퓰리즘’이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큰 위기를 낳고 있다.

정치적 지도력은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수호가 아니라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헝가리에서 심각하고 폴란드, 미국, 한국 등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미국 트럼프 모델이 더욱 퍼져나가고 있다. 김대중은 달랐다. 그는 예상을 뛰어넘고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오랜 분열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김대중 이후 한국은 심각한 분열의 길을 밟았다.

현재 권위적인 정치 지도자의 확산, 포퓰리즘의 확대, 정치적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 등에 ‘민주주의의 죽음’이라는 진단까지 나온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난점은 그것을 ‘민주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오늘의 세계는 과거 민주주의 속에서 전체주의가 대두했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를 단지 권력 경쟁의 구조나 정치 참여를 위한 수단으로만 이해하면 지금 상황은 희망이 없고 회의적으로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소통은 여전히 중요하고, 선거는 공론장을 여는 제도이다. 나는 ‘민주주의의 마법에서 깨어나라’(Breaking Democracy’s Spell)란 책에서 민주주의의 구조와 경로들이 많고 다양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각 사회마다 주어진 상황을 잘 이해하고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정치적 지도력은 다르게 발현될 수 있다. 이때 정치뿐 아니라 교육이 중요하다. 인간은 느리지만 결국 배워서 알게 된다. 집권자들이 별다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정치를 끌고 가며, 인상과 즉흥적 반응 중심으로 사람들을 이끌려고 할 때, 시민들은 깨어나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연세대 인간평화와치유연구센터 소장)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연세대 인간평화와치유연구센터 소장)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당신은 “교육자들이 교육받아야 한다” “지식인들이 긴급한 사회문제에 침묵하면 안 된다” 등 사회 교육과 학자의 책임 문제를 강조해왔다.

민주주의는 교육과 어우러질 때 가장 잘 발현된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에는 긍정적·부정적인 측면이 모두 있는데, 긍정적인 것은 민주주의는 인간의 지성을 활용해서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은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정치인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민주주의가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억압으로부터의 보호를 포함하여 민주주의 아래에선 최소한의 기능이 유지될 수 있다.

김대중·브란트·만델라를 조명한 이번 학술회의에서 당신은 ‘평화’라는 주제에 대해 간디, 보편적인 영구평화를 말하는 이마누엘 칸트 등보다 토머스 홉스의 철학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주권 국가에 기반한 평화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대내적 평화가 대외적 평화의 전제가 된다고 보는 편이다. 이것은 홉스와 칸트를 결합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근대의 ‘공화적 평화’ 구상도 이와 유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제적으로 충족시켜야 할 조건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인 영구 평화는 끝내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평화에 대해서는 홉스의 아이디어 외에 대안이 없다. 홉스의 평화 아이디어는 ‘구조’에 근거하는데, 그것은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이냐의 문제다. 국가를 포함한 모든 공동체는 그 구성원을 보호해야 하는 기본적인 의무를 지니며, 이로부터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의 결과로 그런 기본적인 의무마저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지금 정부가 스스로 우파라 주장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정부들은 시민을 보호하는 기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그저 자신들만 옳다고 얘기하고 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보편적인 평화가 아니라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하는 평화이다.

김대중·브란트·만델라의 경우 대내적으로 반대 세력과 함께 연합정부를 구성했고, 이를 통해 평화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김대중의 경우 국내 차원, 남북 차원, 한-일 차원이라는 세 층위의 심각한 적대를 화해와 공존으로 이끌어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김대중은 이상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현실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북한이 외부 세계와 연결되면 안정성이 흔들릴 것이라 보았다. 시간이 많이 걸려도 북한을 외부 세계와 연결해야만 북한 주민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북한의 체제는 배타와 고립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경직된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다.

기후위기는 오늘날 ‘기후응급상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박한 문제다. 지구에서의 ‘거주 가능성’마저 위협받는 상황이다. 세계와 인류 차원을 넘는 지구라는 행성 차원의 평화, 또는 인간 종과 다른 종과의 평화, 자연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강조하는 주장들이 계속 제출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모든 종에 적용할 수 있는 ‘평화 의지’이다. 생물다양성에 대한 위협과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수단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문명이 과연 지금처럼 거대한 규모로 지속될 수 있느냐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가지 행위들을 문명화된 방식으로 고도로 조정해야 하는데, 조정 행위가 바로 정치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육도 힘을 보태야 한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막중하다. 국가 영토의 스케일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정치와 리더십이 필요하다. 시간적 제약이 있으므로 결과도 빨리 내야 한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정치적 지도력들의 역량은 아직 트럼프 수준에 머물고 있다.

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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