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가운데)과 기종(왼쪽), 위종 3부자가 1900년 5월 프랑스에 도착한 직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이원갑 이범진열사기념사업회장이 소장한 사진으로 정병준 교수가 이번 논문에서 처음 공개했다. 이원갑 회장 제공
“아버지(이범진)와 동생(이위종)의 해외 독립운동을 국내에서 지원한 이기종(1873~1938)은 안중근 의거 때 일제에 체포돼 심한 고문으로 정신이상에 걸려 마침내는 노상객사한 인물이죠. 아버지와 동생은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한 충군애국지사이자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얻었지만 이기종은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지난 28일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만난 정병준 사학과 교수는 지난해 말 석사과정 제자(김혜령)와 공저한 논문 ‘이기종의 생애와 주요 활동-알려지지 않은 이범진‧이위종의 동반자’를 두고 “이기종을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첫 논문”이라고 소개했다.
“정승 집안 자제 이석영은 한말의 재벌이었지만 독립운동에 재산을 다 내놓고 상하이 빈민가에서 아사했잖아요. 이기종도 집안의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집안을 지키다 ‘멸문지화’를 당했죠.”
이승만과 독도, 한국전쟁 연구자로 이름이 높은 정 교수는 현대사 자료 발굴을 통해 “역사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시대와 조우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인물의 행적을 복원하는 데도 힘을 쏟아왔다. 3·1운동의 주역 현순 목사의 맏딸로 한국전쟁 뒤 북한에서 미국 스파이로 몰려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현앨리스(1903~1956?)의 생애를 다룬 책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2015)이 대표적이다.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김범우의 실존인물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박순동이나 일제 때 항일학생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역사학자 김성칠도 그가 글로 복원을 시도한 인물들이다.
정병준 교수가 연구실에서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이기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러공사로 경술국치 1년 뒤 순국자결한 이범진(1852~1911)의 장남이자 헤이그밀사로 활약한 이위종(1884~?)의 형이다. 부친을 따라 미국과 러시아 등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던 이기종은 1902년 귀국해 부친과 고종을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한편, 대한제국 군부 포공국장과 법부 법무국장 등 고위 관직을 지냈다.
고종의 총애를 받던 삼부자의 운명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으면서 바뀌게 된다. 1904년 9월 이범진은 주러공사에서 면직됐고 이기종도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범진은 면직 뒤에도 고종의 밀명으로 계속 러시아에서 고종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위종은 헤이그 특사로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 부친과 동생의 이런 항일 활동은 국내에서 가족과 가산을 지키던 이기종에 대한 일제 통감부의 감시와 압박으로 이어졌다.
그 정점은 1909년 안중근 의거 직후 일본 헌병의 이기종 체포였다. 일제는 최재형·안중근 등이 1908년 러시아 연추(크라스키노)에서 결성한 항일단체 ‘동의회’를 재정 지원한 이범진이 안중근 의거 배후에 있다고 보고 이기종을 끌고 간 것이다. “일제가 이범진이 의거에 개입했다고 본 데는 이범진이 이위종을 연해주로 보내 러시아 지역 한인 의병을 관리하도록 한 점이나 이범진의 연해주 지역 대리인이 안중근 의거에 함께 참여한 조도선이란 점 등이 작용했죠.”
논문에 인용한 러시아 문서를 보면 체포 뒤 돌려받은 이기종 외투 안쪽은 굳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고 석방 때 이기종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단다. “이기종은 100여일가량 일본 헌병대에서 고문과 심문을 당해 폐인이 되었어요. 석방 뒤에는 일제가 비호한 것으로 보이는 토지소송 등에 휘말려 집안이 몰락했죠.”
1938년 경성 길거리에서 객사해 화장 처리된 이기종은 부친·동생과 마찬가지로 묘가 없단다. “이범진 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는데 1958년 공동묘지 조성과정에서 사라졌고 이위종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죠.” 이범진·이기종 가계는 공식적으로 대도 끊겼단다. “이기종 세 아들 중 차남은 어려서 집안의 다른 친척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두 아들과 손자 둘 그리고 며느리는 불행히도 1950년 한국전쟁 때 사망했더군요. 폭격을 맞은 것 같아요.” 현재 이범진열사기념사업회장은 양자로 출계한 차남의 아들이 맡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 논문 주제로 ‘여운형과 좌우합작’, 박사 논문으로 이승만을 파고든 정 교수는 이르면 연말쯤 원고지 1만장 분량의 김규식 평전을 펴낼 계획이다. 지난 10년 집필에 매달려 이미 원고지 6천매가량을 썼고 올해 안으로 4천매를 더 쓸 계획이다. 이 책에는 가계도부터 시작해 김규식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이야기가 담길 것이라고 그는 전했다.
이범진 삼부자 중 알려지지 않은 장남
국내 가족 지키며 해외 독립운동 후원
마지막 주러공사인 부친과 고종 연결책
안중근 의거 때 체포…심한 고문에 폐인
두 아들 한국전쟁 때 사망해 대도 끊겨
“자료의 이야기 들려주는게 역사가 역할”
왜 김규식일까? “생애가 비극적이라 더 매력적이었죠. 제가 비극에 끌리는 타입이거든요. (좌우합작을 함께한) 여운형이 1947년, 김구가 1949년에 암살당하고 1년 뒤 납북돼 심장마비로 사망했잖아요.” 그가 첫 책에서 다룬 여운형은 어떨까. “매력적이죠. 여운형은 해방 후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노선을 추구한 사람인데 지금 와서는 이상주의자 혹은 기회주의자라는 평을 듣고 있어요. 해방 뒤 세계 체제에서는 미소가 대립했고, 한반도는 남북이 갈등했고 남한은 좌우가 대립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분단을 막고 통일을 이루려면 좌우합작과 남북연합, 미소협력을 추구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고 이성적인 노선이었죠.”
인물 연구와 사관은 어떻게 연결되느냐고 묻자 그는 “당연히 사관은 필요하다. 하지만 자유롭게 써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연구를 하다보니 옹호와 미화로 이어지는 연구들이 많다”며 덧붙였다. “인간은 누구나 약점이 있어요. 역사에서 큰일을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평범하거나 바보처럼 보일 때도 많죠. 예컨대 김규식도 둔하거나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인물 연구는 한 사람의 행위와 생각, 말을 그 시대의 요구와 사람들 움직임과 교직하며 보여주어야 합니다. 좌표를 잘 잡아야죠. 그게 바로 역사와 시대 연구이기도 하죠.”
정 교수는 작년 11월에는 월봉저작상 수상작인 <독도 1947: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2010)를 직접 영어로 옮겨 출간했다. “번역에만 10년이 걸렸죠. 한국어판이 나오고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한국 외교관 여러 명이 책을 완독하고 찾아왔어요. 국제사회에서 독도문제로 일본과 맞설 때 어떻게 논리를 펴야 하는지 고심하던 차에 제 책을 보고 반가웠다고요. 영문본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영토 독도’를 알리는 용도로 주로 활용될 것 같아요.”
사학자 정병준의 주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현대사 자료 발굴이다. 그가 새로 찾은 숱한 자료 목록에는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가 주한미군 방첩대 요원이었음을 보여주는 미군 문서와, 독도가 한국영토로 표시된 영국 쪽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초안의 부속지도도 들어있다.
자료에 대한 열정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대학 학부 때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글을 쓰려고 중앙도서관을 찾아 전국 시군지를 다 봤는데 모두 합쳐 20쪽도 안 되더군요. 그런데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을 보니 주한미군 군사실이 가지고 있던 한국의 군 단위 인민위원회 자료까지 다 보고 썼더군요. 깜짝 놀랐죠. 그때부터 미국 쪽 자료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자료를 찾으며 언제 가장 큰 희열을 맛봤느냐는 질문에는 <한국전쟁-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2006)을 쓸 때라고 했다. “북한 노획 문서와 러시아, 미국 문서를 하나씩 맞춰보는데 아귀가 떨어지더군요. 독도 책을 쓸 때도 그랬고요. 주장이나 평설보다는 자료를 찾아 그 자료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게 역사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죠.”
그는 2005년 <우남 이승만 연구>를 낸 뒤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비판을 받았단다. “보수는 이승만을 비판했다고, 진보는 왜 더 세게 비판하지 않았느냐고 하더군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승만의 공과는 몇대 몇이냐고 묻자 그는 “부질없다”며 이렇게 답했다. “그 시대에 누가 권력을 잡았어도 이승만보다 더 잘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김규식과 여운형에게는 (권력을 잡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거고요.”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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