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기념사업회 한옥동 이사
“조부모님께서는 어린 손자들을 대여섯 살만 되면 아침 6시쯤 어김없이 사랑방으로 불러 천자문과 품행을 가르쳤습니다. ‘너희 숙부를 본받아라. 불의에 맞서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정의와 신독(홀로 있을 때도 언행을 삼감)을 강조하셨습니다. 숙부님의 정의롭고 강직한 성품은 필시 이러한 조부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립운동가 한지성(1912~?) 조카 석동씨가 최근 나온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장 한지성의 독립운동 자료집>(김영범 편, 선인 출판사) 앞머리에 쓴 헌사 ‘일당백의 기백과 이사구국(죽음으로 나라를 구하다 뜻)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하신 지성 숙부님께’의 한 대목이다.
경북 성주에서 난 한지성은 1931년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양친에게 독립운동의 뜻을 밝히고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국민당의 인재양성 학교인 중앙정치학교를 4년 수학한 한지성은 1938년에 약산 김원봉이 의열단을 해산하고 만든 조선의용대에 합류해 정치조 선전주임과 외교주임 등을 지냈다. 1942년에는 서른살 나이에 김원봉 등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지역 의원으로 선출됐다. 한지성은 이어 1943년 8월부터 2년간 한국 광복군에서 영국군 요청으로 인도와 미얀마 대일 전선에 파견한 인면전구공작대(대원 9명) 대장으로 활약했다. 인·면은 각각 인도와 미얀마를 가리키는 한자어다. 영국군을 도와 일본군에 대한 대적선전·포로심문·문건번역 등과 같은 작전을 펼친 이 공작대는 광복군이 연합군과 함께 대일 군사작전을 펼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지성이 임정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결혼한 아내 안금생은 안중근 의사 동생인 공근의 차녀이다. 1946년 귀국한 한지성은 해방 공간에서 김원봉과 정치 행보를 같이하다 조국 분단을 막기 위한 1948년 남북 협상에 참석하려고 평양으로 간 뒤 북에 머물렀다.
한지성의 형님(고 한갑수) 자녀들(춘영, 석동, 춘희, 옥동, 창동)이 재정 부담을 하고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2년 동안 작업해 내놓은 이번 자료집은 한지성의 독립운동 행적을 보여주는 사료는 물론 한지성이 조선의용대 기관지 <조선의용대>에 중문으로 실은 글 17편을 비롯해 여러 간행물 기고 글도 알기 쉽게 우리말로 옮겨 담았다. 의열단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해제에서 “한지성은 <조선의용대> 주요필자 중 게재 횟수가 최상위권”이라며 “전투 현장에서 보고 들은 바를 쓴 글들에서 보이는 묘사의 구체성이나 현장감은 보고문학의 백미를 보여준 잭 런던이나 조지 오웰을 방불케 한다”고 평했다. 한지성의 <조선의용대> 기고 중에는 전투 중 사망한 일본군 수첩에 실린 일기를 번역한 글도 있다. 김 교수는 한지성의 <조선의용대> 기고는 모두 국내에 처음 소개된 글이라고 설명했다.
1943년부터 2년 동안 영국군 도와
인도 미얀마 전선서 일본군과 싸운
한지성 인면전구공작대장 다섯 조카
최근 숙부 독립운동 자료집 발간
조선의용대 기고 글 등 처음 소개 “모친 ‘명예회복’ 유지 따라 기념사업” 남쪽에 직계 후손이 없는 한지성의 조카 다섯은 2016년부터 숙부 기념사업에 나서 2년 뒤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기념사업회(회장 정홍규 신부)를 만들었다. 옥동씨와 창동씨가 이 단체 이사와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80년대 중반부터 숙부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한옥동 이사는 18일 전화통화에서 숙부가 아닌 인면전구공작대를 내세워 기념사업회를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숙부가 해방 후 행적 때문에 서훈을 받지 못해 숙부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사단법인 승인도 나지 않고 예산 지원도 받을 수 없죠. 2017년과 2019년 두 차례 서훈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해방 이듬해 한지성이 안중근 집안사람인 아내와 함께 15년 만에 고향을 찾았을 때 성주군과 면사무소는 독립투사가 돌아왔다고 성대한 환영식과 잔치까지 베풀어주었단다. 하지만 1948년 이후 한 이사 집안사람들은 민주화가 될 때까지 오랜 기간 연좌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도 조카들은 왜 숙부 기념사업에 발 벗고 나섰을까? 지난 15일 성주에서 치른 자료집 발간 기념식에는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과 이윤기 전 도산서원 원장 등 200명이 넘는 하객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한 이사는 이렇게 답했다. “모친이 2011년에 돌아가시면서 ‘직계 후손이 없는 숙부 명예회복을 너희들이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유지를 남기셨어요. 시어머니 한을 모친이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그의 숙부가 혁혁한 독립운동 공로에도 서훈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한 이사는 “5년 전에 숙부 생가터에 표지석을 만들었는데 앞으로 추가로 추모비를 세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집안 자랑으로 비칠 수도 있어 조심스럽다”며 숙부 서훈을 두고 이렇게 덧붙였다. “안중근 의사님, 김좌진 장군님, 김구 선생님과 같이 숙부보다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아 우리가 감히 나서기 그렇습니다. 하지만 숙부가 해방 후 행적 때문에 서훈을 받지 못하는 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서훈을 못 받더라도 숙부 같은 분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기렸으면 합니다. 자료집이 숙부를 널리 알리고 숙부 연구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인터뷰 끝에 그는 이런 바람도 드러냈다. “독립운동가 후손 대부분이 어렵게 생활하고 있어 정부 지원을 확대하면 좋겠어요. 또 정부가 관심을 갖고 잊혀진 독립운동가 발굴에도 신경을 썼으면 합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부분 고령이라 시간이 더 가기 전에 독립운동가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와 가족사를 모으는 것도 필요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한지성 대장(뒤 오른쪽 세째)이 인면전구공작대원 및 영국군과 함께 찍은 사진. 선인출판사 제공
독립운동에 나설 무렵의 한지성 선생. 선인출판사 제공
<한지성의 독립운동 자료집>. 선인출판사 제공
인도 미얀마 전선서 일본군과 싸운
한지성 인면전구공작대장 다섯 조카
최근 숙부 독립운동 자료집 발간
조선의용대 기고 글 등 처음 소개 “모친 ‘명예회복’ 유지 따라 기념사업” 남쪽에 직계 후손이 없는 한지성의 조카 다섯은 2016년부터 숙부 기념사업에 나서 2년 뒤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기념사업회(회장 정홍규 신부)를 만들었다. 옥동씨와 창동씨가 이 단체 이사와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80년대 중반부터 숙부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한옥동 이사는 18일 전화통화에서 숙부가 아닌 인면전구공작대를 내세워 기념사업회를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숙부가 해방 후 행적 때문에 서훈을 받지 못해 숙부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사단법인 승인도 나지 않고 예산 지원도 받을 수 없죠. 2017년과 2019년 두 차례 서훈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해방 이듬해 한지성이 안중근 집안사람인 아내와 함께 15년 만에 고향을 찾았을 때 성주군과 면사무소는 독립투사가 돌아왔다고 성대한 환영식과 잔치까지 베풀어주었단다. 하지만 1948년 이후 한 이사 집안사람들은 민주화가 될 때까지 오랜 기간 연좌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1945년 인도 콜카타에서 찍은 한지성 대장(맨 오른쪽)과 부인 안금생(오른쪽 세째) 사진. 선인출판사 제공
한지성 대장 자료집 발간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뒷줄 왼쪽 첫째가 한옥동 이사다. 한옥동 이사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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