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교수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이 기미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번역으로 3·1운동 4년 뒤인 1923년 잡지 <동명>에 ‘만세’라는 제목으로 실렸어요. 여기 함께 나오는 번역자 최남선의 머리말이 명료하지 않아요. 일제 검열을 피하려고 돌리고 돌려서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이야기하죠. 제목 ‘만세’도 3·1 만세운동을 떠올리려고 달았겠죠. 이 작품이 검열을 거쳐 출판된 것은 기적이죠.”
최근 189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어로 옮긴 세계문학 작품에 붙인 번역가의 머리말 378편을 모아 천 쪽이 넘는 벽돌책 <번역가의 머리말>(소명출판)을 낸 박진영(50)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에게 가장 인상적인 머리말 하나를 꼽아달라고 하자 나온 말이다.
<마지막 수업>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해 모국어 수업까지 금지된 알자스로렌 지역 프랑스인들의 슬픔과 고통을 그린 작품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18년 앞서 1905년 러일전쟁 무렵 <마지막 수업>이 번역돼 많이 읽혔어요. 우리와 달리 승전 의지를 다지겠다는 의도가 있었죠. 러시아에 지면 패전국 프랑스인의 설움을 당한다고요. 반면 중국은 전쟁에 져서 땅을 빼앗긴 패전국 입장에서 이 작품을 수용했어요.”
국내 대학 정규직 교수 중 유일한 번역문학 전공자로 지난 15년 동안 한국문학 연구의 사각지대인 번역문학과 번역가 연구에 힘을 쏟아온 박 교수를 지난 25일 서울 혜화동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연세대 화학과를 나와 대학원 때 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연세대 국문학과 박사 논문을 보완한 첫 저술 <번역과 번안의 시대>(2011)로 월봉저작상을, 두 번째 저서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2013)으로 한국출판학술상을 수상했다.
“요즘은 역자 후기로 번역가의 목소리가 책 뒤에 실리잖아요. 하지만 일제 때는 대부분 책 앞에 머리말로 실렸어요. 단순한 독후감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 내용이 뭔지 알리는 내용이었죠. 한국 근대문학의 거의 중요한 작가들이 다 번역가였어요. 24살에 요절한 나도향도 톨스토이 민화집 등 유럽의 여러 작품을 번역했죠.”
그가 보기에 “(식민지 시기) 세계문학 번역은 창작보다 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시대의 요구에 반응했다.” “각 나라에서 세계문학이 번역됐지만 똑같은 번역은 하나도 없어요. 나라마다 처한 시대 상황과 상상력에 걸맞은 번역이 이뤄졌죠. 언어만 옮긴 게 아니라 원문의 누락이나 부가, 변형 등을 통해 많은 차이가 생겼어요. 이 과정이 바로 창조이죠.” 그가 번역문학도 한국문학의 일부라고 강조하는 까닭이다. “일본 강점기에 한국에선 19세기 유럽 문학,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 문학이 많이 번역됐어요.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와 프랑스 작가 모파상과 빅토르 위고가 대표적이죠. 당시 한국의 톨스토이 번역을 보면 작가의 반문명이나 반국가, 반전사상은 도려내고 주로 개인의 덕성 함양이 강조됩니다. 조선인이 어떤 인간관을 지향할지에 초점이 있죠.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노라의 집> 번역을 봐도 중국은 반봉건, 반가부장제 사상이 강조되지만 일본 번역을 중역한 한국은 여성의 자아실현이라는 원전 시각에 비교적 충실해요. 심지어 이 작품 번역서에는 자아를 찾아 집을 나가는 여성 노라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훈계하는 이광수 해제까지 실렸죠.”
번역문학 전공 유일한 정규직 교수
일제 때 세계문학 한국어로 옮긴
양건식, 홍난파, 김억 등 번역 조명
최근 번역가 220명 머리말 모은 책
“번역 없이 한국문학 성립 어렵지만
국내 번역문학 연구는 여전히 찬밥”
그는 “세계문학 없이는 한국문학 성립도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이광수와 최남선도 창작보다 번역이 앞섰어요. 이광수는 1913년에 미국의 노예제 반대자인 해리엇 비처 스토가 쓴 <엉클 톰스 캐빈>을 <검둥의 설움>이란 제목으로 옮겼어요. 장편소설 <무정>을 쓰기 4년 전이죠. 이광수가 왜 흑인 노예들 이야기를 번역했을까요. 그 소설이 한국 사회의 무정(無情)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겠죠.” 덧붙였다. “일본 강점기 최고 번역가 김억은 유럽시를 번역하면서 우리 시의 형식과 감정, 정서까지 고민했어요. 단순히 번역만 한 게 아니라 한국시를 새롭게 창조하려고 했죠.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 작가 현진건과 김동인도 모파상과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 작품을 보면서 단편 작법을 공부했죠.”
그의 번역 연구는 한국 번역사에서 이름 없이 묻힌 번역가의 이름을 드러내는 여정이기도 했다. 최근작에는 모두 220여 명 번역가의 머리말이 실렸다. 그간 자료 더미를 뒤져 세상에 직접 알린 번역가가 누군지 묻자 그는 먼저 홍난파와 양건식을 꼽았다. 이번 책에는 양건식과 홍난파의 머리말이 각각 11편과 5편 실렸다. 가장 많은 번역가는 22편인 김억이다. “홍난파는 음악에 전념하기 전인 1920년대에 중요한 번역을 많이 했어요. 일본 강점기에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 작품이 딱 한 편 번역되었는데요. 홍난파가 옮긴 <가난한 사람들>이죠. 양건식은 루쉰의 <아큐정전> 등 동시대 중국문학을 끊임없이 번역했어요. 중국문학도 프랑스문학과 같이 세계문학의 일부라는 인식을 심어준 번역가이죠.”
그는 한국문학의 소중한 자양분인 번역이 문학연구에서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이광수나 최남선 등 작가 이력에도 그들이 번역한 내용은 보이지 않아요. 번역 업적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거죠. 번역가의 머리말이 한 편의 번역이론 논문이었던 김억조차도 김소월의 스승이라고만 알려졌지 번역가로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어요.” 그는 “십여 년 전부터 번역도 우리문학의 일부라는 인식이 생겼지만 여전히 연구자 숫자도 적고 연구가 활발하지 않다”고 했다.
연세대 화학과 시절 한국 문학계의 리얼리즘 논쟁 등을 접하면서 문학도 과학처럼 연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흥미를 느껴 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박 교수에게 왜 번역에 주목했는지 물었다. “번역 연구가 너무 안 되어 있더군요. 그게 희한해 번역 공부를 시작했죠. 그런데 해보니 자료도 많고 묻힌 번역가가 너무 많아요. 일제 시대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점도 재밌었죠. 일제 시기 번역은 거의 대부분 중역이어서 거슬러 올라가 연구해야 합니다. 한국 번역가가 중역한 일본어 판본을 보고 다시 영국이나 프랑스 판본 그리고 러시아어 판본까지 봐야죠. 여기서 보이는 차이를 확인하는 게 매우 흥미로웠죠.”
계획을 묻자 박 교수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번역 네트워크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동했는지 살피고 에스페란토(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인공어) 사상사도 공부할 생각”이라고 했다. “에스페란토는 식민지 시기에 단순한 교류 차원을 넘어 반제국주의 연대와 문학 공유 등에 크게 기여했어요. 김억은 에스페란토 교재까지 만들었죠.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도 뿌리를 같이 하는 언어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에스페란토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 살피고 싶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