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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민주화 이후…한국 민주주의는 퇴보했는가?

등록 2022-03-11 04:59수정 2022-03-11 09:25

미국 정치학자 스테펀 해거드 논문
‘한국은 민주주의 퇴행에 취약한가?’

브이뎀·프리덤하우스 지수로
1988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 분석
보수정부에서 일탈 명백했지만
정치권리·시민자유 퇴행 미미해

1987년 6월항쟁이 가져온 88년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행보를 보였는가? 진보했는가, 퇴보했는가? 퇴보했다면 어느 정부에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됐는가? 문재인 정부는 다수의 횡포로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는가?

문재인 정부 들어서 부쩍 잦아진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표적인 민주주의 지수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약간의 부침이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꾸준히 발전했다고 답한다.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은 유럽이나 미국과 비슷하거나, 일부 분야에서는 그보다 우월하다는 평가이다.

이런 평가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발전에 관한 연구로 명성이 높은 미국의 정치학자 스테펀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교수(사진)가 지난 1월 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소(KEI)에서 발표한 ‘한국은 민주주의 퇴행에 취약한가?’라는 논문에서 대표적인 민주주의 지수를 활용해 도출했다. 해거드 교수는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대표적 지수인 브이뎀(V-Dem) 지수와 프리덤하우스 지수를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 시기인 1988년 이후 지금까지 비교평가했다.

브이뎀 지수는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브이뎀연구소가 매년 각국의 선거, 자유, 평등, 참여, 숙의민주주의 수준을 측정하는 지수이다. 해거드 교수는 이 중에서 선거 및 자유민주주의 지수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선거 및 자유 민주주의 지수는 노태우 정부 이후 급격히 향상되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퇴행했으나, 문재인 정부 들어서 다시 이전 수준 이상으로 복원된 것으로 나타났다.(그림1)

선거 민주주의 지수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여부를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기본이고, 자유 민주주의 지수는 선거제도의 정합성뿐만 아니라 법치, 권리보호, 행정부에 대한 수평적 견제 등의 요소를 반영한다. 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일수록 선거 민주주의 지수가 자유 민주주의 지수보다는 점수가 높으나, 두 지수는 매우 큰 상관관계를 보인다.

두 지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국정원의 선거개입, 예술가들의 블랙리스트 사태, 새누리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개입 등으로 ‘일촉즉발의 퇴행’을 보였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서 앞선 최고치였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수준을 회복하고 능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질적으로 미국과 유럽연합의 수준을 넘는 것이다.

구체적인 정치적 권리 및 시민적 자유의 보호에서도 비슷한 양태를 보였다. 미국 프리덤하우스의 정치권리 및 시민자유 지수가 그것이다. 이 지수들은 표현, 집회, 언론 자유 등에 기초한 지수들이다.

한국은 이 지수 평가에서 1988년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 이른바 ‘자유’ 국가의 범위 내에서 잘 안착해왔다. 이 지수의 추이 역시 박근혜 정부에서 아주 미미하게 하락했으나, 문재인 정부 들어서 회복됐다.(그림2)

문재인 정부 들어서 가장 논란이 많은 것이 제왕적 대통령제와 권력분립 문제이다. 한국 정치체제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는 오랜 논란거리인데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여당이 의회에서 압도적인 과반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이뎀 지수의 권력분립 지수는 한국의 삼권분립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림3)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사법부 권력이 강화됐고, 의회 역시 그 뒤를 이었다. 삼권분립은 김대중 정부 때 이미 유럽연합 수준에 근접했고, 미국 수준에는 미미하게 못 미쳤다. 삼권분립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악화됐으나, 의회 독립은 박근혜 정부 말기에 더욱 강화됐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대한 의회의 견제와 탄핵으로 인한 결과이다. 전반적인 민주주의 지수와 마찬가지로, 권력분립 등 수평적 견제에서 한국의 수준은 유럽연합과 미국조차 능가한다.

해거드 교수가 한국의 민주주의 퇴행 여부를 분석한 계기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등장 이후 선진국에서 민주주의 ‘퇴행’(backsliding)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그 지지층이 미국 민주주의에 던지는 도전, 유럽연합 탈퇴를 둘러싼 영국의 분열, 유럽 대륙에서 새로운 극우 정당들의 부상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폴란드·헝가리·터키·브라질·필리핀 등에서 권위주의 정권의 출현은 학계 안팎에서 민주주의의 ‘퇴행’ 논의를 가속화했다.

한국에서 이런 민주주의의 퇴행 우려와 논의는 민주적 가치가 실질적으로 하락한 이명박·박근혜 때보다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 잦아졌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여당이 압도적 과반을 차지한 뒤 벌어진 사태는 이를 더욱 재촉했다. 집권여당의 검찰개혁과 공수처 입법 시도, 이 과정에서 불거진 조국 전 장관 사태, 이를 두고 갈라진 민심과 갈등에 보수세력들은 민주주의 퇴행을 거론했다. 과거에 진보적인 색채를 보였던 최장집 교수도 이 시기를 전후한 2020년에 ‘다시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위기와 대안’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다수의 전제주의’라는 입장에서 사태를 분석했다.

해거드 교수는 더 큰 렌즈로 보면, 한국에서 민주적 규범에서의 일탈은 보수정부에서 더 명백했으나, 정치권리와 시민자유 측면에서 보면 미미한 수준이었다고 결론낸다. 특히 이러한 퇴보와 일탈도 궁극적으로는 견제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한국의 대통령 권력에 대해 시민사회가 견제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와 사법부가 제도적 기준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민주주의에는 감시가 필요하나, 한국은 성공적인 새로운 민주주의로 명성을 가질 만하다”고 치하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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