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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세계 판화사의 거장’이 제주에 건네는 위로

등록 2021-05-05 18:24수정 2021-05-06 09:36

서귀포 포도뮤지엄 개관 기념
케테 콜비츠 작품 33점 전시
전쟁 고통·강인한 모성 담아
케테 콜비츠가 1932~36년 작업해 만든 청동조각상 <여인과 두 아이>. 포도뮤지엄 전시를 통해 국내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청동상 뒤쪽에 1910~30년대 작업한 아이와 여인 판화들이 내걸려 있다.
케테 콜비츠가 1932~36년 작업해 만든 청동조각상 <여인과 두 아이>. 포도뮤지엄 전시를 통해 국내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청동상 뒤쪽에 1910~30년대 작업한 아이와 여인 판화들이 내걸려 있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중산간 언덕에 새 미술관이 들어섰다. 한라산에서 몰아치는 맵짠 바람을 맞으며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중산간 지역은 역사적으로 쓰린 상흔이 있는 곳이다. 70여년 전 제주 4·3항쟁 당시 군경들이 해안으로부터 5㎞ 떨어진 내륙 일대 중산간 지역 동네를 무조건 불태웠던 초토화 작전의 핵심 대상지였다. 처연한 전란과 학살의 역사를 지닌 중산간 요지에 걸터앉은 미술관에서 세계 근현대 판화사의 거장 케테 콜비츠(1867~1945)의 자화상과 전쟁 판화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술관 이름은 포도뮤지엄이다. 재일동포 건축가 고 이타미 준의 걸작으로 유명한 포도호텔 인근에 지난달 24일 문을 열었다. 콜비츠의 청동조각상 <여인과 두 아이>와 여인과 아이, 전쟁 등을 다룬 연작 판화 32점을 선보이는 ‘아가, 봄이 왔다’는 미술관이 공들여 준비한 개관전이다.

콜비츠는 동프로이센의 유한층 가문 출신이었지만, 평생 노동자·빈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이들 목소리를 대변하며 작업했다.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들과 손자를 모두 잃은 작가는 판화의 거친 선과 질감에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녹여 넣으며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동판화, 석판화, 목판화 작품들을 남겼다.

케테 콜비츠가 1910년 찍어낸 동판화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
케테 콜비츠가 1910년 찍어낸 동판화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
중국 아트미아 재단에서 대여한 이번 출품작들은 초창기부터 말년기까지의 작품들을 망라한다. 1부 ‘오랜 독백’은 평생 100점 넘게 창작한 자화상 연작들이다. 1893년 작 동판화 테이블 앞 자화상으로 시작해 1934년 작 석판화 자화상까지 뒤로 갈수록 얼굴이 커지고 표현은 더욱 정교해진다.

2부 ‘세상에 건네는 위로’는 아이를 싸안은 여인들의 모성을 다룬다. 콜비츠는 정체성이 모호한 모성이 아니라 생활과 양육을 함께 도맡는 강인한 노동자 여인과 아이들을 그렸다. 특히 청동상 <여인과 두 아이>가 주는 조형적 감동이 강력하다. 힘차고 뜨겁게 몸을 오그리면서 두 팔을 한껏 내뻗고 아이 둘을 감싸안은 조각상의 기운이 전시장을 지배한다.

3부 ‘총칼의 파국’은 1·2차 세계대전이 빚은 고통과 참화에 대한 수상록이다. 1922년 <전쟁> 연작의 첫번째 작품으로 나온 목판화 <희생>을 시작으로, 사신에 이끌려 어두운 죽음의 피안으로 이끌려가는 1921~22년 목판화 <지원병들>, 자식 잃은 슬픔이 처연하게 전해져오는 1921~22년 전쟁 연작의 세번째 목판화 <부모> 등을 통해 전쟁으로 아들과 손자를 잃은 콜비츠의 고통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케테 콜비츠가 1919년 석판화로 찍어낸 자화상.
케테 콜비츠가 1919년 석판화로 찍어낸 자화상.
4부 ‘죽음과의 조우’는 죽음에 대한 판화들 모음이다. 해골로 등장한 죽음이 한 여인을 끌어가려 하자 아이가 붙잡는 1910년 작 <에칭화 죽음>에서 작가의 표현력이 40대에 이미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7년 작 <죽음의 부름>에서 작가 자신을 투영한 듯한 퀭한 얼굴의 여자를 옆에서 쭈글쭈글한 손이 툭 건드리는 장면도 눈에 들어온다.

콜비츠 작업에는 핍진한 감정의 표현을 담은 얼굴과 몸의 표현, 청동상처럼 함께 얽혀 특유의 뭉친 형상으로 한 몸이 되는 구도가 적지 않다. 미세한 결의 감정과 메시지를 투박한 형식으로 절묘하게 표출한 것은 콜비츠가 세계 미술사에 남긴 가장 큰 성취이자, 이후 현실 참여 작가들의 미학적 정전이 됐다.

제주 4·3의 비극적 기억과 함께 되새겨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울림이 더 크다. 내년 3월까지.

제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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