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를 맞아 첫 개인전을 여는 김숙정씨가 지난 8일 그림 작업실이기도 한 서울 회현동 자택의 거실에서 그림 그리는 재미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시작은 8년 전 팔순 때였다. 독신인 둘째딸이 취미로 그림을 배우면서 화가(허미자) 선생님이 집으로 와서 가르쳐주니 함께 해보자고 권했다. 그러다 개인사업을 하는 딸이 너무 바빠지면서 그림 수업도 흐지부지 됐다. 두번째 시작은 지난 연말이었다. 코로나19 탓에 20년 넘게 해온 수영을 하지 못하고 집에 갇혀 지내면서 창고 속 화구를 다시 꺼낸 것이다. 미수(88살) 기념으로 첫 개인전 <백년 연꽃>을 여는 김숙정씨가 지난 8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들려준 ‘화가 탄생기’다.
“딱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미술에 관심도 없었어요. 팔순무렵 손가락 힘이 너무 약해져서 글씨를 쓰기가 힘들어 알츠하이머 검사까지 받았어요. 그런데 딸의 그림 수업 때 옆에서 심심풀이로 붓질을 해보니 할만 했어요. 화가 선생님이 잘 한다고 칭찬까지 해주니 재미도 났고요.”
실제로 이번 전시회도 화가 선생님의 적극적인 추천 덕분에 가능했다. “맨처음 그림 수업을 시작했을 때 어머니에게 아무거나 그리고 싶은대로 해보시라고 했더니, 고향 김제에서 많이 보고 자랐다며 연꽃을 그리셨어요. 그런데 허 선생님이 굳이 기법같은 건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능이 있다면서 자유롭게 그리시라고 했어요. 최근 몇 달간 집중해 그린 새 작품들을 보여드렸더니, 순수 아마추어의 솜씨로 볼 수가 없다며 놀라면서 전시를 주선해줬어요.”
둘째딸 김선현(오토 대표)씨는 “남에게 보이기 부끄럽다며 한사코 사양하는 어머니를 설득한 것도, 미술평론가로도 활약 중인 박인식 시인에게 작품을 보여드리게 한 것도 허 선생님이었다”고 귀띔했다.
김숙정씨가 2012년 팔순 때 처음 그린 ‘연꽃’ 연작 가운데 한 작품. 박인식 미술평론가는 ‘그림 나이로는 30살로 보인다’고 평했다. 사진 갤러리 내일 제공
“나이 여든에 처음 붓을 잡은 만큼 아무런 기교를 부리지 않은 소박한 그림에서, 그림을 말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이 글쟁이의 까탈스런 시선을 오래도록 놓아주지 않는 묘한 아우라가 풍겼다. 이름있는 대가의 작품에 결코 뒤지지 않는 어떤 떨림의 여운이 길고 깊었다.”
박 시인은 전시 제목을 ‘백년 연꽃’으로 지은 연유도 소개했다. “연꽃이 뻘 속에서 백년 만에 피어나듯, 작가의 시어머니 정정화 여사가 26년간 상하이 임시정부와 함께 했던 일대기를 <장강일기>로 펴낸 1987년이 식민지배와 분단과 독재의 뻘 속에서 민주화의 씨앗이 싹을 틔울 때였다”며 미수에 시어머니는 첫 책을 내고, 그를 36년간 모신 며느리도 여든 여덟에 첫 그림전을 여는 ‘겹우연’의 특별한 의미를 강조했다.
김자동(왼쪽) 임정기념사업회장과 김숙정(오른쪽)씨 부부는 1955년 지인 소개로 만나 결혼해 65년째 회로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1978년께 서울 돈암동 살던 시절의 가족 사진. 왼쪽부터 김숙정 화가, 첫째딸 김진현, 김자동 회장, 고 정정화 선생, 막내딸 김미현, 아들 김준현, 둘째딸 김선현. 사진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김씨는 1955년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업사업회 회장과 결혼해 3녀1남을 뒀다. 조부는 1919년 10월 일흔넷 나이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상하이로 망명한 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 선생이다. “시어머니께서는 시아버지(성엄 김의한) 뒤를 따라 상하이로 탈출하기 이전 몇 년간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셨다는데, 외며느리인 저한테는 한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셨어요. 결혼해보니 시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 생사조차 알 수 없고, 시할머니부터 일가 친척들까지 층층시하였는데 당신이 다 알아서 하실 뿐 며느리 부릴 생각을 안하셨으니까요. 그래서 늘 그립기만 해요.”
그런 지난 세월에 대한 그리움과 여행의 추억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았다는 김씨는 “무심코 붓질을 하다보면 나이듦의 고통이며 온갖 잡념도 사라져서 좋다”고 털어놓았다.
15~22일 서울 새문안로 내일신문 지하2층 갤러리 내일에서 여는 전시에는 초기 잉크로 작업한 ‘연꽃’ 연작 13점과 나무와 풍경을 주로 담은 최근의 아크릴화 13점 등 모두 26점을 내놓는다.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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