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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산부인과 전문의가 ‘에밀 타케 헌정곡’ 만든 까닭은…”

등록 2020-04-23 02:23수정 2020-04-23 09:21

[짬] 부산 미래여성병원 이재준 원장

이재준 원장은 산부인과 전문의로 부산·경남지역에서 분만율이 가장 높은 미래여성병원을 운영하지만 본업은 록커라고 말한다. 사진 미래여성병원 제공
이재준 원장은 산부인과 전문의로 부산·경남지역에서 분만율이 가장 높은 미래여성병원을 운영하지만 본업은 록커라고 말한다. 사진 미래여성병원 제공

120년 전 제주 왕벚나무를 처음 학계에 보고하고 온주밀감을 제주에 처음 들여온 선교사 에밀 타케(1873~1952) 신부를 위한 헌정앨범이 나왔다. 그런데 추모곡을 만든 이의 이력과 곡을 만들게 된 사연이 이채롭다.

“사실 전 신앙인도 아니고, 식물 분야엔 문외한이어서 에밀 타케 신부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요. 솔직히 그 이름조차 스치듯 전해 들었을 뿐이었죠. 그래서 맨처음 신부님 추모곡 제안을 받았을 땐 한사코 고사를 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 분의 일대기를 읽다보니 저도 모르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더군요.”

그의 직업은 산부인과 전문의, 공식 직함은 부산·경남지역 분만율 1위로 꼽히는 미래여성병원 원장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하드록밴드 리겔의 리더이자 보컬로 소개하는 걸 좋아한다. 최근 <에밀 타케-격동의 한국사와 벽안의 신부에게 바치는 헌사>란 헌정앨범을 낸 작곡가 이재준(52)씨를 22일 전화로 만났다.

‘에밀 타케의 선물’ 쓴 정홍규 신부 요청
뉴에이지풍 명상음악 추모곡으로
새달 ‘식물표본 전시회’ 때 첫 발표
2015년 사진가 김영갑 추모곡도 지어

낮엔 의사·밤엔 록밴드 보컬로 변신
대학때부터 30년…아동돕기 도시락 콘서트

이재준 원장은 인제대 의대 시절부터 록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요즘도 2014년 결성한 4인조 밴드 리겔의 리더 겸 보컬로 매일 연습을 하며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미래여성병원
이재준 원장은 인제대 의대 시절부터 록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요즘도 2014년 결성한 4인조 밴드 리겔의 리더 겸 보컬로 매일 연습을 하며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미래여성병원

2019년 5월 중순 한라산 등반을 동행하면서 <에밀 타케의 선물>(다빈치) 저자이자 에밀타케식물연구소 이사장인 정홍규 신부님을 처음 만나 ‘에밀 타케와 제주도 이야기’를 처음 들었어요. 그뒤 8월께 정 신부님이 서울에서 무리한 강연 일정 탓에 과로로 대상포진이 얼굴에까지 번져서 무조건 쉬어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급한김에 우리 병원 꼭대기층의 별실에 모셨지요. 아마 산부인과에 입원한 신부님은 전무후무일 거예요.(ㅎㅎ)”

그때 보름 남짓 요양했던 정 신부에게 그는 자신의 앨범 <이심>(LEESIM·二心) 1, 2집과 <이재준 원장의 태교음악>을 소개했다. 그 가운데 <이심> 2집은 2015년 제주를 대표하는 사진가 김영갑의 10주기를 기려 만든 앨범이다. ‘이심’은 이 원장과 스래쉬메탈 밴드 히든히어로의 심인택씨가 뜻을 모아 결성한 실험음악 프로젝트다. 김영갑 관련 사진집을 여럿 펴낸 도서출판 다빈치 박성식 대표의 요청으로 곡을 만들어 그해 여름 서울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린 김영갑 10주기 기념 <오름에서 불어오는 영혼의 바람> 전시 때 헌정했다. 앞서 2011년 그는 <이재준 원장의 Q&A 산부인과>라는 첫 번째 책을 다빈치(여름언덕)에서 출판해 박 대표와 인연을 맺은 터였다.

이 원장이 맥북 로직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든 컴퓨터음악인 ‘김영갑 추모곡’은 뜻밖에 록풍이 아니라 뉴에이지풍의 명상음악이다. ‘바람을 찍은 사진가’로 불리는 김영갑 사진의 이미지를 ‘오름에서의 바람소리, 억새소리, 비와 천둥소리, 머릿결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감촉, 풀과 흙냄새’ 등 자연음악으로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심2’을 들어본 정 신부님의 수개월에 걸친 간곡하고, 집요한 요청으로 ‘에밀 타케 추모곡’ 작업에 동의하고 말았어요. 타케의 삶을 따라가보니 성직자이기에 앞서 이방의 땅에서 평생 고난을 겪다 묻힌 신념의 인간이 보이더군요. 마침 배경이 제주여서 음악적 이미지도 떠오르고요. 저는 시각과 청각의 통합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타케의 파란만장 일대기를 크게 네단계로 엮었다. 구한말 벽안의 프랑스 신부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지독한 굶주림과 가난 속에서 포리 신부에게 배운 식물 채집으로 희망을 찾아가는 모습,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속에서 조선반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던 모습, 광복의 기쁨도 잠시 전란 와중인 1952년 선종해 대구에 잠들 때까지이다.

“왕벚꽃잎·십자가·프랑스·한반도·제주 등을 상징 주제로 기본적인 멜로디 라인을 구성하고, 거기에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음계와 단음계를 적절하게 배치한 다음 음의 빠르기와 강약, 악기의 선택에 의해 곡의 느낌을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었죠. 전체적으로는 밝고 희망적으로 표현했어요. 동고동락한 조선 민중의 모습에서 평화롭고 번영한 세상를 향한 기원을 품었을 것이라 믿고 싶기 때문이죠.”

5월29일 ‘왕벚나무 자생지 발견 112주년 기념-에밀 타케 신부의 식물표본 전시회’에서 첫 발표할 예정인 이재준 원장의 &lt;에밀 타케&gt; 헌정 앨범 자켓.
5월29일 ‘왕벚나무 자생지 발견 112주년 기념-에밀 타케 신부의 식물표본 전시회’에서 첫 발표할 예정인 이재준 원장의 <에밀 타케> 헌정 앨범 자켓.

그는 이번에도 로직 프로그램을 이용해 피아노 선율을 메인으로 드럼 팀퍼니 바이올린 챌로 등 무려 36가지의 악기로 편곡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자연의 소리나 파동을 수리화해서 그 데이터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해 음표로 그려내는 방식은 그만의 독특한 작법이기도 하다.

“십대 중반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와병에 이은 별세로 가세가 기울어 실의에 빠졌을 때 노래와 음악이 유일한 위안이 됐어요. 하지만 집안을 일으키려면 적성에 맞지 않는 의대를 선택해야 했어요. 대신 대학 시절 밴드를 꾸려 음악을 계속 했지요. 2001년 개업해 자리가 잡히자 노래를 계속하기 위해 술과 담배도 끊고, 머리도 지금처럼 기르기 시작했어요.”

지난 30여년간 여러 이름으로 록밴드를 꾸려 150회가 넘는 공연을 해온 그는 요즘도 낮에는 의사 가운을, 밤에는 가죽 점퍼와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젊은 후배들과 호흡을 맞춘다. 2004년부터는 해마다 2월 도시락(樂) 콘서트를 열어 아이들의 도시락(급식) 비용을 후원하고 있다. 5년 전부터는 지역아동센터 아이들도 10~15개팀을 꾸려 함께 공연해 상금과 출연료 방식으로 직접 지원하고 있다. 자원봉사 매니저도 있어서 후원자들에게 기부금 영수증도 발행해준다.

에밀타케식물연구소는 새달 29일~6월7일 대구 범어성당에서 여는 ‘왕벚나무 자생지 발견 112주년 기념-에밀 타케 신부의 식물표본 전시회’에서 에밀 타케 추모곡을 첫 공개한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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