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폴 정규 9집 앨범 <너와 나>는 그의 반려견 ‘보현’과 함께, 보현의 시선에서 작업한 음악들로 채웠다. 앨범 속지 중 루시드폴과 보현이 함께 찍힌 사진은 그의 아내가 촬영했다. 창비 제공
그동안 루시드폴(본명 조윤석) 음악을 들어온 이들에게 이번 정규 9집 앨범 <너와 나>는 조금은 낯설게 들릴 것이다. 이전처럼 잔잔한 기타·피아노 소리를 근간으로 한 곡들뿐 아니라 일상의 소리들과 몽환적인 전자음이 어우러진 일렉트로닉 곡들이 중간중간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사고가 계기였다. 지난해 7월 자신의 제주도 귤 농장에서 일하다 왼손 약지를 크게 다친 것이다. 두어 달 기타를 치지 못하게 되자,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공학자 출신인 그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새로운 악기와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히는 데 시간을 보냈다. 소리를 채집하는 ‘필드 레코딩’, 이렇게 모은 여러 소리를 하나의 음악으로 만드는 ‘그래뉼라 신테시스’ 같은 기계들을 가지고 놀이와 작업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음의 세계에 몰두했다.
루시드폴 정규 9집 앨범 <너와 나>는 그의 반려견 ‘보현’과 함께, 보현의 시선에서 작업한 음악들로 채웠다. 앨범 속지 중 루시드폴과 보현이 함께 찍힌 사진은 그의 아내가 촬영했다. 창비 제공
그렇게 해서 만든 곡 중 하나가 ‘콜라비 콘체르토’. 반려견 보현이 콜라비를 서걱서걱 먹는 소리, 감자전 부치는 소리, 팝콘 튀는 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 등 일상의 소리를 모아 1분30초짜리 ‘음악’으로 만들었다. 작곡자·연주자를 보현으로 올리고, 그는 편곡자로 물러났다. “역사상 처음으로 강아지가 쓴 곡이 아닐까 싶어요. 어제 보현이를 저작권협회에 작곡자로 등록했어요. 발생하는 수익으론 보현이 먹을 걸 사주려고요.” 23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작업실 인근에서 만난 루시드폴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앨범은 ‘반려견 보현을 찍은 사진집을 내자’는 출판사 쪽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사진작가가 아니기에 사진집을 내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대신 ‘보현을 주제로 음악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커졌다. “앰비언트(명상음악), 일렉트로닉 등 해보고 싶었지만 하나의 앨범으로 묶기엔 애매해서 못했던 음악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보현을 테마로 정하면 다양한 음악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겠다 싶었죠.”
루시드폴의 9집 앨범 <너와 나>는 반려견 보현을 주제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모았다. 창비 제공
앨범 발매일인 지난 19일 생일을 맞은 보현은 이제 만 10살이다. 사람으로 치면 일흔에 가까운 고령. 이번 앨범 군데군데 얼마 남지 않은 보현과의 시간에 대한 예감이 드리워져 있다. “언젠가 우리가 헤어질 수밖에 없음에/ 가슴 아파 말 것을/ 미리 슬퍼하지 말 것을”(‘뚜벅뚜벅 탐험대’).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보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하지만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더 즐기고, 충만하게 살려고 해요.”
모든 사람이 그처럼 반려동물을 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유기동물들의 울음소리는 그를 아프게 한다. 이번 앨범 수익 일부를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유기견 보호소에 기부하는 이유다.
그는 오는 28~29일 서울 연세대에서 2년 만에 여는 앨범 발매 공연 ‘눈 오는 날의 동화’ 연습에 한창이다. 새달에는 작고 특별한 공연을 준비 중이다. 서른마리 반려견을 위한 ‘킁킁’ 콘서트. 기타를 치면 항상 곁에 다가와 머리를 기대고 음악을 듣는 보현처럼, 반려견들이 좋아할 만한 잔잔한 음악들을 연주해주는 콘서트다. “반려견들에겐 말도 의미가 없으니 멘트도 노래도 안 하고 기타만 쳐도 될 거 같아요. 앞에 와서 킁킁대는 애들, 뒤에서 오줌 싸는 애들, 짖는 애들로 난장판이 되겠죠. 그 통에 제 음악은 배경음악이 되어버리더라도 그것대로 좋을 거 같아요.”
2015년 그는 홈쇼핑 채널에 깜짝 출연했다. 새벽 2시 ‘귤이 빛나는 밤에’ 방송에 귤탈을 쓰고 나와 음반과 자신이 직접 키운 귤 1천상자를 완판시켰다. 이번에도 팬들을 즐겁게 해줄 깜짝 이벤트가 있는지 물으니 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 정말 그렇게 해볼까요? 콘서트 티켓하고 강아지 사료를 패키지로 팔아서 수익은 기부하고, 옆에선 애견 마사지사들 나와서 개들 마사지해주고, 저는 귤탈 대신 강아지탈 쓰고요. 어때요?”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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