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켓에 바지를 입고 공연을 했는데 너무 편한 거예요. ‘아, 그동안 사기당했구나!’ 생각했죠. 하하하. 드레스를 입으면 신경 쓸 게 많아요. ‘옷이 내려가지는 않을까’, ‘오늘 좀 뚱뚱해 보이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정장을 입으니 이런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저 자신도 ‘여성 연주자는 드레스를 입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억압이 있었던 거죠.”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31)는 자타가 공인하는 연주 실력과 함께 연주 이외의 방법으로도 자신을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클래식 아티스트다. 그는 17살이던 2006년 몬트리올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앨리스 숀펠드 등 국제 콩쿠르에서 연이어 우승했고, 2014년엔 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 중 하나인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콩쿠르 우승이란 금자탑을 쌓았다. 하지만 그 직후 콩쿠르 도전을 끝내겠다는 선언과 함께 그동안 겪어왔던 음악적 어려움을 진솔하게 쓴 음악전문지 <객석> 기고는 관심을 끌었다.
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콩쿠르 졸업 선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콩쿠르가 중독적인 부분이 있어요. 이겼을 때 짜릿하죠. 주변에선 우승만 하면 환상적인 기회들을 얻을 수 있고, 빅스타가 될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해요. 상금도 적지 않고요. 물론 콩쿠르가 도움됐지만, 어느 순간 저의 음악적 발전을 막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인디애나 때는 결선에 오른 6명 중에 한국 연주자가 5명이었는데, 그 친구들한테 미안한 감정이 너무 커서 이제는 콩쿠르를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이어트할 때 그렇듯이 선언부터 한 거죠.”
선언 이후 그는 인터뷰어로 나서서 가수 송창식, 안무가 차진엽 등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을 차례로 만나기도 했다. 얼마 전엔 클래식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고, 내년엔 음악에 대한 사랑을 담은 책을 낼 예정이다. 그는 소설가 한강과 은희경, 가수 서태지와 우원재, 씨엘 등 다른 장르 예술가에 대한 애정 또한 감추지 않는다.
“여러 활동을 했지만, 음악이란 창문 바깥으로 나간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칼럼 기고도 인터뷰도 음악을 더 잘하기 위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 했던 것이고요. 저는 연주 외의 활동을 하는 것이 음악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관객들과 음악 외적으로 소통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마흔살이 돼서 지금의 저를 돌아보면서 이불 하이킥을 할 수 있겠지만요. 하하하.”
다양한 영역에 관심이 많지만, 음악에 대한 사랑이 흔들린 적이 없을 정도로 확고하다. “소리를 가꿔서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저에게는 굉장한 힘을 느끼게 해요. 음악을 연주할수록 보물을 발견하는 재미도 정말 크고요. 저는 음악이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
그는 지난 8월 부산시립교향악단과 협주 당시 하얀 재킷과 새빨간 바지를 입고 나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 누리꾼의 “불편해 보이는 ‘사탕 껍질’이 아니라 보기가 편했다”는 말처럼, 화려하지만 맨몸이 많이 드러나고 몸에 달라붙는 드레스는 연주자만이 아니라 보는 관객들도 불편하게 할 때도 있음을 새삼 깨닫게 했다.
클래식 음악계의 여성 연주자들에 대한 성차별을 묻자 “매일 수도 없이 있는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리 배치를 할 때 여성 연주자를 꼭 남성지휘자 옆에 앉힌다던지 하는 일들이 그렇죠. 인디애나 콩쿠르 때도 한 영국 칼럼니스트가 ‘어떻게 결선진출자 6명이 전부 여성일 수 있느냐’며 비리가 있는 거 아니냐고 글을 써서 열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2016년 카네기홀 데뷔 연주에 조앤 타워, 클라라 슈만 같은 여성 작곡가 곡들을 일부러 넣어서 연주했었죠. 하하하.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행동들이라고 생각해요.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봅니다.”
현재 캐나다 맥길대학교 교수로 캐나다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는 오는 11일 4년 만에 국내에서 단독 리사이틀을 연다. 1부에서 멘델스존과 슈만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고, 2부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엘가의 ‘변덕스러운 여자’, 비에니아프스키의 ‘스케르초 타란텔라’ 등 8곡의 소품을 연주하는 독특한 구성이다. 순수음악과 실내악이 중심이 된 현재 리사이틀과 달리 소품을 넣는 것은 야샤 하이페츠나 예후디 메뉴인 같은 연주자들이 활동하던 20세기 바이올린 황금기에 유행했던 방식이다. “제가 음악과 사랑에 빠졌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차를 타고 가면서 정경화의 <콘 아모레>, 막심 벤게로프의 <만남> 같은 소품집들을 들었던 때더라고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곡들을 하면서 관객들과도 소통할 수 있도록 실험적으로 시도하는 공연이라 관객분들이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2-737-0708.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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