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민중판화가 김봉준 화백
“5·18은 내 인생과 예술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민중판화가 김봉준(65)씨는 지난 19일 광주 메이홀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운을 뗐다. 그는 31일까지 특별전 <오월의 붓굿>을 열고 있다. 이 전시에는 대표작 ‘통일해원도’를 비롯해 40여년 동안 창작한 판화, 유화, 붓글, 설치, 영상 등 작품 100여점이 정리되어 있다. 5·18을 소재로 한 신작 ‘신화의 나라’와 ‘오월의 통곡’도 선보인다. 그는 “20분 짜리 영상 ‘오월의 울음통’에는 목숨 걸고 시가전에 나섰던 시민군이 꿈꾸었던 세상을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31일까지 광주서 특별전 ‘5월의 붓굿’
판화·유화·붓글·설치·영상 등 100여점
“시민군 꿈꾸던 세상 담아보려 했다” 1980년 ‘창비’ 입사 두달만에 ‘광주항쟁’
탈춤패들과 ‘진상 알리자’ 유인물로 수배
70년대 풍물 ‘몰래 강습’ 광주 인연 그는 1980년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 창작과비평에 입사했다. 두 달 만에 5·18민중항쟁이 터졌다. 그는 전화를 전담한 덕분에 ‘광주 상황’을 가장 많이 전해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5월 하순 대학탈반연합회 10여명과 “서울 시내에 유인물을 뿌리자”고 결의했다. 진상을 많이 아는 그가 초안을 썼다. “10초쯤 망설였다. 어떻게 될지 아니까. 그리고 예감대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일사불란하게 일을 진행했다. 5월 말 맨먼저 명동에 유인물을 뿌렸는데 무사했다. 하지만 서울대쪽에서 한 명이 잡히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창비 대표 백낙청 선생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고했다. 백 선생은 그달치 월급에다 두 달치를 더 보태줬다. 바로 다음날 경찰이 출판사로 들이닥쳤다. 그는 81년 4월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11개월 동안 도피했다. “도망자가 감옥보다 힘든 거 같아. 주물공장에서 노동자로 반년, 판자촌에서 만화작가로 수개월을 지냈어. 내 얼굴이 계엄포고령 위반 중요수배자 20명 전단에 들어 있더라고. 유인물의 내용이 ‘광주 상황’과 정확하니까 ‘김대중 내란음모’의 연결고리로 엮으려고 했었나 봐.” 시대가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그는 “몸무게가 45㎏까지 줄어들어 고달팠다. 계엄해제 뒤 한 달간 조사를 받고 나왔지만 내내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어느 직장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81년 기독교농민회에서 그를 불렀다. 농민 문제를 쉽게 풀어 만화를 내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82년 쌀값·농지·농협 등을 농민의 목소리로 풀어낸 <농사꾼 타령>을 냈다. 이 과정에서 배종렬·정광훈·나상기 등 활동가들과 전라도 들판을 누비며 공동체를 체험했다. 하지만 만화가 발간되자마자 다시 수배를 당해야 했다. 민중미술운동 1세대인 그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대 재학 때 전후 세대의 트라우마를 벗어나려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에 매달렸다. 정체성을 찾으려는 방황은 이후 창작의 원천이 됐다. 그는 당대 최고의 화승 만봉 스님한테 탱화의 밑그림을 배우며 득기(붓이 똑바로 서는 느낌)에 다가섰다. 또 양주·봉산·임실을 누비며 탈춤과 풍물에 녹아든 신명을 체험했다. 70년대 후반 광주에 와서 탈춤과 풍물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는 “78년인가 채희완 선배와 광주 와이더블유시에이회관 지하에서 몰래 강습을 했다. 그때 수강했던 윤만식·김선출·김윤기 등이 이후 광주의 마당굿운동을 이끌었다고 들었다”고 인연을 되짚었다. 81년 서울대 정문 걸개그림 ‘만상천화도’는 괘불에서 착안한 최초의 걸개그림이었다. 82년엔 미술 동인 ‘두렁’을 창립해 판화·벽화·걸개그림 한글쓰기 등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그는 민중판화의 선구자였던 광주의 오윤과도 교류했다. 그는 83년 두렁의 창립전 때 오윤의 작품을 초대했고 , 전시작 평가도 부탁했다. 그는 “오 선배가 ‘소외 많은 도시 사회인데 직선도 좀 써보지그래’라고 했다. 처음엔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나중에야 조언을 따르고 있다”고 돌아봤다. 그는 93년 강원도 문막읍 진밭마을로 귀촌해 오랜미래신화박물관을 여는 등 생태와 신화로 영역을 확장했다. “88년 ‘민족해방운동사’를 그리자는 홍성담 화백의 제안에 동참 못해 지금도 미안하다. 방식은 달라도 끝까지 현장을 지키겠다. 앞으로 국가폭력에 무너진 희생자의 굿을 하는 심정으로 여순사건을 다뤄보고 싶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5월말까지 광주에서 ‘오월의 붓굿’ 특별전을 열고 있는 ‘민중미술 1세대’ 판화가 김봉준 화백. 사진작가 리일천 제공
판화·유화·붓글·설치·영상 등 100여점
“시민군 꿈꾸던 세상 담아보려 했다” 1980년 ‘창비’ 입사 두달만에 ‘광주항쟁’
탈춤패들과 ‘진상 알리자’ 유인물로 수배
70년대 풍물 ‘몰래 강습’ 광주 인연 그는 1980년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 창작과비평에 입사했다. 두 달 만에 5·18민중항쟁이 터졌다. 그는 전화를 전담한 덕분에 ‘광주 상황’을 가장 많이 전해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5월 하순 대학탈반연합회 10여명과 “서울 시내에 유인물을 뿌리자”고 결의했다. 진상을 많이 아는 그가 초안을 썼다. “10초쯤 망설였다. 어떻게 될지 아니까. 그리고 예감대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일사불란하게 일을 진행했다. 5월 말 맨먼저 명동에 유인물을 뿌렸는데 무사했다. 하지만 서울대쪽에서 한 명이 잡히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창비 대표 백낙청 선생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고했다. 백 선생은 그달치 월급에다 두 달치를 더 보태줬다. 바로 다음날 경찰이 출판사로 들이닥쳤다. 그는 81년 4월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11개월 동안 도피했다. “도망자가 감옥보다 힘든 거 같아. 주물공장에서 노동자로 반년, 판자촌에서 만화작가로 수개월을 지냈어. 내 얼굴이 계엄포고령 위반 중요수배자 20명 전단에 들어 있더라고. 유인물의 내용이 ‘광주 상황’과 정확하니까 ‘김대중 내란음모’의 연결고리로 엮으려고 했었나 봐.” 시대가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그는 “몸무게가 45㎏까지 줄어들어 고달팠다. 계엄해제 뒤 한 달간 조사를 받고 나왔지만 내내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어느 직장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81년 기독교농민회에서 그를 불렀다. 농민 문제를 쉽게 풀어 만화를 내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82년 쌀값·농지·농협 등을 농민의 목소리로 풀어낸 <농사꾼 타령>을 냈다. 이 과정에서 배종렬·정광훈·나상기 등 활동가들과 전라도 들판을 누비며 공동체를 체험했다. 하지만 만화가 발간되자마자 다시 수배를 당해야 했다. 민중미술운동 1세대인 그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대 재학 때 전후 세대의 트라우마를 벗어나려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에 매달렸다. 정체성을 찾으려는 방황은 이후 창작의 원천이 됐다. 그는 당대 최고의 화승 만봉 스님한테 탱화의 밑그림을 배우며 득기(붓이 똑바로 서는 느낌)에 다가섰다. 또 양주·봉산·임실을 누비며 탈춤과 풍물에 녹아든 신명을 체험했다. 70년대 후반 광주에 와서 탈춤과 풍물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는 “78년인가 채희완 선배와 광주 와이더블유시에이회관 지하에서 몰래 강습을 했다. 그때 수강했던 윤만식·김선출·김윤기 등이 이후 광주의 마당굿운동을 이끌었다고 들었다”고 인연을 되짚었다. 81년 서울대 정문 걸개그림 ‘만상천화도’는 괘불에서 착안한 최초의 걸개그림이었다. 82년엔 미술 동인 ‘두렁’을 창립해 판화·벽화·걸개그림 한글쓰기 등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그는 민중판화의 선구자였던 광주의 오윤과도 교류했다. 그는 83년 두렁의 창립전 때 오윤의 작품을 초대했고 , 전시작 평가도 부탁했다. 그는 “오 선배가 ‘소외 많은 도시 사회인데 직선도 좀 써보지그래’라고 했다. 처음엔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나중에야 조언을 따르고 있다”고 돌아봤다. 그는 93년 강원도 문막읍 진밭마을로 귀촌해 오랜미래신화박물관을 여는 등 생태와 신화로 영역을 확장했다. “88년 ‘민족해방운동사’를 그리자는 홍성담 화백의 제안에 동참 못해 지금도 미안하다. 방식은 달라도 끝까지 현장을 지키겠다. 앞으로 국가폭력에 무너진 희생자의 굿을 하는 심정으로 여순사건을 다뤄보고 싶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연재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