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되새기며 현대문명 곱씹어
길다란 천이 하얀 등뼈처럼 무대에 드리워져 있다. 그 천은 한 여인의 몸을 감싸며 서서히 변한다. 발목 감은 똬리로, 물동이의 받침대로, 절하는 신부의 옷자락으로, 아이의 포대기로, 어깨를 짓누르는 짐으로, 얼굴을 가리는 장옷으로, 그리고 수의로 변해간다. 굴곡과 감촉을 달리하는 가변적 상상력이 자못 눈부신 오프닝이다. 한국 전통의 여성적 삶을 정중하고 고요한 돋을무늬로 새겨낸 것이다. 무대 위에 유장한 곡선의 길을 열어젖히며, 단숨에 요약해내는 고고학적 솜씨가 거의 환상적이다. 김윤진의 <침묵하라>(12월15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는 지난한 삶의 그림자가 스며든 여성의 연대기를 밝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 능선 위에 오르자, 새로운 국면으로 확장된다. 현대의 테크놀로지가 원형질의 삶을 맥락에서 찢어내고, 새로운 문명에 습합된 체험의 차원으로 내모는 광경이 펼쳐진다. 마치 ‘매트릭스’처럼 실재를 코드화한 현실, 마치 지상을 촘촘히 덮은 거대한 지도 위 현실의 풍경. 재미있는 것은 일종의 ‘모태-텔레비전’이 무대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텔레비전은 힘이 무척 세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받아들인 거대 벽화이다. 여기서 다시 ‘아이-텔레비전’이 분화해 나간다. 흐르는 벽화가 바깥의 소식을 통고해주면, 그 브라운관의 작은 사각형은 연못처럼 흐름을 떠내는 식이다. 그 인간적인 형식이 체념적인 명상 같고, 제한된 정보의 폭력 같다. 더구나 그 브라운관을 든 무용수들이 귀신형용이라 그로테스크하다. 마치 <링>의 사다코가 자신이 막 빠져나온 구멍을 가리키며 시위하는 듯하다. 무차별의 정보가 전송되는 저주의 시각화인 양 섬뜩하다. 이처럼 천과 텔레비전, 가변과 채널, 상상과 정보, 귀신과 텔레비전 등등 전통과 현대가 섞인 차원은 몸이 겪어내고 있는 중층적인 현실의 그림이다. 여기에 춤 역시 축축하게 살 속 깊이 배어든 낯선 감수성을 따라 새로운 감각적 질로 나아간다. 양윤준이 설계한 일렉트로닉 음악은 몸의 안팎을 투명하게 흔들고, 디지털의 영상은 무대 위의 가짜 상모돌리기를 받아들여 증폭시킨다. 이러한 무대 환경은 가상과 실재 사이의 해묵은 다툼처럼 보이지만, 춤은 그 환경 속에서 겪어낸 삶의 기억, 디지털의 감각을 함께 버무려 몸의 사회적 성격을 이끌어낸다. 특히 ‘옹헤야’를 변주한 음악적 흥에 따라 춤추는 여인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얹힌 천뭉치가 암시하는 삶은 전통의 뿌리를 물리치지 않으면서 복잡다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기계에 접근하는 춤의 부드러운 터치가 어떻게 시대의 민감한 공기를 예감하고 있는지 드러낸 탁월한 장면이다. ‘모태-텔레비전’은 우리 시대의 정보가 유통되는 체제의 상징인 셈이다. 그 독점적 체제하에서 춤은 새로운 유형의 창문을 만든다. 바깥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자줏빛의 안개가 흐르고, 진실의 사막이 보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몸 내부에서 아직도 ‘아이-텔레비전’의 ‘소리없는 아우성’들이 들끓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자화된 개인의 서글픈 내면풍경이라 가슴을 친다. 유쾌한 질주 다음에 오는 날카로운 메시지이다. 이 작품은 한국 현대무용의 테크놀로지 문화 성찰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수작이다. 무감각할 정도로 불가시적 환경을 이룬 미디어를 통해 전통의 원형질적 삶과 현대의 문명적 현실이 만나는 춤의 모델을 빼어나게 현상하고 있다. 김남수/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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