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질문 던지는 ‘거친 연극’
한해가 저물고 있다. 2005년 한 해, 우리 연극은 어떠했는가? 많은 연극이 명멸해갔지만 연극 동네에 불어온 물질적 풍요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던 것은 정신적 빈곤이었다. 완벽한 연극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들에서조차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경우가 많았고, 문제 많은 사회임에도 그런 징후에 대한 질문은 삭제한 채 표면이 말짱한 연극들을 보며 오히려 거친 연극이 그리워지곤 했다. 그런데 이 겨울, 전혀 다른 질감의 연극 하나가 우리 가슴을 두드린다. 혜화동 일번지라는 남루한 극장에서 공연되는 김낙형의 자작 연극 <지상의 모든 밤들>(12월1~31일)이다. 이 작품은 이미 지난 4월에 만들어져 이 극장 무대에 올랐었다.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된 지 6개월밖에 안된 시점에서 믿을 수 없을 만치 원숙한 태도로 성매매 여성들의 ‘현재’를 다루었던 작품이다. 담담한 톤의 ‘농담 따먹기’식 대사와 격렬한 갈등의 대비 속에 우리 자신의 속내까지 포함하여 아픈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이 목소리는 아직도 유효하다. 연극은 ‘비루개’라는 마을로 도피 여행을 온 네 명의 여주인공들(이영숙, 최반야, 이지연, 신소영 분)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관객의 시점이 곧 이들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시점이다. 함석 벽 뒤 이들의 존재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그것을 알기 위한 궁금증을 폭력으로 발전시켜 가는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군중 심리와 집단적 광기의 위험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직은 신인 딱지를 떼지 못한 젊은 연출가 김낙형의 연극은 사회의 낮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거친 언어의 힘, 삐딱할지라도 할 말은 하는 소극장 정신을 보여준다. 한편 40년에 가까운 연극 인생을 보내고 있는 연출가 오태석의 신작 <용호상박>(11월24일~12월7일)은 우리 사는 사회에 대한 관심을 연극 놀이의 원천으로 삼아온 대표적 작가의 세계를 갈무리해 보여준다. 이 연극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와 같고, 민화 속 호랑이와 까치가 나와 돌아다니는 초자연적이고 민속적인 환타지 세계와 같다. <물보라>(6월)의 황홀경과 <로미오와 줄리엣>(10월)의 생동감을 거쳐 오태석이 다다른 곳, 그것은 연극의 영도와 같은 지점, 곧 ‘모든 것이 한 데 모여 모든 느낌이 살아있으면서도 어떤 느낌도 튀지 않는 편안한 연극의 상태’다. 이런 상태를 가능케 한 것은 그의 놀이적 연극을 돋보이게 해주는 남산 드라마센터의 아레나(반원) 무대, 전무송, 이호재, 정진각 등 그의 오랜 배우들과 해후한 덕이 크다. 여기에 무당 역으로 무대를 휘어잡는 이수미, 용왕의 사자로 깜짝 출연하는 황정민, 빛나는 조역으로 순간 순간을 집중시키는 이병선, 이도현 등 극단 목화 배우들의 완벽에 가까운 하모니. 그러나 박수 형제의 죽음까지 포함하는 1시간15분 가량의 이 짧은 연극이 저녁 마실의 흥겨움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관객으로 하여금 함께 흥얼거리고 함께 춤추고 싶게 하는 연극의 리듬감 덕분이다. 이 리듬 속에는 놀이도, 해학도, 비극도 녹아있다. 이 연극은 굿에서 출발하지만 민속 형식의 탐구로 귀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탐욕에 의해 굿이 망가지고 서로를 파괴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에 대한 반추로 돌아온다. 제야의 종을 치기 전에 우리가 치러야 하는 희생제의, 화해의 굿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노이정/연극평론가 voiv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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