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의 클래식 애호가들만 가득했던 콘서트홀에 젊은 기운을 불어넣은 건 2001년 롱-티보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동혁(34)이었다. 이 대회에서 우승과 더불어 오케스트라상, 프랑스 작곡가 해석상 등 5개 부문 상까지 휩쓴 그는 클래식 연주자로서는 전무후무하게 당시 인터넷 팬 카페 회원수가 4만여명에 육박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클래식 전문잡지인 <클럽 발코니>의 이지영 편집장은 “2002년 신년음악회에서 임동혁이 차이콥스키 곡을 협연할 때 객석에서 꺅 소리가 났었다”면서 “임동혁 이후 (연령대에서) 객석 물갈이가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임동혁에 이어 젊은 팬들을 몰고 다닌 꽃미남 스타는 김선욱(30)이었다. 그는 18살의 나이로 2006년 리즈 국제 콩쿠르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을 거머쥐면서 주목받았다.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조성진(24)이, 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선우예권(29)이 각 대회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면서 클래식계는 반색했다. 김선욱·조성진·선우예권의 공연장에 사람들이 몰렸고, 지금도 이들의 공연이 끝나면 사인을 받으려는 팬들이 길게 줄을 선다. ‘젊은 거장’(김선욱), ‘콩쿠르 부자’(선우예권), ‘건반 위의 시인’(조성진)으로 불리며 사랑받는 세 사람. ‘탁월하다’ ‘휼륭하다’는 막연한 평가를 떠나 이들을 키우고 지켜봐온 클래식 전문가들을 통해 세 사람의 같은 듯 다른 연주스타일을 톺아봤다.
■ 베토벤에 천착한 김선욱, 프랑스 레퍼토리 꿴 조성진, 러시안 로맨틱에 탁월한 선우예권
조재혁 피아니스트는 “악보는 작곡가의 의도를 담아내기엔 해상도가 낮다”고 말한다.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심지어 한 피아니스트가 동일한 곡을 치더라도, 연주자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성장배경이 다른 김선욱, 조성진, 선우예권의 연주 스타일과 집중해온 레퍼토리가 다 다른 이유다.
김선욱은 3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10살에 독주회, 12살에 협연 데뷔 무대를 가졌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영국 왕립음악원 지휘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한예종 재학시절 스승이던 김대진 한예종 음악원장은 “선욱이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김선욱이 12살일 때 처음 만났다는 그는 “말러 교향곡을 치는데 어린 나이에도 성숙함이 묻어났다”면서 “성장한 그의 연주를 봐도 깊고 진중하고 무겁고 내면의 세계가 넓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콩쿠르 우승 이후 김선욱은 베토벤에 천착해왔다. 2009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 2012~2013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2013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담은 첫 음반 등을 발표했다. 10년 가까이 몰입한 베토벤 연주를 통해 “이제 한 겹을 쌓은 듯 하다”고 말했던 그는 스스로가 음악에 설득되지 않으면 연주를 할 수 없는 연주자이기도 하다. 류태형 클래식 평론가는 “김선욱은 베토벤, 슈만 등 독일 레퍼토리를 많이 선보였다”면서 “악보의 논리를 건물처럼 쌓아 올리는 게 독일 음악의 특징으로 잔재주로 반짝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일관성과 끈기, 자기 논리를 가지고 맷집 있게 잘 풀어낸다”고 말했다.
조성진도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해 11살에 첫 독주회를 열었다. 예원학교, 서울예고를 거쳐 프랑스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을 졸업했다. 쇼팽 콩쿠르에서 이름을 알리기 전부터 주목을 받은 그는 15살에 정명훈 지휘자의 서울시향과 협연하기도 했다. 조성진을 13살 때 처음 만났다는 정명훈은 그를 “젊은 나이지만 완벽한 피아니스트”라고 칭찬한다. 조성진은 쇼팽의 ‘녹턴’ ‘피아노 소나타 3번’에 이어 2017년에 낸 앨범 <드뷔시> 등을 비롯해 프랑스 레퍼토리에서 특히 다양한 색채를 보여왔다. 김호경 음악 칼럼니스트는 “순수하고 직관적이며 여러가지 가능성을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연주로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 지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두 사람보다 늦은 9살 때부터 피아노를 친 선우예권은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미국 커티스음악원·줄리아드 대학원 등을 졸업했다. 현재는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연주자 과정을 밟고 있다. 예원학교 시절부터 그를 가르친 신민자 숭실대학교 초빙교수는 “악보를 익히는 시간도 짧고 연주 실력도 훌륭했지만 성실함과 대범함 같은 성품이 더 눈에 띈 친구”라고 말했다. 선우예권은 러시안 로맨틱 레퍼토리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파가니니 ‘랩소디에 의한 변주곡’ 등은 그를 콩쿠르 다승왕이 되도록 이끈 곡들이다. 선우예권을 5년간 지켜봐 온 소속사 목 프로덕션의 이샘 대표는 “반 클라이번 우승을 하기 전인 2014년에 한국에서 첫 리사이틀을 할 때부터 강하면서도 탄력 있는 타건으로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 기존 연주를 뛰어넘는 곡 해석을 이미 구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숙 한국방송 라디오
작가는 “미국에서 유학을 오래 해서인지 선우예권은 즉흥 연주를 즐기지 않지만 피하지도 않는 미국형 피아니스트나 대중적인 걸 잘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 각자 다른 목표…지휘자 도전, 쇼팽을 넘어, 슈베르트에 이르기
기량이 정점에 올라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세 명의 피아니스트의 갈증은 끝이 없다. 자신을 더 갈고 닦기 위해 부지런히 커리어를 쌓고 있다. 국내 활동만 봐도 김선욱은 지난 4월 첼리스트 지안 왕과의 듀오콘서트를 시작으로 바이올리니스트 가이 브라운슈타인과의 듀오 리사이틀(5월), 클래식계 이벤트였던 스타즈 온 스테이지(8월)와 피아노 리사이틀(9월)을 소화했다. 오는 26일엔 부산시립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황제’를 협연할 예정이다. 선우예권은 올해 1월 신년음악회를 시작으로 피아노 리사이틀(4월), 스타즈 온 스테이지(8월)를 끝냈다. 오는 16일에는 뉴욕필하모닉 스트링콰르텟과, 다음달 22일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뮌헨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공연을 앞두고 있다. 각각 드보르자크 ‘피아노 5중주’,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한다. 조성진도 올해 1월 전국 주요 도시를 도는 첫 피아노 리사이틀에 이어 지난달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의 듀오콘서트를 마쳤다. 다음달 16일엔 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가 이끄는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예정돼 있고, 12월6일엔 음반 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 120주년 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과 다시 만난다. 연주곡은 각각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이다.
서로 다른 성격과 스타일만큼 목표지점도 다르다. 김선욱은 최근 영국 런던에서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베토벤, 브람스 등 좋아하는 독일 음악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다. 지휘자를 꿈꿨던 그는 내년 본머스 심포니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으로 지휘자 신고식을 치른다.
조성진은 전국투어를 앞두고 열린 올초 기자간담회에서 쇼팽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레퍼토리에 도전할 뜻을 밝혔다. 드뷔시 타계 100주기인 올해 드뷔시 연주를 늘리겠다는 약속을 했던 그는 몸이 단단해지는 30대에 힘 있는 브람스 연주에 도전할 계획이다.
선우예권은 가장 잘 연주하고 싶은 작곡가로 슈베르트를 꼽는다. “슬픈 여운, 잔향이 가슴 속에 오래 남는 게 좋아서”다. 잔잔한 슬픔, 아린 감점을 잘 전달하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이제 불과 2,30대 연주자지만 솔리스트로서 오케스트라를 능가하는 티켓 파워를 가진 이들에 대해 류태형 평론가는 “아직 연주인생의 반도 안온 이들이 클래식 대중화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주형 클래식 평론가는 “세 사람 모두 성숙하고 긴 호흡으로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이끌어가고 있어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