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의 독일어 본명으로 활동중인 로미나는 한국인 친구집에서 우연히 들은 ‘동백 아가씨’에 빠진 끝에 ‘외국인 트로트 가수’로 국내에 정착했다.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사공의 뱃노래/가물거리면….” 파란 눈에 금발의 젊은 외국인이 만나자마자 ‘목포의 눈물’ 가사를 읊조린다. 궁금했다. “가물거리면의 뜻을 아시나요?” 머뭇거리지 않는다. “네, 보일 듯, 안 보일 듯 아른거린다는 뜻 아닌가요?” 정확하다. "부두의 새악시/아롱젖은 옷자락….” 설마 ‘아롱젖은’도 알라나? 이번에도 거침없다. “눈물이 흘러내려, 그 눈물이 옷자락에 이슬처럼 맺혔다는 뜻이 아닐까요?” 헐! 한국인도 잘 모를 옛 트로트 가사의 뜻은 물론 노래가 품고 있는 진한 구슬픔까지 표현한다. 진정성이 묻어난다.
한국에 온 지 10년째, 최근 첫 앨범 <상사화>을 내고 본격 활동에 나선 독일 출신 ‘외국인 트로트 가수 1호’ 로미나(32·사진)는 ‘제2의 동백 아가씨’란 별명대로 우리말 우리 노래에 유창했다. 로미나는 ’로마에서 온 사람’이란 뜻의 독일어 본명이다. 로미나 알렉산드라 폴리노스라는 긴 이름의 앞부분이다. 그를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 카페에서 13일 만났다.
한국생활 10년 만에 첫음반 ‘상사화’ 발매 ‘남북통일’ 희망 담은 민요풍 노래도 “한국말 더 잘하려 신문읽기도 열심”2009년 한국외대 교환학생 와서 ‘정착’ ‘동백 아가씨’ 불러 이미자 제자 ‘발탁’ “18일 김대중추모 ‘목포의 눈물’ 도전”
토로트 가수 로미나가 지난 3일 인터뷰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있다.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어떻게 한국 노래, 그것도 트로트에 끌렸을까? “2009년 한국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아버지가 틀어놓은 ‘동백 아가씨’를 듣고 꽂혔어요. 트로트 첫 경험이자 애창곡이 됐죠. 주변에서 잘한다, 신기하다 해서, 2012년 <한국방송>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서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불러 장려상을 받고, 그해 상반기 결선에선 ‘신사동 그 사람’으로 인기상을 받았어요. 2013년 가을엔 직접 기타 치며 ‘동백 아가씨’를 부른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죠. 입소문이 난 덕에 이미자 선배님의 콘서트 무대에 초대 가수로 섰어요.”
2014년 귀국 대신 한국에 남기로 한 그는 이미자의 제자로 본격적인 노래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불후의 명곡> <가요 무대> 등에도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갔다. 이미자 콘서트 고정 게스트로 50여 차례나 무대에 섰단다. 2년 전부터는 ‘6시 내 고향’(한국방송) 고정 리포터로 활약하고 있다. “알아보는 어르신들이 많아요. 너무 반가워해요.” 인터뷰할 때도 옆자리 60대 여성이 그를 보곤 “방송 잘 보고 있어요”라며 반가워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로미나는 골동품을 감정하고 중개하는 ‘아트 딜링’ 사업을 하는 부모 덕분에 어릴 때부터 동양 문화에 익숙했단다. 애초 중국 베이징에서 2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귀국해 함부르크대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던 그는 2009년 중국에서 사귄 한국인 친구 영향으로 한국외대 교환학생을 신청했단다. “동양 나라 중에 한국에 특히 관심이 많았어요.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뛰어난 한국어 실력 덕분에 한국 유학 6개월 만에 <미녀들의 수다>(한국방송)에 캐스팅됐다. 하지만 학교에서 반대해 출연이 무산됐다. “어릴 때부터 꿈은 배우였어요. 그래서 무대에 선 적도 많고 노래도 좋아했죠. 아마 이탈리아계 헝가리 태생인 어머니로부터 ‘끼’를 물려받은 듯해요.”
그럼에도 여전히 ‘트로트’에 끌린 이유가 궁금했다. “독일에서도 또래들과 달리 ‘올드 팝송’을 좋아했어요. 한국에 와서도 다들 ‘한류의 선봉’인 아이돌 노래를 좋아했지만 옛 노래가 더 좋았어요. 특히 좀 느린 듯 심금을 울리는 트로트가 딱 내 취향이었어요. 한국의 슬픈 역사와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담고 있고 시적인 가사도요. 우연히 만난 무당이 ‘전생에 한국인이었다’고 하더라니까요 ㅎㅎ.”
트로트 가수 로미나의 첫 미니앨범 ‘상사화’ 자켓.
가수 데뷔 4년 만에야 첫 앨범을 냈다. “배우 욕심도 있어서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지만, 우선은 가수로 확실한 이미지를 심고 싶어요.”
앨범엔 사극 주제가 풍의 타이틀곡 ‘상사화’와 민요풍의 ‘에헤라디야’ 그리고 1920년대 민족 가곡 ‘봉선화’를 리메이크해 실었다. 특히 ‘에헤라디야’의 노랫말에는 남북통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담았단다.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마소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마소~작지만 우리 집 앞마당에 희망의 씨를 뿌릴 테요…’
“지난 4·27 남북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로 얼싸안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감동받았어요. ‘드디어 희망이 보인다’라고 소리 지르면서 좋아했었죠.”
독일 통일 때 3살이었다. 그래서 당시엔 별 감흥이 없었단다. 하지만 한국에 오니 유일한 분단국의 아픔이 절절히 느껴졌다. 특히 이산가족의 만남과 헤어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남북한의 문제를 당사자가 해결해야 하는데,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이 간섭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그가 오는 18일 고양시 일산문화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김대중 9주기 추모 고양평화콘서트에 나가게 된 이유도 ‘남북통일의 희망’을 살리고 싶어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그린 창작 음악극 <겨울을 품은 꽃>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1930년대 원조 가수 이난영 선생님의 창법을 살려 최대한 애절하게 부를 겁니다.”
한국말을 더 완벽하게 구사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제일 어려운 건 높낮이가 없는 한국말 억양이다. 신문도 읽기 시작했다. “통일된 한국에서 평양과 금강산을 오가며 마음껏 트로트를 부르고 싶어요. 그런 날이 곧 오겠죠?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동영상 /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