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는 영화, 드라마, 발레, 오페라 등으로 수없이 만들어졌을 만큼 매력적인 고전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풍속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뮤지컬 프로덕션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가 만든 <안나 카레니나>가 라이선스 초연으로 한국에 들어온다고 알려지면서 뮤지컬은 올 상반기 기대작으로 꼽혔다. 자국 고전을 본토에서 어떻게 해석했을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작품은 드라마는 없고 쇼만 있었다.
뮤지컬은 안나와 레빈의 대조적 삶을 두 축으로 보여주는 원작과 달리 안나 이야기에 집중한다. 안나가 젊은 백작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과 행복을 쫓다 결국 파국에 이르는 과정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톨스토이의 ‘정신적 자아’인 레빈의 이야기는 축소했다.
문제는 사건만 가져왔을 뿐 안나의 섬세한 감정변화는 거세됐다는 점이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무도회에서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부터 브론스키와 갈등을 겪고 불행해 하는 모습까지 두 사람의 감정선을 매끄럽게 보여주지 못한다. 이 때문에 원작을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관객들은 극에 감정이입을 하기가 어렵다. 귀족사회에서 숨 막혀 살던 안나와 진보적인 브론스키의 사랑이 그저 불륜으로 비칠 뿐 사회적 규범과 조건을 초월한 불같은 사랑의 이유는 알 길이 없다.
뮤지컬에서는 노래가 대사와 같다. 노래가 부족한 이야기를 채워 감정선을 이어주면 좋으련만 노래도 힘이 없긴 마찬가지다. 원곡을 그대로 번역한 탓인지 가사가 한없이 단조롭다. 사랑하던 키티로부터 거절당한 레빈은 첫 솔로곡에서 “끝났어”라는 노랫말을, 아이를 보내달라는 안나의 편지를 받은 남편 카레닌은 “은혜를 모르는 것”이란 말을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해서 부른다. 옥주현, 정선아, 이지훈, 민우혁 등 성량과 기량이 뛰어난 배우들이 노래하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다. 방대한 원작의 섬세한 이야기를 살리지 못한 대형뮤지컬은 결국 무대와 조명, 앙상블로 빈 곳을 채운다. 거대한 중앙 스크린과 8개의 패널 영상으로 보여주는 열차, 기차역, 경마장 등은 화려하고 장엄하다. 발레와 클래식이 강한 러시아의 색채를 느끼는 건 앙상블 배우들이 남녀 한 쌍으로 짝을 지어 춤추는 모습에서다.
인상적인 장면은 공연의 시작과 끝에서 나온다. 주된 배경인 기차역과 기차가 나오면서 내레이터가 앙상블과 등장하는 프롤로그 장면은 극의 전개를 암시하듯 강렬하게 시작된다. 록 사운드의 노랫말에서 “신사 숙녀 여러분, 규칙을 지키세요. 그래야 신의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다”라며 선로의 이탈이 곧 인간이 지켜야 도덕적 가치와 규칙을 깨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일깨운다. 극의 끝에서 안나가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가 된 당대 유명가수 패티가 나오는 장면은 가장 많은 박수가 나온다. 노랫말 “죽음 같은 사랑”에서 그나마 위태로운 사랑 속에 절망하는 안나의 고통을 보여준다.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원작에서 사건만 가져왔을 때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다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2월25일까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