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대원음악상’ 특별공헌상 재독작곡가 박영희씨
재독 작곡가 박영희(71·사진)씨가 지난 6일 ‘제11회 대원음악상’ 특별공헌상을 수상했다. ‘유럽 현대음악계의 대모’, ‘제2의 윤이상’으로 불리는 그는 한국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조화를 통해 세계적인 작곡가로 우뚝 섰다. 그런 점에서 윤이상(1917~95)과 일맥상통한다. 독일 유학을 결심한 것도 1971년 원경수가 지휘하는 윤이상의 <례악>(禮樂)을 듣고서였다.
충북 청주 출신인 박씨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74년 독일로 건너갔다. 이어 78년 스위스 보스빌 작곡 콩쿠르와 79년 유네스코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영감을 얻은 교향곡 <소리>(SORI)를 독일 도나우에싱겐 현대음악제에서 초연해 명성을 얻었다. 87년 <님>, 2007년 <빛 속에서 살아가면>을 초연했다. 하지만 민감한 주제를 작곡한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94년 독일 브레멘 국립예술대 작곡과 교수가 됐다. 아시아인, 여성 작곡가로서는 독일어권에서 최초였다. 그의 음악 인생을 들었다.
윤이상 ‘례악’ 이끌려 독일로 유학
1980년 광주항쟁 소재 ‘소리’ 명성
“초연 때 윤 선생님 칭찬에 기뻤죠”
지난해 ‘국제 박영희작곡상’도 제정 서울대 연극반때 스승 오태석 대본
‘최양업 신부’ 일대기 오페라로 “제가 청주 도심 남문로 출신이에요. 무심천변 장터에서 여섯살 때 판소리를 들었어요. 그 기억이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했고 제 언어와 음악을 뚜렷하게 했어요.” 박영희 음악의 바탕은 ‘우리 소리’다. 80년 발표한 작품 ‘소리’의 배경은 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과 80년 5월 광주다. 이 작품에 쓴 ‘소리’는 전라도 농악과 상여꾼 노래인 향두가(香頭歌)다. 그는 향두가 가사와 실제 소리를 70년대 말부터 채집했다. “독일 유학생들끼리 한국 신문을 돌려 보곤 했는데, 전체가 백지로 나오곤 했어요. ‘이런 시절에 음악 공부를 해야 하나, 지금 여기 있어야 하나’라는 고민을 했어요. 그러다 ‘그래서 더 음악이 필요하다, 더 철학이 필요하다’라며 마음을 다잡았지요.” 그에게 우리 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대금, 거문고, 시조 등 소리가 나올 때부터 떨리고 살아 움직여요. 서양에선 한 음이지만 우리나라에선 떨리면서 여러 음으로 나뉘어요. 우리는 세종 때부터 서양의 황금분할 원리를 알고 있었어요. 우리 음악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2006년 초연한 오페라 <달그림자>는 그리스 비극에 한국철학과 동양철학을 접목해 주목 받았다. “처음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이 ‘서양에서 가장 먼 곳에서 왔으니 당신에게 위촉한다’며 작곡을 제안했을 때 거절했어요. 먼저 2년 동안 그리스 비극을 공부를 한 다음에야 수용했어요. 오이디푸스 얘기를 바탕으로 노자 사상을 더하고, 여기에 한병철씨의 시를 받아 작곡했습니다.” 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피로사회>, <투명사회> 등을 쓴 철학자다. 그리스 비극을 소재로 오페라를 쓴 박씨는 사실 대학 연극반 출신이다. 당시 선생님은 오태석 극단 목화 대표였다. 오랜 인연은 최근 오페라 공동작업으로 이어졌다. 소재는 우리나라 두번째 신부인 최양업(1821~61)이다. “최양업 신부를 소재로 머릿속에 오페라를 그리고 있어요. 충북 진천 배티성지에서 최 신부의 서한을 읽고 그 분의 영성에 ‘뿅’ 갔어요. 4·4조 운율로 우리 문화를 잘 표현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대본은 오태석 선생이 쓰는 중인데 66년 음대 다닐 때 연극반을 지도하셨어요. 최 신부는 수많은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가톨릭교회)에서 일했고 순교자들은 처형장에 가면서도 믿음을 증거하며 웃었습니다. 신뢰가 없는 현대사회에서 영성과 정신의 힘을 보여주는 분입니다.” 우리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조화를 꽤했다는 면에서 박영희 작곡가는 올해 탄생 100돌을 맞은 윤이상과 비교된다. “제가 베를린에서 ‘소리’를 연주할 때, 윤이상 선생이 오셔서 칭찬을 해주셔 기뻤어요. 사실 71년 원경수 선생님 ‘례악’을 지휘할 때 그 음에 완전히 취해 그런 음을 내는 분이 있는 독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지난해 그의 이름을 딴 ‘국제 박영희작곡상’이 제정됐다. 젊은 작곡가의 창작지원을 위해 주독 한국문화원과 한국작곡가협회가 만들었다. “국제적인 상입니다. 제 이름을 알린다기보다 우리가 서양 악기를 배워 연주하듯, 서양인들도 국악기를 배워 연주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내친김에 작곡가에 대한 국가의 정책지원 필요성도 강조했다. “한국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한국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브라질에서는 외국 오케스트라가 오면, 자국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게 하는데, 그 곡을 세계에 알리는 발판이 됩니다. 작곡은 취미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처절한 얘기에요. 작곡가가 무릎을 꿇고 징징 대도록 하는 게 아니라, 정책으로 자국 작곡가를 서포트해야 합니다. 현재 제 자비를 털어 40살 이하 작곡가를 대상으로 ‘파안 생명나무 작곡가’를 선정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걸 왜 나라에서는 하지 않나요?” 박영희의 로마자 표기는 ‘영희 박 파안’(Younghi Pagh-Paan)이다. 파안(琶案)은 도올 김용옥이 붙여준 호로 ‘책상에 놓인 비파’라는 뜻이다. 동양적 깊이와 품격이 깃든 우아한 말이지만, 왠지 책상에 묶인 작곡가의 숙명 같다는 비감함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손준현 기자dust@hani.co.kr
재독 작곡가 박영희씨. 대원문화재단 제공
1980년 광주항쟁 소재 ‘소리’ 명성
“초연 때 윤 선생님 칭찬에 기뻤죠”
지난해 ‘국제 박영희작곡상’도 제정 서울대 연극반때 스승 오태석 대본
‘최양업 신부’ 일대기 오페라로 “제가 청주 도심 남문로 출신이에요. 무심천변 장터에서 여섯살 때 판소리를 들었어요. 그 기억이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했고 제 언어와 음악을 뚜렷하게 했어요.” 박영희 음악의 바탕은 ‘우리 소리’다. 80년 발표한 작품 ‘소리’의 배경은 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과 80년 5월 광주다. 이 작품에 쓴 ‘소리’는 전라도 농악과 상여꾼 노래인 향두가(香頭歌)다. 그는 향두가 가사와 실제 소리를 70년대 말부터 채집했다. “독일 유학생들끼리 한국 신문을 돌려 보곤 했는데, 전체가 백지로 나오곤 했어요. ‘이런 시절에 음악 공부를 해야 하나, 지금 여기 있어야 하나’라는 고민을 했어요. 그러다 ‘그래서 더 음악이 필요하다, 더 철학이 필요하다’라며 마음을 다잡았지요.” 그에게 우리 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대금, 거문고, 시조 등 소리가 나올 때부터 떨리고 살아 움직여요. 서양에선 한 음이지만 우리나라에선 떨리면서 여러 음으로 나뉘어요. 우리는 세종 때부터 서양의 황금분할 원리를 알고 있었어요. 우리 음악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2006년 초연한 오페라 <달그림자>는 그리스 비극에 한국철학과 동양철학을 접목해 주목 받았다. “처음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이 ‘서양에서 가장 먼 곳에서 왔으니 당신에게 위촉한다’며 작곡을 제안했을 때 거절했어요. 먼저 2년 동안 그리스 비극을 공부를 한 다음에야 수용했어요. 오이디푸스 얘기를 바탕으로 노자 사상을 더하고, 여기에 한병철씨의 시를 받아 작곡했습니다.” 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피로사회>, <투명사회> 등을 쓴 철학자다. 그리스 비극을 소재로 오페라를 쓴 박씨는 사실 대학 연극반 출신이다. 당시 선생님은 오태석 극단 목화 대표였다. 오랜 인연은 최근 오페라 공동작업으로 이어졌다. 소재는 우리나라 두번째 신부인 최양업(1821~61)이다. “최양업 신부를 소재로 머릿속에 오페라를 그리고 있어요. 충북 진천 배티성지에서 최 신부의 서한을 읽고 그 분의 영성에 ‘뿅’ 갔어요. 4·4조 운율로 우리 문화를 잘 표현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대본은 오태석 선생이 쓰는 중인데 66년 음대 다닐 때 연극반을 지도하셨어요. 최 신부는 수많은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가톨릭교회)에서 일했고 순교자들은 처형장에 가면서도 믿음을 증거하며 웃었습니다. 신뢰가 없는 현대사회에서 영성과 정신의 힘을 보여주는 분입니다.” 우리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조화를 꽤했다는 면에서 박영희 작곡가는 올해 탄생 100돌을 맞은 윤이상과 비교된다. “제가 베를린에서 ‘소리’를 연주할 때, 윤이상 선생이 오셔서 칭찬을 해주셔 기뻤어요. 사실 71년 원경수 선생님 ‘례악’을 지휘할 때 그 음에 완전히 취해 그런 음을 내는 분이 있는 독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지난해 그의 이름을 딴 ‘국제 박영희작곡상’이 제정됐다. 젊은 작곡가의 창작지원을 위해 주독 한국문화원과 한국작곡가협회가 만들었다. “국제적인 상입니다. 제 이름을 알린다기보다 우리가 서양 악기를 배워 연주하듯, 서양인들도 국악기를 배워 연주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내친김에 작곡가에 대한 국가의 정책지원 필요성도 강조했다. “한국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한국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브라질에서는 외국 오케스트라가 오면, 자국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게 하는데, 그 곡을 세계에 알리는 발판이 됩니다. 작곡은 취미가 아니라 자기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처절한 얘기에요. 작곡가가 무릎을 꿇고 징징 대도록 하는 게 아니라, 정책으로 자국 작곡가를 서포트해야 합니다. 현재 제 자비를 털어 40살 이하 작곡가를 대상으로 ‘파안 생명나무 작곡가’를 선정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걸 왜 나라에서는 하지 않나요?” 박영희의 로마자 표기는 ‘영희 박 파안’(Younghi Pagh-Paan)이다. 파안(琶案)은 도올 김용옥이 붙여준 호로 ‘책상에 놓인 비파’라는 뜻이다. 동양적 깊이와 품격이 깃든 우아한 말이지만, 왠지 책상에 묶인 작곡가의 숙명 같다는 비감함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손준현 기자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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