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화백 탄신 100년’ 기념 전시회를 마련한 8남매가 10월1일 서울 시민청 갤러리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장남 김주영(뒷줄 왼쪽)·며느리 김종민(앞줄 왼쪽 넷째)·맏딸 김재숙(앞줄 오른쪽 넷째)씨. 사진 이현석씨 제공
“영이야, 영이야, 바둑이는 너하고 놀잔다. 나는 학교로 간다.”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초등학교를 다닌 지금의 어른 세대들에게 친숙한 국어 교과서의 삽화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의 실제 모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바로 캐릭터를 그린 고 김태형 화백의 자녀 8남매(6녀2남)다.
이들은 지난 1일부터 오는 8일까지 서울시청 시민청갤러리에서 부친의 탄생 100년을 기념해 ‘김태형의 교과서 일러스트: 철수와 영이의 풍경’ 전시회를 열고 있다. 옛 초등학교 교과서 전시회에서 책에 실린 삽화가 소개된 적은 있지만, 원화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전시 기획을 주도한 맏이 김주영(67·이비인후과 전문의)씨는 3일 “저를 비롯해 8남매 모두 그림이나 예술 재능을 잇지 않아서 그동안 부친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잘 몰랐는데, 안사람이 뒤늦게 취미로 그림을 배우면서 ‘선친 탄생 100년을 기리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소개했다. 아내 김종민씨는 1993년 선친 작고 이래 20년 넘게 형제들이 보관해온 원화 160여점을 모아서 실제 교과서에 실린 장면과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을 해냈다. 특히 81년 김 화백이 원화와 그 삽화가 실린 교과서 장면을 나란히 붙여 제작해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긴 8~10폭 병풍 3개도 공개됐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첫 문교부 간행 초등 1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의 표지. 고 김태형 화백이 그린 철수·영이·바둑이가 실렸다.
장손인 김재호(불교방송 피디)씨는 “지금은 ‘철수와 영희’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엔 ‘철수와 영이’였다는 사실도 이번에 자료 정리를 하면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흔히 친구 사이로 알고 있는 철수와 영이는, 6학년 2학기 교과서에서 졸업장을 손에 들고 운동장을 나서는 철수를 동생 영이가 뒤따라오는 모습이 그려져 남매로 확인되기도 했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난 김태형 화백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도쿄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42년 조선미술전람회 21회에서 동양화 부문 입선을 하면서 화가로 입문했다. 46년 문교부(현 교육부) 편수국 위촉화가로 교과서 삽화를 그리시기 시작했다. 정부 수립 직후 48년 10월5일 문교부에서 펴낸 국민학교용 교과서 47종 가운데 1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 <바둑이와 철수>를 비롯해 76년까지 꼬박 30년 동안 산수·자연·사회·도덕·바른생활·사회생활 등 전 학년, 전 과목에 걸쳐 그가 그림을 담당했다. 2006년 교육부는 10월5일을 교과서의 날로 제정하면서 그에게 공로상을 주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도, 서울 수복 뒤 상경해서도 집 안방에 상을 펴놓고 철수와 영이를 그리시던 장면이 지금도 선연해요.” 맏딸 김재숙(78)씨는 “위로 딸 여섯에 밑으로 아들 둘까지 한두 살 터울로 8남매를 키운 덕분에 살던 집이며 키우던 강아지 삐루(바둑이의 모델)까지 우리들 일상이 그대로 그림 속에 담겨 있다”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안소연씨는 작품 해설문에서 “김 화백은 능숙한 데생과 표현력으로 전통 회화와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되 예술과 대중매체의 교집합으로서 일러스트 정체성을 뚜렷이 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교과서에서 ‘가갸거겨’ 글자만 학습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철수와 영이(영희)가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입학하는 1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의젓한 모습으로 내내 등장하는 스토리텔링 방식이어서 해방 이후 반세기 한국인의 삶을 기록한 사료로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김주영씨는 “앞으로 원하는 곳이 있으면 작품 전시를 계속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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