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개인 화실에서 만난 만화가 윤태호씨가 제자들이 그려준 자신의 얼굴 그림 옆에 서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윤태호 만화가
윤태호 만화가
문하생 선배들의 화투판을 엎어버리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7년을 보내고도 프로 입단에 실패한 ‘장그래’는 군복무를 마친 뒤 굴지의 종합상사 ‘원 인터내셔널’에 ‘낙하산’으로 입사합니다. 낙하산이라고 해봐야 바둑 후견인 덕분에 한 다리 건너 얻은 하루살이 인턴 자리. 그래도 장그래는 바둑 한 수를 복기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과제를 하나씩 수행해 일단 계약직 사원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엘리트 사원들로 넘쳐나는 회사에서 고졸 학력에 특별한 기술도 없는 그가 정규직이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연재 100회를 앞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만화 <미생> 얘기입니다. 종합상사가 뭔지조차 몰랐던 장그래가 일을 배워가는 과정을 한 회씩 따라가는 동안, 일상성이 갖는 그 차분한 아름다움에 저는 여러 번 감동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낸 사람은 놀랍게도 <야후>, <이끼>, <내부자들>처럼 어둡고 사회성 짙은 작품으로 유명한 윤태호 작가입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 오리역 부근 작업실에서 만난 윤태호의 첫인상은 <미생>의 장그래보다 <이끼>의 ‘류해국’에 가까웠습니다. 자존심 강하고 까칠한 표정에서 은근한 ‘포스’가 느껴졌습니다. 작업실에는 세 명의 문하생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나와 닮았다
-요즘도 문하생이 있군요?
“처음에는 연재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화실 후배들하고 의기투합한 수준이었고,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문하생을 뒀어요. <이끼> 끝나고 <미생> 시작할 때까지 3년 동안은 수입이 거의 없어서 월급 주느라 빚을 지기도 했죠.”
-운영 부담이 적지 않을 텐데요.
“한국과 일본 만화는 연재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저는 15페이지씩 주 2회 연재하는데, 제가 스토리까지 다 쓰거든요. 그림 그릴 시간을 줄여서라도 스토리를 고민해야 질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문하생을 둘 수밖에 없어요. 기본적으로 만화가는 단행본으로 먹고살아야 하고, 연재 고료는 제작비인 셈이거든요. 작가 혼자 단행본을 만드는 미국이나 유럽하고는 구조가 다르죠.”
-저는 선생님 작품을 대부분 종이책으로 사봤는데, 웹툰의 그림이 오히려 선명하고 보기 좋더군요. 공짜로도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왜 만화책을 사 볼까요?
“발광체니까 모니터로 보면 색도 더 선명하고 예쁘죠.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의심이 많아요.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상품을 사지는 않거든요. 영화를 볼 때도 먼저 인터넷에서 리뷰를 찾아보잖아요. 군중심리도 있고, 아는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도 있고, 신뢰의 문제도 있는 거죠. 포털에 웹툰을 올리는 것 자체가 그런 신뢰를 얻는 마케팅의 일환이고요.”
-<미생>은 악인이 없으면서도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살아있어서 좋더군요. 저는 ‘안영이’처럼 안정감 있는 캐릭터가 좋았어요.
“(깜짝 반기며) 그렇죠? 대부분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던데, 세상에는 그런 슈퍼우먼이 있어요!”
-장그래와 안영이가 연애라도 할 걸 기대했는데, 좀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더군요.
“제가 <미생>에서 그리고자 한 게 있거든요. 하나는 임원의 품격. 회사 임원들이 회사 내 정치나 하고 룸살롱에서 술 먹고 국회의원 만나고 사장단끼리 여행이나 다닐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임원이 되는 건 기본이죠. 둘째로는 회사 내에서 애정으로 발전하지는 않는 나이스한 남녀관계! 연애나 악인이 나오는 순간 만화의 태도, 톤이 달라지는데 그걸 원하지 않았어요. 뭔가 서로 동기를 촉발해 주는 사람의 존재를 그리고 싶었죠. 동성보다 이성간에 그런 게 있을 수 있거든요. 건강한 경쟁관계도 가능하고.”
노숙하면서 만화학원 다닐 때
고교 동창회 나가려니까
대학 간 애들만 모이기로 했대요
악다구니가 생겨 결심했어요
‘흥, 그럼 난 25살까지 데뷔할 거야’ 조운학 선생님 아래로 들어가
선배들한테 사고 치고 무릎 꿇고…
그렇게 내 첫 작품이 나왔는데
만화가 아니고 쓰레기였죠
그림 빼고는 모두 바닥!
그 뒤로 스토리에 매달렸어요 -자기 회사가 원 인터내셔널의 모델이라는 사람을 여럿 봤습니다. “회식 자리 나가보면 각 상사의 차장, 부장님들이 모두 ‘우리 회사가 모델이죠?’ 물어요. 전반적인 회사 분위기는 대우인데, 회의 준비나 절차를 보면 삼성 스타일, 또 어떤 면은 엘지 같고.” -어두운 만화를 주로 그리다가 일종의 인생지침서나 자기계발서로 분위기를 확 바꿨습니다. 동기가 뭔가요, 혹시 먹히는 걸 한번 해보자?(웃음) “출판사에서 계약금을 받고도 <이끼> 끝나고 3년 동안은 취재만 했어요. 바둑과 샐러리맨을 연결시킨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는데, 제가 두 분야 모두 문외한이잖아요. <가우스 전자>, <무대리>처럼 회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유머러스한 만화는 많은데, 어떻게 극만화를 만들까 고민이 많았죠. 그렇다고 우리가 혼다를 무릎 꿇리는 식의 성공신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세상 사는 게 힘든 것은 악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내적 모순 때문일 때가 많거든요. 자기 한계, 내 생각의 편협함 때문에 힘든 건데, 자기를 돌아보면서 발전하는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나 회사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만 있을 뿐, 제가 현실을 모르잖아요. 취재하다 보니 다행히 디테일이 살아나고 갑자기 저 스스로 재미있어졌어요. 인생지침서나 자기계발서 같다? 이 책은 사실 제 개인의 고백서예요. 많은 에피소드들이 제가 살면서 후회했던 지점들에 대한 반성이에요. 왜 그때 그 노력을 하지 않았지? 왜 그때 용감하게 그 말을 하지 않았지? 왜 자기 합리화를 하고 도망쳤지? 인정받고 싶은 장그래의 욕망에 제 감정이 많이 이입되죠.” -어떤 점이 고백적인가요? “그 친구(장그래)는 바둑 특기생으로 자랐고, 저는 미술 특기생으로 자랐어요. 똑같이 고졸이고 학업성취도가 많이 떨어지는 삶이었죠. 저도 세상에 나와서 만화가 아니면 뭘 했을까 싶을 정도로 일반적인 상식의 기초가 떨어지는 사람이에요. 문하생 때는 비슷한 또래끼리 생활하니 별로 부끄럽지 않았는데, 제 이름 달고 데뷔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영어 쓰는 사람 많고, 그런 사람들에게 꿀리는 게 싫어서 알아듣는 척하다가 돌아와서는 좌절에 빠지고, 전화해서 그게 무슨 뜻이었지 물어보고, 무식에 대한 공포가 컸어요.” 문하생 선배들의 화투판을 엎어버리자… -장그래와 비슷한 두려움을 느꼈군요. “<미생>을 통해서 그런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었어요. 그 전의 만화들에는 남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냉소적인 유머, 건강하지 못한 유머가 많았거든요. 어느 날 12살짜리 큰애가 8살짜리 동생에게 짜증을 내는데 말투가 딱 제 모습인 거예요. 저의 성향이 아이들에게 유전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애를 혼낼 게 아니고, 내가 바뀌어야 하는구나, 내가 바뀌려면 기본적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어야겠구나 생각했죠. <미생>이 4~5회 지나니까 아내가 ‘처음으로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좋다’고 하더군요. <이끼>는 반응이 뜨거웠지만 아내가 항상 조마조마해했거든요.” -저는 솔직히 <야후>를 보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삼풍백화점을 비롯해서 내내 무너지고, 죽고, 죽이고. “<야후>를 5년 동안 연재했는데, 주인공을 모두 죽이면서 끝냈죠. 진짜 두 생명을 죽인 것 같았고, 이후 3년의 슬럼프가 왔어요. 장모님한테 돈 빌려서 겨우 버텼죠. 그때 제가 해낸 큰일이라고는 아이가 타는 네발자전거를 두발로 바꿔 준 게 전부였어요. 창작자로서 정말 지옥이었어요, 뭘 해도 안 됐고.” -이전 작품에서는 주로 아버지만 나오는데다 그나마 대부분 비참하게 죽습니다. <미생>에서 비로소 어머니가 등장하는데요. “제 아버지는 꽤 거친 분이셔서 제가 많이 혼나면서 자랐어요. 아버지를 생각하면 머리 위에 맷돌 하나 올려놓은 것처럼 턱턱 걸리는 느낌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한 정신과 의사의 실존적 자기분석>이라는 책을 읽고 제가 바라본 아버지 입장에서 ‘아버지 일기’를 적은 적도 있어요. 아버지가 <한겨레> 보시기 때문에 더 자세한 말씀은 못 드리고요.(웃음) <미생>에서 어머니가 등장한 것은 제 내면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해요.” 1969년 광주에서 태어난 윤태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리고 각종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아 자연스럽게 미대 진학을 꿈꾸었습니다. 인사성 밝고 남을 웃기기 좋아한 소년의 별명은 ‘까불이’. 그러나 고1 때 미대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어마어마한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동시상영 극장, 만화방 등을 전전하면서 친구도 없이 외로운 2년을 보내고 나니, 동년배 미대 준비생들과 뛰어넘을 수 없는 실력 차이도 생겼습니다. “돈이 없으면 미술학원 청소를 해주면서라도 그림을 배웠어야 했다”고 뒤늦게 깨닫고 나자 더 깊은 절망이 밀려들었습니다. 그 절망 속에서 “막연하게 생각했던 거라도 질러봐야지” 싶어 선택한 것이 만화가의 길이었습니다. “88년 서울에 올라와 노숙하며 만화학원에 다닐 때 지하철에서 고교 동창을 만났어요. ‘반장에게 전화해 장소를 확인하고 동창회에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막상 반장은 난처한 목소리로 ‘대학 다니는 애들만 모이기로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 얘기 듣고 악다구니가 생겼고, ‘나는 25살까지 만화가로 데뷔하겠다’고 결심했죠.” -그 결심 때문에 허영만 문하생에서 조운학 문하생으로 옮겨가기도 했죠? “문하생에도 단계가 있거든요. 1단계는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를 먹칠하는 ‘뒤처리’, 2단계는 인물을 제외한 모든 것, 예컨대 자동차나 건물을 그리는 ‘배경’, 3단계는 인물을 펜으로 그리는 ‘잉킹’, 4단계는 콘티를 받아 밑그림을 연필로 그리는 ‘데생’. 그런데 허영만 선생님은 데생을 직접 하시기 때문에 데생을 배울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조운학 선생께로 옮겼죠.” -데생은 고참 문하생이 하는 거라서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래서 제가 사고도 쳤어요. 화실에 40~50대의 고참 ‘선생님급’이 많았는데, 이분들이 밤이면 고스톱을 치는 거예요. 제가 그걸 보다가 참지 못하고 화투판을 엎었어요. ‘내가 당신들 술심부름하러 여기 온 줄 알아, 내가 뭘 포기하고 여기 왔는데?’ 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25살 전에 데뷔하겠다는 복수심으로 버티던 시절이니까요. 그래서 그분들이 ‘저 새끼 안 자르면 우리가 집단으로 그만두겠다’고 해서 제가 무릎 꿇고 사과하고 난리가 났었죠. 그러고는 저 혼자 데생 연습을 하고 그걸 누가 빼앗지 못하게 팔꿈치로 누르고 화판에 엎드려 잠을 잤어요. 그러자 조 선생님이 저보다 나이든 사람을 모두 불러 모아 ‘태호한테 데생 시키려는데 반대하는 사람 손들어’ 하고 물으셨어요. 아무도 손을 안 들었죠.” -나이를 뛰어넘은 파격인데 윤태호의 뭘 보고 데생을 시키기로 작정하셨을까요? “(잠시 생각하다가) 그림의 성취를 느껴본 사람들은 지금 당장 잘 그리는 것보다 성취 욕망이나 동기의 명확성 같은 기질을 보는 것 같아요. 안 시켜주면 당장 나갈 것 같아 붙잡으신 면도 있겠죠.(웃음)” 실제로 윤태호는 24살이 되던 93년 화실을 나와 <월간 점프>에 ‘비상착륙’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합니다. 그러나 막상 첫 작품이 인쇄된 걸 보니 “그건 만화가 아니라 쓰레기”였습니다.
그림이 아무리 좋아도 스토리가 빠지면 만화가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주저 없이 문하생으로 화실에 복귀했고 95년 말까지는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그림만 그리며 나머지 시간을 스토리 공부에 투자했습니다. 당시 <모래시계>와 최인호 시나리오 전집을 손으로 베낀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에니어그램을 배웠고, <발칙한 인생>을 그릴 때는 아예 9명의 주인공에게 에니어그램에 따른 각각의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지금은 사주팔자, 손금, 별자리까지 공부하면서 등장인물의 성격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가 뭐 하는 분이고, 어머니는 누구인데, 학교는 어디를 다니고, 육성회비를 못 내서 이런 고생을 했다고 가상의 개인사를 빽빽하게 적어놓으면, 나중에는 상극인 캐릭터들이 알아서 부딪히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만들어내요. <내부자들>을 그릴 때는 주인공들이 태어날 때부터 해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미리 엑셀로 정리했어요.”
고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던 그 순간
-본인은 어떤 성격입니까?
“결혼 전 장모님이 궁합을 보니 저에 대해 ‘여자보다 몇 배 예민하다. 상처도 잘 받고 이상한 지점에서 시비를 걸 거’라고 하더래요. ‘예민하고 자기밖에 모른다, 내 딸이라면 결혼 안 시킨다’는 뜻이죠.(웃음) 네 군데에서 반대했는데, 다섯번째 갔더니 ‘그냥 시켜. 합이 들었는데 뭘’ 그러더래요. 장모님은 처음부터 결혼시킬 마음이셨던 거죠. 만화가 잘 안되면 모든 게 헝클어지는 걸 보면 점쟁이 말이 맞아요.”
-웃기는 질문이지만, 윤태호에게 대학은 어떤 의미일까요?
“(잠시 생각) 20대 때는 완벽한 콤플렉스. 포장마차에서 술 먹다가 우연히 옆에 앉은 서강대 여학생이 너무 똑똑하고 지적이라서 ‘저렇게 선명하게 말을 잘하는 저 여자는 누구일까? 뭘 배웠기에 저렇게 똑똑한가?’ 싶어 뒤따라가 말을 붙인 적도 있어요. 은행 계단에 앉아서 1시간쯤 이야기를 나눴죠. 제가 못 가본 세계에 대한 극도의 호기심이 있었어요.”
-그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했나요?
“20대에는 인생이 많이 다른 것 같지만, 군대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집 사고, 애 낳고 이런 비슷한 경험을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 엑스(X)자 모양으로 인생이 모이는 시기가 있어요. ‘캠퍼스의 낭만은 내가 모르지만, 사고체계는 다를 게 없네. 만화 그리는 데는 오히려 내가 더 풍요로운 지점도 있네’ 깨닫는 순간이 오는 거죠. 저는 모르는 영역은 얼추 모르는 게 아니라 백퍼센트 몰라요. 미술 빼고는 모두 바닥! 제가 문하생일 때 아내를 만났는데, 그때 아내가 생각했대요. 이 사람은 어떻게 글을 이렇게 못 쓸까, 그림 재능이 너무 아깝다!(웃음) 진짜 무식한 걸 알기 때문에 취재할 때 정말 열심히 물어봐요. 돌아와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바보처럼 묻고 또 묻고.”
-인천상륙작전 만화를 준비중이시죠?
“한국전쟁 당시 필름을 보면 완전히 민둥산, 초가집, 꼬불꼬불한 길뿐인데, 그 황량함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서글픔,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걸 그려보고 싶어요. 한국전쟁 영화나 드라마에는 너무 울창한 배경이 나와서 리얼리티가 떨어지는데, 드라마가 못하는 걸 만화는 할 수 있거든요. <드래곤볼>에서 아예 지구를 없애버리듯.(웃음)”
처음에 다소 서먹하던 분위기는 제가 그의 만화를 대부분 읽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확 녹아버렸습니다. 살아난 분위기는 저녁식사를 겸한 술자리로 이어졌고 막차 시간까지 가지 말라고 붙잡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천칭자리 두명과 물병자리 한명의 특성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천칭자리 윤태호는 수없는 오류를 수정하면서 자신을 성찰해온 사람이었습니다. 약점이었던 스토리는 그런 성찰을 통해 오히려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사람, 흔치 않은 자신감의 소유자를 만나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말이죠.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관련영상] 판위에서 비틀거리는 인생 <미생>(현주의 책)
<한겨레 인기기사>
■ “김용준 총리” 발표에 빵터진 기자실, 무슨 일?
■ 이외수 “그러시라지 뭐”…연고대 교수들 비판에 ‘쿨’
■ 박근혜 측근들 “도대체 누구와 상의하냐”
■ 이동흡, 폴란드 출장 중에 낙산사에 현금 기부?
■ 현대모비스 순정부품 ‘폭리’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
고교 동창회 나가려니까
대학 간 애들만 모이기로 했대요
악다구니가 생겨 결심했어요
‘흥, 그럼 난 25살까지 데뷔할 거야’ 조운학 선생님 아래로 들어가
선배들한테 사고 치고 무릎 꿇고…
그렇게 내 첫 작품이 나왔는데
만화가 아니고 쓰레기였죠
그림 빼고는 모두 바닥!
그 뒤로 스토리에 매달렸어요 -자기 회사가 원 인터내셔널의 모델이라는 사람을 여럿 봤습니다. “회식 자리 나가보면 각 상사의 차장, 부장님들이 모두 ‘우리 회사가 모델이죠?’ 물어요. 전반적인 회사 분위기는 대우인데, 회의 준비나 절차를 보면 삼성 스타일, 또 어떤 면은 엘지 같고.” -어두운 만화를 주로 그리다가 일종의 인생지침서나 자기계발서로 분위기를 확 바꿨습니다. 동기가 뭔가요, 혹시 먹히는 걸 한번 해보자?(웃음) “출판사에서 계약금을 받고도 <이끼> 끝나고 3년 동안은 취재만 했어요. 바둑과 샐러리맨을 연결시킨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는데, 제가 두 분야 모두 문외한이잖아요. <가우스 전자>, <무대리>처럼 회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유머러스한 만화는 많은데, 어떻게 극만화를 만들까 고민이 많았죠. 그렇다고 우리가 혼다를 무릎 꿇리는 식의 성공신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세상 사는 게 힘든 것은 악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내적 모순 때문일 때가 많거든요. 자기 한계, 내 생각의 편협함 때문에 힘든 건데, 자기를 돌아보면서 발전하는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나 회사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만 있을 뿐, 제가 현실을 모르잖아요. 취재하다 보니 다행히 디테일이 살아나고 갑자기 저 스스로 재미있어졌어요. 인생지침서나 자기계발서 같다? 이 책은 사실 제 개인의 고백서예요. 많은 에피소드들이 제가 살면서 후회했던 지점들에 대한 반성이에요. 왜 그때 그 노력을 하지 않았지? 왜 그때 용감하게 그 말을 하지 않았지? 왜 자기 합리화를 하고 도망쳤지? 인정받고 싶은 장그래의 욕망에 제 감정이 많이 이입되죠.” -어떤 점이 고백적인가요? “그 친구(장그래)는 바둑 특기생으로 자랐고, 저는 미술 특기생으로 자랐어요. 똑같이 고졸이고 학업성취도가 많이 떨어지는 삶이었죠. 저도 세상에 나와서 만화가 아니면 뭘 했을까 싶을 정도로 일반적인 상식의 기초가 떨어지는 사람이에요. 문하생 때는 비슷한 또래끼리 생활하니 별로 부끄럽지 않았는데, 제 이름 달고 데뷔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영어 쓰는 사람 많고, 그런 사람들에게 꿀리는 게 싫어서 알아듣는 척하다가 돌아와서는 좌절에 빠지고, 전화해서 그게 무슨 뜻이었지 물어보고, 무식에 대한 공포가 컸어요.” 문하생 선배들의 화투판을 엎어버리자… -장그래와 비슷한 두려움을 느꼈군요. “<미생>을 통해서 그런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었어요. 그 전의 만화들에는 남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냉소적인 유머, 건강하지 못한 유머가 많았거든요. 어느 날 12살짜리 큰애가 8살짜리 동생에게 짜증을 내는데 말투가 딱 제 모습인 거예요. 저의 성향이 아이들에게 유전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애를 혼낼 게 아니고, 내가 바뀌어야 하는구나, 내가 바뀌려면 기본적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어야겠구나 생각했죠. <미생>이 4~5회 지나니까 아내가 ‘처음으로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좋다’고 하더군요. <이끼>는 반응이 뜨거웠지만 아내가 항상 조마조마해했거든요.” -저는 솔직히 <야후>를 보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삼풍백화점을 비롯해서 내내 무너지고, 죽고, 죽이고. “<야후>를 5년 동안 연재했는데, 주인공을 모두 죽이면서 끝냈죠. 진짜 두 생명을 죽인 것 같았고, 이후 3년의 슬럼프가 왔어요. 장모님한테 돈 빌려서 겨우 버텼죠. 그때 제가 해낸 큰일이라고는 아이가 타는 네발자전거를 두발로 바꿔 준 게 전부였어요. 창작자로서 정말 지옥이었어요, 뭘 해도 안 됐고.” -이전 작품에서는 주로 아버지만 나오는데다 그나마 대부분 비참하게 죽습니다. <미생>에서 비로소 어머니가 등장하는데요. “제 아버지는 꽤 거친 분이셔서 제가 많이 혼나면서 자랐어요. 아버지를 생각하면 머리 위에 맷돌 하나 올려놓은 것처럼 턱턱 걸리는 느낌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한 정신과 의사의 실존적 자기분석>이라는 책을 읽고 제가 바라본 아버지 입장에서 ‘아버지 일기’를 적은 적도 있어요. 아버지가 <한겨레> 보시기 때문에 더 자세한 말씀은 못 드리고요.(웃음) <미생>에서 어머니가 등장한 것은 제 내면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해요.” 1969년 광주에서 태어난 윤태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리고 각종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아 자연스럽게 미대 진학을 꿈꾸었습니다. 인사성 밝고 남을 웃기기 좋아한 소년의 별명은 ‘까불이’. 그러나 고1 때 미대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어마어마한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동시상영 극장, 만화방 등을 전전하면서 친구도 없이 외로운 2년을 보내고 나니, 동년배 미대 준비생들과 뛰어넘을 수 없는 실력 차이도 생겼습니다. “돈이 없으면 미술학원 청소를 해주면서라도 그림을 배웠어야 했다”고 뒤늦게 깨닫고 나자 더 깊은 절망이 밀려들었습니다. 그 절망 속에서 “막연하게 생각했던 거라도 질러봐야지” 싶어 선택한 것이 만화가의 길이었습니다. “88년 서울에 올라와 노숙하며 만화학원에 다닐 때 지하철에서 고교 동창을 만났어요. ‘반장에게 전화해 장소를 확인하고 동창회에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막상 반장은 난처한 목소리로 ‘대학 다니는 애들만 모이기로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 얘기 듣고 악다구니가 생겼고, ‘나는 25살까지 만화가로 데뷔하겠다’고 결심했죠.” -그 결심 때문에 허영만 문하생에서 조운학 문하생으로 옮겨가기도 했죠? “문하생에도 단계가 있거든요. 1단계는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를 먹칠하는 ‘뒤처리’, 2단계는 인물을 제외한 모든 것, 예컨대 자동차나 건물을 그리는 ‘배경’, 3단계는 인물을 펜으로 그리는 ‘잉킹’, 4단계는 콘티를 받아 밑그림을 연필로 그리는 ‘데생’. 그런데 허영만 선생님은 데생을 직접 하시기 때문에 데생을 배울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조운학 선생께로 옮겼죠.” -데생은 고참 문하생이 하는 거라서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래서 제가 사고도 쳤어요. 화실에 40~50대의 고참 ‘선생님급’이 많았는데, 이분들이 밤이면 고스톱을 치는 거예요. 제가 그걸 보다가 참지 못하고 화투판을 엎었어요. ‘내가 당신들 술심부름하러 여기 온 줄 알아, 내가 뭘 포기하고 여기 왔는데?’ 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25살 전에 데뷔하겠다는 복수심으로 버티던 시절이니까요. 그래서 그분들이 ‘저 새끼 안 자르면 우리가 집단으로 그만두겠다’고 해서 제가 무릎 꿇고 사과하고 난리가 났었죠. 그러고는 저 혼자 데생 연습을 하고 그걸 누가 빼앗지 못하게 팔꿈치로 누르고 화판에 엎드려 잠을 잤어요. 그러자 조 선생님이 저보다 나이든 사람을 모두 불러 모아 ‘태호한테 데생 시키려는데 반대하는 사람 손들어’ 하고 물으셨어요. 아무도 손을 안 들었죠.” -나이를 뛰어넘은 파격인데 윤태호의 뭘 보고 데생을 시키기로 작정하셨을까요? “(잠시 생각하다가) 그림의 성취를 느껴본 사람들은 지금 당장 잘 그리는 것보다 성취 욕망이나 동기의 명확성 같은 기질을 보는 것 같아요. 안 시켜주면 당장 나갈 것 같아 붙잡으신 면도 있겠죠.(웃음)” 실제로 윤태호는 24살이 되던 93년 화실을 나와 <월간 점프>에 ‘비상착륙’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합니다. 그러나 막상 첫 작품이 인쇄된 걸 보니 “그건 만화가 아니라 쓰레기”였습니다.
만화가 윤태호씨
■ “김용준 총리” 발표에 빵터진 기자실, 무슨 일?
■ 이외수 “그러시라지 뭐”…연고대 교수들 비판에 ‘쿨’
■ 박근혜 측근들 “도대체 누구와 상의하냐”
■ 이동흡, 폴란드 출장 중에 낙산사에 현금 기부?
■ 현대모비스 순정부품 ‘폭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