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손때가 진하게 묻은 검정색 헝겊 가방을 열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꺼낸다.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카메라였다. 그 카메라는 세계적인 사진가 그룹인 <매그넘포토스>의 설립자인 로버트 카파가 60여년 전 전쟁터를 누비고 다닐 때 애용했던 라이카 M 시리즈 35㎜ 필름 카메라였다. 군데군데 벗겨지고 찌그러졌다.
“한국에서는 사진이 잘 찍히질 않아요. 그림이 나오질 않아요. 아마도 이 땅에서는 시(詩)가 사라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얼굴 없는 시인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10년 전 특사로 풀려나 이제는 평화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 박노해(50·사진)씨가 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매그넘 코리아’ 사진전을 찾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매그넘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일반인들이 찍을 수 없는 곳을 찍었거니 했죠. 그런데 직접 와서 사진을 보니 우리 사회의 희망을 발견했어요.”
쓰나미가 할퀴고 간 아체와 이스라엘 침공으로 폐허가 된 레바논 등에 가서 직접 찍은 사진을 통해 인간애를 호소했던 박씨는 이제는 직업 사진가로 불릴 만큼 수준 있는 사진을 찍는다.
그는 전시 작품을 1시간여 관람하며 매그넘 작가들이 느낀 한국을 곱씹어 보았다.
러시아 작가인 게오르기 핀카소프의 부산 자갈치시장 모습에서는 “검게 표현된 노동의 진한 느낌을 맛보았고”, 리즈 사르파티가 찍은 3명의 여고생 사진에서는 “건강하고 강한 저항에너지를 느꼈다”고 했다.
마틴 파의 초장 찍어 먹는 아줌마들 사진에서는 “먹기에 몰두하는 한국의 여행문화를 기막히게 포착해냈다”고 말했고, 지금은 불타 없어진 숭례문 사진(이언 베리)에서는 “숭례문 주변의 한국인들이 너무 슬퍼 보인다. 아마도 작가의 천재적 영감이 앞으로 올 재앙을 예감한 것 같다”고 감탄했다.
박씨가 가장 감탄한 것은 이번 사진전의 얼굴 격인 토마스 횝커가 찍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바라본 남산 타워’였다. “검은 콘크리트 구조물 프레임은 현대의 삭막한 느낌을, 미군부대의 골프연습장 그물막은 한국 사회에 짙게 깔린 미국 문화를, 그리고 흐린 하늘은 우리가 가야 할 미래를 압축해 표현한 놀라운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박씨는 “통쾌하다”고 했다. 연일 몰려드는 인파로 한국 사진전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이런 전시회를 보수언론이 아닌 <한겨레신문>이 기획한 것이.
박씨는 자신의 어머니(김옥순)를 떠올렸다. “형님은 신부, 여동생은 수녀가 됐어요. 어머니는 저에게 제발 결혼해서 손자를 낳아달라고 애원하셨어요. 그러나 전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어요.”
박씨의 어머니는 박씨에게 `눈물나는 유산’을 선물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꿈은 이 땅이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막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한겨레신문 주식을 사 모으셨고, 그 주식을 저에게 주셨어요. 그러곤 한 번이라도 저쪽(보수진영)을 이기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어요. ‘매그넘 사진전’이 그런 승리의 시작인 것 같아요.”
“촛불시위를 하는 청소년들의 시선에서 나라의 미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박씨는 자신의 라이카카메라 렌즈를 통해 이 사회의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어했다.
글·사진 이길우 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