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언 소장이 인터뷰 뒤 이기영 소설 원작인 북한 영화 ‘두만강’ 스틸 사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책방 노마만리’.
충남 천안 서북구 직산읍 마정저수지 옆에 자리한 복합문화공간이다. 1층은 카페, 2층은 전시장, 3층은 영화도서관이다. 한국 영화사연구자이자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인 한상언(47)씨가 지난해 5월 문을 열었다. 저수지 풍광에 반해 연고도 없는 지역에 터를 잡았단다.
그는 여기서 3개월 단위로 기획전을 하는데 지난 10월부터 내달까지는 천안 출신으로 식민지 시기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최고봉으로 불린 이기영(1895~1984)의 문학과 삶을 보여주는 ‘천안 사람 민촌 이기영’ 전을 한다. 1925년 결성한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대표작가 민촌은 해방 직후 월북해 1970년대 초까지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20~30년대 이기영의 위상은 이광수 다음이었어요. 카프 최고의 작가였죠. 당시 농민문학을 말할 때 이기영 ‘고향’(1934)이 첫손가락이었어요. 이광수 ‘흙’과 심훈 ‘상록수’와 함께 3대 농민작품이었죠. 민촌 장편 ‘신개지’는 일제 강점기인 1942년에 벌써 윤봉춘(배우 고 윤소정씨 부친)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고 해방 후 북한에서도 ‘두만강’과 ‘땅’이라는 민촌 소설이 영화로 나왔어요. 그 시절 민촌만큼 많은 작품을 쓴 사람도 없어요. 민촌은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가진 분이라 앞으로도 전시를 계속할 겁니다.”
지난 17일 노마만리에서 만난 한 소장의 말이다.
한말에서 식민지 시기까지 한국의 초기 영화산업 연구(2010)로 한양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북한영화 전문가이면서 방대한 북한 문헌을 보유한 고서 수집가이다. 그가 북한 영화와 영화인 연구를 위해 모으기 시작한 1970년대 이전 북한 문헌 컬렉션(약 5천 권)은 기관인 통일부 자료센터와 인하대 도서관에 이은 국내 세 번째 규모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 장서를 토대로 해방 후 북한의 번역 출판물 200여 권을 보여주는 책 ‘스탈린 거리의 평양 책방-1960년대 이전 북한의 번역서’(2023)와 문학과 복식까지 다양한 분야의 북한 책 250권을 선보인 ‘평양책방’(2018)을 내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 영화인 편도 담당한 그는 월북 영화인 시리즈를 기획해 4년 전에 월북 영화인 문예봉과 강홍식, 김태진을 조명하는 책을 각각 냈다. 5년 전에는 개인연구소를 세워 독립연구자로서 출판이나 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월북 영화인 시리즈나 국내 1세대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생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의 길’(2023) 등이 모두 그의 연구소에서 나왔다.
한 소장이 이기영 글이 실린 북한 ‘로동신문’ 전시물을 가리키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이미 ‘일인 다역’인데 어떻게 ‘책방 노마만리’까지 냈을까? “제 정체성 중 하나인 고서수집가의 최고 영예는 남들이 안 가진 책을 소장하는 거죠. 여기서 제가 모은 책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노마만리를 기획전 위주로 운영하는 것도 그 때문이란다. “기획전을 하면 계속 책을 바꿀 수 있잖아요. 아이디어를 계속 내어 제가 가진 많은 자료를 보여주고 싶어요.”
이번 전시에서도 민촌이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에 낸 옛 소련 방문기 ‘쏘련은 인민의 위대한 벗’과 민촌이 청년 시절의 문학공부를 술회한 책 ‘리상과 노력’(한설야 공저, 1958) 등 국내에서 한 소장만 가지고 있는 책을 볼 수 있다. 여기에 고서수집가 박현철씨 장서로 그간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1937년 태양사판 민촌 장편 ‘인간수업’과 김재용 원광대 교수가 내놓은 1927년 단편선 초판 ‘민촌’도 만날 수 있다.
“우연히 천안에 자리를 잡을 때부터 민촌 전시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그는 앞으로도 민촌 전시를 이어갈 생각이다. “이번 전시는 민촌 주제로는 국내 두 번째입니다. 15년 전에 아단문고(현 현담문고) 주최로 천안에서 처음 했었죠. 내년은 민촌의 첫 단편 ‘오빠의 비밀편지’가 잡지 ‘개벽’에 실린 지 100년이고 내후년은 민촌이 주축이었던 카프 결성 100년입니다. 이들 주제로도 전시해야죠.”
북한영화 전문가이자 고서수집가
북 영화 공부하며 북한 책 모아
개인으로 가장 많은 5천권 수집
지난해 천안에 복합문화공간 열어
장서 토대로 3개월마다 기획전
내달까지 천안출신 작가 이기영전
‘소련방문기’ 등 여러 유일본 전시
“카프 최고 작가이자 농민문학 최고봉”
그가 최근 엮은 ‘스탈린 거리의 평양 책방’에는 시인 백석의 동화 번역서 ‘동화와 이야기’(위딸리 비안끼 저, 1957)와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인 김학철이 번역한 ‘검찰관’(고골 작, 1949) 등 국내 유일본이 여러 권 실렸다.
정성일·이효인과 같은 ‘스타 영화평론가’의 길을 따르려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그는 어떻게 북한 책을 모으게 되었을까? “2010년 무렵부터 북한 책을 본격적으로 모았어요. 제가 석사 논문으로 해방기 영화운동에 관해 썼는데요. 그 시절 정말 많은 영화인이 등장하는데 1950년 이후 거의 사라져요.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면서 북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하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70년대 이전 북한 책을 국내에서 구하기 쉽지 않았단다.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북한 잡지 ‘조선영화’를 1장에 100엔 주고 복사하곤 했어요. 그때 차라리 원본을 사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중국과 일본 고서점 사이트를 뒤져 대량으로 순차적으로 구매했어요. 처음에는 영화 쪽만 사다 나중에는 다른 분야로 넓혔죠.”
고서 구입 재원을 궁금해하니 그는 역시 고서수집가인 형의 도움이 있었다고 했다. “형의 영향으로 2천년대 초부터 저도 조금씩 고서를 모았어요. 그러다 정말 운이 좋아 백암 박은식 선생 저서와 같은 문화재급 책도 갖게 되었죠. 그렇게 모은 귀중본들 일부를 내놓고 북한 책을 샀죠.”
한 소장이 쓰거나 자신의 소장 자료를 모아 낸 책들.
그는 지금 내년 출간 목표로 1954년 전후복구기부터 1973년까지 북한 영화를 정리하는 책을 집필 중이다. 북한 영화에 대해 우리가 혹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는지, 물었다. “우리는 주로 정치학자들이 북한 영화를 다루면서 정치의 도구로만 보고 또는 맥락 없이 정치적 사건들과 연결해 해석하면서 (북한 영화에 대해) 왜곡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는 “북한에는 정치의 도구로 활용되는 영화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다”며 말을 이었다. “현실에서 소재를 취한 코믹 영화도 많아요. 사회주의 미학에서 웃음을 중요하게 보거든요. ‘사회주의의 미소’라는 말도 있죠. 북에서는 사회주의로 행복한 웃음을 만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전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도 경희극(코미디) 발전을 직접 지도했죠.”
그의 북한 장서 중엔 1950~60년대 나온 세계 고전 문학도 많이 있다. ‘로미오와 줄리에트’(1962, 김해균 역)도 그중 하나다. “한 탈북자가 북한은 ‘로미오와 줄리엣’도 모르는 사회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사실과 다릅니다. 셰익스피어는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상식입니다. 우리와 같이 셰익스피어나 모파상, 안데르센과 같은 작가의 작품을 교양으로 알고 전공으로 배웁니다.”
계획을 묻자 그는 장기적으로 한국영화사를 10권으로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2018년에 박사 논문을 토대로 ‘조선영화의 탄생’이란 책을 냈는데요. 이게 첫 권인 셈이고 2권은 무성영화 시기가 될 겁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