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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태풍 힌남노로 액땜 끝낸 ‘무라카미 다카시’ 부산전

등록 2023-02-24 07:00수정 2023-02-24 13:44

무라카미 다카시의 2013년 작 <붉은 요괴 푸른 요괴와 48나한>. 노형석 기자
무라카미 다카시의 2013년 작 <붉은 요괴 푸른 요괴와 48나한>. 노형석 기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아니었다.

부산을 대표하는 공공미술기관인 부산시립미술관 천장에서 전시장 벽과 바닥으로 빗물이 강줄기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일본 오타쿠 팝아트를 전세계에 퍼뜨린 스타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61)의 부산 전시 작업팀은 혼비백산했다. 화려한 꽃무리가 아롱진 그의 <플라워> 연작들을 막 코팅한 전시장 벽에 붙이려던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미술관 직원들이 플라스틱 통을 들고 와 물을 받았지만, 내부와 바닥은 순식간에 흥건해졌다. 상상조차 못 했던 풍경을 본 작업팀원들은 작품들을 거둬들인 뒤 떠나버렸다. 알고 보니 천장판 위에 놓은 자갈층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어와 쏟아진 것이었다. 11월 개막은 물 건너갔다. 그날 이후 새해 1월까지 협상이 이어졌다. 믿고 전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라고 채근하는 무라카미 쪽 기획자들과 고개 숙인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 관장, 실무자들 사이에 살얼음 같은 석달간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지난해 9월6일 부산을 강타한 태풍 힌남노는 부산시립미술관이 지난해 초부터 공들여 준비하던 무라카미 회고전을 좌초 직전까지 몰고 갔다. 30년이 다 돼가는 공공미술관 건물이 항온·항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수년 전부터 감지했던 고질적 문제였다. 곡절 끝에 올해 말 리모델링 공사를 벌이기로 했고, 상시로 빗물이 새는 3층 대신 상대적으로 안전한 2층으로 기획전 장소를 변경했지만, 힌남노의 역습에 미술관의 치부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작가의 출세작 중 하나로 꼽히는 1997년 작 <미스 코코>. 전형적인 일본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작가의 출세작 중 하나로 꼽히는 1997년 작 <미스 코코>. 전형적인 일본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무라카미 쪽은 강경했다. 작품 보전 환경에 대한 국제 미술 전시의 상식적인 기준 엄수를 내세워, 합의한 습도 허용치를 넘어서면 통보 없이 작품을 철수할 수 있게 하고, 관련 비용 일체를 배상하라는 요구였다. 결국 박형준 부산시장이 무라카미의 전속 화랑인 페로탱 쪽에 협조 요청 서한을 보내고 요구 조건을 상당 부분 완화시켜 수용하면서 지난 1월26일 회고전 ‘좀비’를 개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술관 건물은 지금도 습도 55% 이내를 유지하는 인공 항온·항습이 되지 않아 겨울철 건조기의 자연습도에 맞춰 전시를 운영할 수밖에 없다. 힌남노는 이번 전시에 또 다른 재난서사를 더하면서 한국 공공미술관의 시스템과 인프라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됐고, 일정 부분 진화를 추동하는 성과를 낳은 셈이 됐다.

숱한 곡절 끝에 열렸지만, ‘좀비’는 무라카미의 역대 전시 중 가장 짜임새 있는 기획전이란 평가를 받는다. 일본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팝아트 작가의 미공개 초기작을 포함해 회화와 대형 조각, 설치, 영상 등 170여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다. ‘귀여움’ ‘기괴함’ ‘덧없음’을 열쇳말로 삼은 3개의 본전시 섹션을 통해 작가가 1990년대 처음 세상에 내놓은 상징 캐릭터 미스터 도브(DOB)의 탄생부터 이를 기괴하게 변형한 ‘탄탄보’ 캐릭터, 전통 불화 나한도와 아미타여래도의 도상을 빌려와 인생사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을 담은 근작, 대지진과 코로나19 등 재해와 재난의 비극을 접하면서 구상한 좀비 자화상 설치물들까지 그의 작품 변화 과정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특히 독일 거장 안젤름 키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두꺼운 물감층 화면에 음울하고 깊은 사회적 문제의식과 시대적 감성을 투영한 1988년 작 <원전도>는 팝아티스트 이전 진중한 리얼리스트로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무라카미의 원형질 같은 작품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안젤름 키퍼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는 1988년 작 <원전도>. 노형석 기자
안젤름 키퍼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는 1988년 작 <원전도>. 노형석 기자
본관 옆 거장 이우환 작품 전시관인 ‘이우환 공간’에는 무라카미의 근작 ‘원상’ 시리즈를 내걸었다. 불교 선화와 비슷한 구도로 원과 세모, 네모 형상을 먹으로 그린 소품들과, 해골들이 배경무늬처럼 들어찬 알루미늄 화판 위에 실크스크린과 금은박 기법으로 원형의 상들을 부려놓은 대작들이다. 이를 통해 그는 팝아트에서 재난에 대한 성찰과 마음살이에 대한 고민으로 작가적 사유를 옮겨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자신의 근래 작업 화두인 자연 재난이 자기 전시에 미친 뜻밖의 풍파를 의식한 탓일까. 작가는 전시장 외벽에 인쇄된 약력 부분에 ‘태풍 힌남노 영향으로 개인전 연기’란 구절을 끝내 고집해서 넣었다고 한다. 3월12일까지.

부산/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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