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플라스틱병과 아크릴판으로 만든 색판 조형물을 가파도 해변 정자에 매단 영국 작가 앤디 휴스의 작품 <시스루>(SEE-THROUGH, 2022). 사람들이 내버린 폐기물도 자연경관의 엄연한 일부라는 예술가의 생각을 담았다.
우리네 욕망과 감정은 폭포의 물줄기였던가.
그렇다. 인간 ‘칠정’이 폭포가 되어 화폭 위에서 쏟아진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 사랑과 미움, 그리고 욕망. 이른바 ‘희로애락애오욕’이 장대한 물길로 변해 솟구치고 쏟아져 내린다. 마음과 감정이 휘감아 돌고 도는 엄숙한 풍경에 눈길을 돌릴 수 없다.
높이만 6m를 넘는 강요배 화가의 신작 <폭포 속으로>가 세상에 나왔다. 제주시 연동 한라산 기슭의 제주도립미술관 1층 전시실 한쪽 벽을 차지한 화가의 대작은 지난달 중순 막을 올린 격년제 국제미술제인 제3회 제주비엔날레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붓질의 힘과 기백이 대번에 ‘득의’를 짐작하게 한다. 특정한 폭포의 묘사에 집착하지 않는다. 제주섬과 뭍의 숱한 폭포수 물길을 보고 머리에 쟁여놓은 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을 오랫동안 관조한 느낌을 더해 붓질로 삭이면서 흘러나오는 단단한 느낌의 ‘폭수’다. 그 물길 속에 여러 감정이 릴레이 하듯 함께 흘러가는 풍경을 두고 작가는 따로 시를 지어 적었다.
‘폭포 내리네 기쁘구나/ 또 노여웁기도 해서 슬프네/ 즐겁고 사랑스러움이 미워져 물 미르 천공으로 치오르는가….’
주제관인 제주도립미술관 1층 주전시장에 내걸린 강요배 작가의 폭포 대작. 평생 흐르는 인간의 칠정을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이미지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시로 표현한 화가의 속내처럼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을 주제로 내건 이번 비엔날레는 제주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대자연과 함께 인간 감성과 호흡하며 흘러가는 작품들의 별세계라고 할 수 있다. 도립미술관 전시장의 다른 한 구석을 채운 한국계 캐나다 작가 자디에 사의 설치작품 <지구생물과 몽상가를 위한 달의 시학>은 이런 맥락에 부합하는 생태적 상상력의 진수와도 같다. 강요배 그림과 함께 눈가에 담아 넣고 볼 만하다. 친숙한 동식물인 기러기, 범고래, 여우, 배추, 소라가 독특한 옷을 입은 수호신 형상으로 등장해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헤치고 나가는 지혜의 모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번 비엔날레엔 강요배와 자디에 사의 수작들을 비롯해 16개 나라 작가 55명(팀)이 낸 165점의 크고 작은 그림과 사진, 영상, 조형물들이 나왔다. 출품작들은 코로나와 내홍으로 2회가 취소되는 등 진통을 겪은 과거 행사의 허물을 덮으며 명품 비엔날레의 재생을 널리 알렸다. 6곳이나 되는 전시 공간의 파격이 특출하다. 주제전 전시장으로 제주 풍경을 담은 대작 그림과 유령꽃 등 생태적 조형물, 설치작품들이 짜임새 있게 들어선 제주도립미술관이 여정의 시작이다. 그 다음으로 미디어아트 중심의 저지리 제주현대미술관과, 관객이 음식과 술을 나누며 공동체 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작업들을 내놓은 ‘미술관옆집 제주’를 거쳐 미술섬의 진수를 보여주는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AiR) 특설전시장으로 건너간다. 가파도에서 돌아오면 해녀복 설치작품 등으로 바다와 제주 사람의 관계를 포착한 제주국제평화센터 전시장과 신비스러운 제주시 삼성혈의 야외 설치 조형물, 영상물 상영 공간이 차례차례 기다린다.
출품작들이 제각기 결이 다른데도 배치 등 전시 연출이나 관람 동선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것이 오히려 이채롭다. 이동 거리가 길게 떨어져 있는데도 시종 편안하고 강렬한 전시 체험을 할 수 있다. 관광 명소 동선에 맞춰 작품들을 배치하고 주제에 맞게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화두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 선정된 것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 나오시마에 필적할 미술섬이 한국에서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가파도 프로젝트의 성취가 주목된다. 멀리 한라산과 산방산, 송악산이 겹치듯 다가오는 제주섬의 자태를 원경 삼아 청보리밭이 펼쳐진 섬 둘레 곳곳에 작품들이 스미듯 들어앉았다.
가파도의 폐가 안에 그려진 이탈리아 작가 아그네스 갈리오토의 프레스코벽화가 창밖의 곶자왈 숲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가파도에 여러 달 머물며 작업한 작가는 그림을 그린 폐가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묻혀 있다가 발굴된 고대 폼페이의 벽화 저택으로 생각하고 작업했다고 한다.
일왕 연호로 쇼와 13년(1938년)이란 묵서가 적힌 대들보를 인 가파도의 84년 묵은 폐가 안 곳곳에는 올해 여기서 수개월을 살았던 이탈리아 작가 아그네스 갈리오토의 프레스코벽화가 창밖의 곶자왈 숲과 아름답고 구슬픈 조화를 이루었다. 작가는 작업 대상이 된 폐가를 화산 폭발로 묻혀 있다가 발굴된 고대 폼페이의 벽화 저택처럼 생각하고 자신을 비롯한 산 자와 망자들이 동식물과 어울린 인간과 자연의 단면들을 세월 머금은 촉촉한 벽체에 풀어놓았다.
2018년 최욱 건축가가 짓다가 만 리조트 건물의 잔해를 리모델링해 만든 섬 남동쪽의 작가 작업실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를 특설전시장으로 바꿔 윤향로, 심승욱 등 여러 작가의 작품 공간으로 만든 건 혜안이다. 지하 첫머리 전시 공간에서 윤향로 작가가 우주와 바다, 하늘을 색점으로 담은 대작을 담담하게, 막막하게 살펴보게 된다. 폐플라스틱병과 아크릴판으로 만든 색판 조형물을 가파도 해변 정자에 매단 영국 작가 앤디 휴스의 작품 <시스루>(SEE-THROUGH, 2022)도 눈에 띄었다. 섬사람들이 내버린 폐기물도 자연경관의 엄연한 일부라는 생각을 담은 강렬한 느낌의 해변 설치물이었다.
제주로 거처를 옮겨 작업해온 신예선 작가가 내놓은 설치작품 신작 <움직이는 정원>. 삼성혈 주위에 있는 녹나무, 곰솔 등 숲속 나무들 사이로 색색의 비단실을 여기저기 감아 신비스러운 시간의 그물을 빚어냈다. 나무들이 삼성혈을 지켜온 세월을 담아내기 위해 빛이 스며들어 색감이 바뀌고 바람이 넘나들며 나풀거리는 작품을 만들었다.
제주 삼성혈 설화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한 박지혜 작가의 영상 스크린 작업이 삼성혈 공간 들머리에서 상영 중이다.
올해 제주비엔날레는 거대 담론이 퇴조하고 개최 장소의 지역성과 생태 친화성을 중시하는 세계 비엔날레의 최근 흐름을 적실하게 반영했다. 이런 정체성을 더욱 뚜렷하게 각인시킨 것은 제주의 성지 삼성혈에서 펼쳐진 일련의 설치, 영상 작업들. 특히 제주로 거처를 옮겨 작업해온 신예선 작가가 내놓은 설치작품 신작 <움직이는 정원>은 가장 도드라진 화제작이 되었다. 삼성혈 주위에 있는 녹나무, 곰솔 등 숲속 나무들 사이로 색색의 비단실을 여기저기 감아 신비스러운 시간의 그물을 빚어냈다. 나무들이 삼성혈을 지켜온 세월을 담아내기 위해 빛이 스며들어 색감이 바뀌고 바람이 넘나들며 나풀거리는 작품을 만들었다. 삼성혈 신화를 작가 심연의 탐미적 시선으로 재해석한 대만 작가 팅통창과 박지혜 작가의 아련하고 신비스러운 영상 작품도 삼성혈 들머리 스크린 무대와 경내 사당에서 상영되면서 잔잔한 잔향을 남겨놓았다.
제주도립미술관 본전시장에 내걸린 박종갑 작가의 수묵화 대작 <문명-쌓다>. 제주에 널려 있는 수많은 현무암 돌들에 깃든 오랜 세월의 흔적들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이다.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오랫동안 전시 실무자로 일했던 박남희 전시 총감독은 사무국이 없고 예산 지원도 쥐꼬리인 상황을 딛고 제주섬에서만 누릴 수 있는 맛깔난 명품 비엔날레를 빚는 데 성공했다. 국내외 작가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관광 동선과 어우러진 집중력 있는 작품 구성, 자연 지형과 절묘하게 조응하는 전시 장소 선정 등으로 올해 가장 인상적인 국제 미술 기획전을 만들어냈다. “장르 가르는 데 얽매이지 않고 주제의 연관성, 공간과의 연결을 우선 생각했다”는 그의 말을 실내와 야외 공간을 자연스레 종횡무진하는 작품들의 올망졸망한 면모 속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 미술계는 올가을 부산비엔날레를 순항시킨 김해주 기획자에 이어 연말 예술섬 제주의 꿈을 실현시킨 ‘또순이’ 기획자 박남희 감독을 세계에 내세울 차세대 글로벌 큐레이터 목록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됐다.
제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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