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알버트 왓슨이 찍은 스티브 잡스. 전세계적으로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잡스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제공
2006년 스티브 잡스(1955~2011)는 난생처음 사진 모델이 됐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찍는 잡지 프로젝트에 응해 카메라 앞에 선 것이다. 60대 사진가는 대뜸 주문했다. “스티브, 카메라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면서 떠올려봐요. 의견에 딴죽 거는 사람들 네댓명이 지금 당신 맞은편에 앉아 있어요. 그걸 보며 당신 의견이 더욱 옳다고 굳게 확신하는 상황을.” “그거야 쉽죠! 날마다 일어나는 상황이거든요.” 잡스는 단박에 대답한 뒤 엄지를 턱에 댄 채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약간의 미소가 들어간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흰 벽을 배경으로 여권사진 찍듯 클로즈업해 촬영한 시간은 불과 20분. 사진가는 나중에 회고했다. “‘내가 하는 일을 의심하지 말라고…’, 마치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잡스는 촬영 뒤 자신을 찍은 사진 중 최고라면서 한장을 들고 갔다. 사진가는 그 뒤 까맣게 잊었지만, 5년 지난 2011년 10월5일 오후 잊지 못할 순간을 맞게 된다. 미국 뉴욕에서 작업하던 그에게 캘리포니아 애플 본사에서 “스티브를 찍은 사진이 필요한데 갖고 있느냐”는 문의가 왔다. 휴대전화로 사진을 보내고 나니 곧바로 잡스의 부음 소식이 들어왔다. 그날부터 애플 누리집에 실린 작가의 잡스 사진은 디지털 거장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전세계인의 눈에 남게 된다.
1973년 알버트 왓슨이 찍은 영화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 도살된 채 털이 벗겨진 오리를 든 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히치콕의 사진은 말년 그의 면모를 상징하는 주요 이미지가 됐다. 작가 제공
그 유명한 잡스의 초상사진 실물 프린트가 한국에 온다. 80살 나이에도 패션 사진업계에서 현역으로 셔터를 눌러온 세계적인 거장 사진가 알버트 왓슨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와 함께 도살돼 털이 뽑힌 오리 몸뚱이를 든 영화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의 유명한 사진을 비롯해, 글램록 거장 데이비드 보위,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 등 문화계 명사들을 찍은 작품 실물이 한국 관객을 만난다. 한겨레신문사와 예술의전당이 공동 주최하는 ‘왓슨, 더 마에스트로―알버트 왓슨’이란 제목의 첫 한국 사진전에서다. 오는 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에서 막을 올려 내년 3월30일까지 이어진다.
왓슨은 <하퍼스 바자> <보그> <타임> 등 유명 패션잡지, 시사주간지 작업으로 상업사진의 거장이 됐고, 1980년대 이후 인물, 자연 풍경, 오브제 사진 등으로 촬영 반경을 넓히면서 세계 현대사진사에 우뚝한 대가 반열에 올랐다. 오늘날 인물사진의 최고봉으로 인정받는 어빙 펜과 리처드 애버던의 맥을 이은 2000년대 세계 최고의 초상사진가로 꼽힌다.
독특하게 디자인된 선글라스를 쓴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의 모습. 1985년 알버트 왓슨이 찍었다. 작가 제공
전시에서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올해 최신작까지 그의 정식 작품 125점을 아날로그 필름 프린트와 디지털C 프린트로 엄선해 소개한다. 히치콕, 잡스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의 사진, 모로코와 라스베이거스 사막 풍경, 투탕카멘의 장갑이나 나사 우주복 같은 오브제 작업 등 반세기 넘게 축적된 왓슨의 사진 연대기가 펼쳐진다.
치밀한 피사체 배치와 명암 표현으로 ‘사진작가들의 작가’란 찬사를 받아온 왓슨의 전시는 특히, 한쪽 눈을 실명한 채 태어난 선천적 장애를 딛고 평생 작업을 심화시켜온 결과물이란 측면에서도 더욱 뜻깊다. 그는 시각장애에 주눅 들지 않고, 유년 시절 이후 평생의 친구가 된 카메라의 눈을 빌려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진이라는 매체에 담아내는 데 열정을 쏟아왔다. 1977년부터 2019년까지 40여년간 100회 이상 패션잡지 <보그> 표지를 촬영한 상업작가였지만, 상업사진 외에도 자연, 인물, 정물 등 장르와 주제를 가리지 않고 다수의 개인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왓슨은 1942년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영국 던디대학의 덩컨 오브 조던스톤 예술디자인 칼리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뒤 런던 왕립예술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1970년 가족과 함께 런던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후 1973년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 크리스마스호 표지모델로 히치콕을 촬영해 게재하면서 패션사진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40여년간 <보그> 표지 촬영을 하면서 가장 오랜 기간 <보그>와 협업한 사진작가가 됐다. 어빙 펜, 리처드 애버던과 더불어 <포토 디스트릭트 뉴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 20인에 선정된 바 있다. 2010년 영국 왕립사진협회 명예회원이 됐고, 2015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표범 이미지로 분장한 가수 믹 재거의 모습.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찍은 작품이다. 작가 제공
알버트 왓슨이 1990년 미국 뉴욕에서 찍은 골든 보이의 모습. 작가 제공
왓슨은 직접 한국을 찾아 개막식에 참석한다. 전시회 기간 특강과 작가 도슨트 등 특별행사를 통해 한국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오디오가이드는 최근 수년간 대중적인 미술품 길라잡이로 널리 알려진 김찬용 미술해설사(도슨트)가 맡는다. 사진전 얼리버드 티켓은 개막 전날인 7일까지 최대 50% 할인된 값에 티켓링크, 티몬, 멜론티켓, 11번가, 29㎝, 네이버예매, 마켓컬리 등에서 살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