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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처연히 말라붙은 꽃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경계를 묻다

등록 2022-05-08 18:09수정 2022-05-09 02:30

[전북도립미술관 한운성 회고전]

회화·판화 등 131점 기증 계기
50년 작품세계 오롯이 보여줘
한운성 작가가 2019년 그린 꽃그림 <캄프시스 그란디플로라>(Campsis grandiflora)의 일부분. 작품 제목은 능소화의 학명이다.
한운성 작가가 2019년 그린 꽃그림 <캄프시스 그란디플로라>(Campsis grandiflora)의 일부분. 작품 제목은 능소화의 학명이다.

오해였다. 편견이었다.

꽃들의 최후를 떠내어 화폭에 옮긴 한운성(76) 화가의 근작들이 일깨워준다. 사과 정물화의 원조 대가로만 소문났던 화가의 화랑가 평판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 그림 속 능소화의 붉은빛 꽃술들은 시들어서 말라붙고 오그라들었다. 그렇게 최후를 맞는 퍼석퍼석한 꽃들의 이 처연한 잔상들이 가로 크기 2m가 넘는 화폭에 정제된 붓질로 담겼다. 그들의 몰골은 마치 육탈되어 인골만 앙상하게 남은 풍장의 자취를 연상시킨다. 또 다른 화폭 위엔 두툼하게 몽우리가 진 장미와 카네이션 송이들도 활력을 잃고 널브러졌다. 가장자리 꽃잎부터 때깔을 잃고 그저 그런 ‘사물’로 돌아가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냉엄하게 사위어가는 꽃들의 그림은 극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극적이다. 처연하면서도 장엄하다. 수려한 모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지난 3월부터 열리고 있는 한운성 화가의 기증 작품 회고전 말미에 나온 거대한 꽃 주검의 형상들은 작가의 화력에서 최고의 역작으로 꼽을 만하다. 역대 한국 미술판에 나온 꽃 그림들 가운데 이만큼 숙연하고 깊은 인상을 안기는 이미지들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림들마다 제목에 붙은 꽃들의 라틴어 학명 또한 감상의 감흥을 더욱 배가시킨다. 수년 전 서울 양재 꽃시장에서 시들어서 버려진 뒤 밟히는 장미를 보고 결국 스러질 생명의 무상함을 절감하며 작업 동기를 얻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한운성 화가는 서울대 미대 교수로 30년 이상 봉직하면서 국내 제도권 화단에서 이른바 ‘형상미술’의 대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사과와 호박, 토마토 등의 과일들을 병렬해놓고 냉정한 눈길로 그린 정물화와 형상판화 등이 화풍을 특징짓는 대표적인 이미지들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화랑가에 주로 전시된 과일 정물화 외에도 사물과 형상의 본질을 좇는 모더니즘과 시대와 현실을 직시하는 리얼리즘의 경계 사이에서 쉴 새 없이 그림의 형식과 소재에 대한 변주와 실험을 거듭해왔다. 미국 유학 시절 팝아트의 영향을 받은 그의 1970~80년대 콜라 캔 이미지 석판화들과 질끈 동여맨 행위의 자취가 부각되는 80년대 초의 <매듭>과 <받침목> 연작들이 특유의 모더니즘 편력을 증거한다면, 80년대 절박한 시대 상황을 화면 속 군상의 몸짓이나 기물들의 놓임새 등을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낸 <증발> <묵시> <외출> 연작과, 비무장지대의 끊긴 철길 같은 분단 현장 단면을 담은 판화들은 고뇌하는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준다.

한운성 작가가 2020년 그린 장미와 카네이션 정물화의 일부분. 만개한 뒤 시들며 사멸해가는 꽃봉오리들이 널브러진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그렸다.
한운성 작가가 2020년 그린 장미와 카네이션 정물화의 일부분. 만개한 뒤 시들며 사멸해가는 꽃봉오리들이 널브러진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그렸다.

이번 전시는 최근 미술관 쪽에 1970년대부터 2020년 근작까지 약 50년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 드로잉, 판화, 회화 등의 작품 131점을 기증하면서 성사된 회고전이다. 그동안 작가를 규정지은 극사실적 정물화의 굴레를 걷어내고 온전히 이미지 분석과 재현의 도상에서 고투해온 한 리얼리즘적 모더니스트의 작업 이력을 온전히 들여다볼 기회를 선사한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2000년대 이후 작업을 전시한 4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무궁화, 양귀비, 장미, 능소화 등의 꽃 연작들이 전시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 간판처럼 표피만 그려진 전세계 각지의 명소와 유적들의 상을 통해 현시대 관광 소비 문화의 권태로움을 표상한 <디지로그> 연작들도 함께 내걸렸다. 2전시실은 60년대 초기 추상회화를 시작으로 80년대의 <매듭> <상황> 연작과 익히 알려진 90년대 <과일> 연작을 만나는 공간이며, 3전시실에서는 그의 시대적 인식과 실험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각종 판화와 드로잉들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김영순씨는 “60~70년대 미국 모더니즘과 극사실주의 사조를 이른바 한국 형상미술 세대 작가들의 작업에 접목시키고 새로운 리얼리즘의 시야를 모색했던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자리”라고 평했다. 전시는 오는 22일까지 열린다.

전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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