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의 고갱이로 꼽히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을 선보이는 전시 공간. 바닥에는 <수련> 연작의 세부를 확대한 이미지들이 동영상처럼 떠다닌다.
어둠 속에 연못이 떠 있다. 수련 꽃잎이 어렴풋하게 둥둥 떠 있는 수면 위에 숱하게 다른 톤을 띤 푸른 빛깔이 아지랑이처럼 하늘거리는 그 연못은 인상파 거장 클로드 모네의 시선 자체다. 1917년부터 1920년 사이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모네가 푸른 인상으로만 바라본 시공간을 간직한 풍경이다. 바로 프랑스 파리 근교 지베르니의 일본식 정원이다.
거기서 조금만 눈을 돌려 걸어가 보면 두곳의 어둠 속 공간을 만나게 된다. 첫번째 공간엔 모네의 시간에서 80여년 뒤인 2005년 대가 강요배 화가가 담은 제주의 홍매화 풍경이 내걸려 있다. 우툴두툴하고 거친 질감의 검붉은 매화 가지와 맵짠 제주의 바람과 땅의 풍경이 난만하게 뒤얽혀 모네의 수련 풍경과 비슷한 감흥을 안겨준다.
조금 더 가서 만나는 두번째 어둠 속 공간에는 겸재 정선의 시공간이 있다. 모네의 사생보다 170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거장 겸재가 한양의 진산 인왕산 산록의 비 온 뒤 정경을 바라보며 붓으로 옮긴 그림이 들어온다. 1751년 5월 폭우가 막 지나간 어느 초여름 날에 겸재가 앓던 친구 이병연이 병상에서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봤을 그 풍경은 한껏 엄숙하고 촉촉하다.
겸재 정선의 명작 <인왕제색도>를 전시한 공간.
지금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동서양 명작을 가로지르며 당대 화가가 바라보았던 전혀 다른 시공간의 풍경을 완상하는, 전에 없던 체험을 할 수 있다. 지난달 28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시작한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는 시선의 싱크홀들로 채워진 요지경과 다름없다.
지난해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족으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지방 공립미술관 다섯곳이 기증받은 2만3천여점의 기증품 중 총 295건 355점을 소개하는 이 전시장에는 곳곳마다 각기 다른 명작의 시공간으로 들어가는 구멍들이 있다. 여기저기 눈길을 돌릴 때마다 선사시대와 고대부터 근대와 현대,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그림과 조각, 도자기, 옛 책, 목가구 등을 망라한 명작의 이야기와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독특한 생김새의 집 지킴이 전통 벅수와 조각 거장 권진규의 <문>이 들머리에서 먼저 맞는 전시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란 제목대로 1부를 수집가의 집 거실처럼 꾸민 얼개로 펼쳐놓는다. 얼싸안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의 강렬한 몸 기운이 와닿는 권진규의 조각 <모자>와 장욱진의 소품 <가족>이 이어지고,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19세기 대학자 다산 정약용이 자식 정여주에게 써준 ‘정효자전’과 ‘정부인전’이 정갈한 글씨로 처음 선보인다. 뒤이어 거실의 핵심 자리에 아름답고 정겨운 미감이 물씬 나는 김환기의 1950~60년대 반추상 채색화와 그 모티브가 된 실물 달항아리가 푸른빛 공간 속에 놓여 있다. 이건희 기증 컬렉션의 고갱이로 꼽히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은 독립 공간에서 마치 따로 떼어낸 작가의 시공간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한 타임슬립의 착시감을 선사한다.
계속되는 2부 ‘저의 수집품을 소개합니다’에선 ‘자연과 교감하는 경험’ ‘자연을 활용하는 지혜’ ‘생각을 전달하는 지혜’ ‘인간을 탐색하는 경험’이란 네가지 세부 주제로 나눠 토기와 도자기, 금속공예품, 산수화, 불화, 기록유산 등이 줄줄이 가지를 쳐나가며 이건희 컬렉션의 다채로운 수집 범위를 은연중 드러낸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19세기 십장생도의 최고 명품이 20세기 화가 강요배의 <홍매>와 김흥수의 색채추상화와 겹쳐지면서 색다른 감상의 정취를 자아낸다. 후반부 불교미술 영역에는 6세기 삼국시대 명품인 ‘일광삼존상’, 14세기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 <천수관음보살도> 등이 처음 나왔고, 화려한 고려 사경과 15세기 조선 초기의 금속활자본 <석보상절> 등도 눈 깊은 관객을 기다린다.
달항아리와 함께 놓인 거장 김환기의 1950~60년대 채색 반추상그림들. 이건희 기증 1주년 특별전 전시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고미술과 근현대미술을 포괄한 모든 장르의 명품들이, 수집가의 거실과 내밀한 컬렉션관을 헤쳐 보는 듯한 구성을 통해 어우러진 역대 최고의 기증품 기획전이라 할 만하다. 다만 맨 마지막의 백남준 설치작품을 비롯한 말미의 근현대 회화들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듯 배치한 것은 옥에 티로 남는다.
전시는 8월28일까지다. 이달치 관람권은 매진됐고, 새달 관람권을 예매 중이다. 일부 명작들은 한두달만 내걸고 계속 다른 작품으로 바뀌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이달까지, 그 뒤 선보일 김홍도의 <추성부도>는 6월 한달만 전시한다. 박물관 쪽은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 <천수관음보살도> <십장생도> 병풍 등도 관람 기간이 한시적으로 제한된다고 밝혔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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