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청동 피케이엠갤러리 별관에 내걸린 이상남 작가의 근작 그림. 작품 옆 큰 유리창 밖으로 삼청동 일대 주택가의 풍광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가까이 가서 보면 느껍게 느끼게 된다. 이 매끈하고 달착지근한 그림과 금속조각 덩어리들은 숨결과 손맛에서 배어나온 감성의 결정체였다. 디지털 페인팅으로 작업하거나 입체프린터에서 뽑아낸 것 같은 표면과 형태는 기실 숱하게 사포질하고 석회 덩어리를 가공한 수공의 결실이었던 것. 인간이 직접 손으로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감동과 위안을 안겨준다.
지난달부터 일제히 개막한 서울 북촌 메이저 화랑들의 봄 기획전은 부박하게 들뜬 시장 분위기와는 확연하게 거리를 두었다. 수공 흔적 물씬한 국내외 중견 실력파들의 근작들이 원숙미를 뿜는다. 청와대 인근 삼청동 피케이엠갤러리 전시장에 나온 중견작가 이상남씨의 채색 그림들(16일까지)과 아래쪽 소격동 국제갤러리에 등장한 스위스 스타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채색 철제 조형물들(5월15일까지)은 ‘인공’과 ‘인간’이 어우러진 창작의 묘미를 보여준다. 인간적 감성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면서도 형과 선, 색감이 거칠지 않고, 뛰어난 완성도와 정제미를 겸비했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케이3관에 놓인 스위스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청동 조형물 신작들. 잿빛 콘크리트를 바른 전시장 벽면이 작품들의 모양, 색감과 미묘하게 어울린다. 노형석 기자
색색의 형광물질을 바른 사람 입상 모양의 금속 덩어리들이 전면에 콘크리트를 바른 회색 전시장에 도열한 론디노네의 조각들은 소통의 미덕이 돋보인다. 눈에 감기는 색조의 매력도 있지만, 관객마다 형상 속에 각자의 상상력과 기억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작품과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계장치나 광학기구 같은 특유의 기하학적 도상들이 밝고 컬러풀한 화면 속에서 유영하거나 뒤얽힌 이상남 작가의 신작들은 팬데믹 시대의 공포와 불안, 답답증을 징후처럼 드러낸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전시장에 내걸린 독일 화가 사빈 모리츠의 추상그림을 관객이 지켜보고 있다. 갤러리 현대 제공
구상과 추상, 광기와 이성 사이를 가로지르며 충동적이고 강렬한 발색으로 기억의 편린들을 화면에 표출한 독일 중견화가 사빈(자비네) 모리츠의 첫 한국 초대전(24일까지)이 차려진 사간동 갤러리 현대 전시장도 지나치기 어렵다. 80살 넘은 어르신 화가들의 단색조 회화와 젊은 작가들의 팬시한 소품으로 양갈래 쏠림 현상을 보이는 지금 한국 미술시장 양상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의 전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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